(213)
오랜만에 달콤한 잠이 찾아왔다.
물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듯 편안한 잠이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자 본 게 얼마 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을 했고, 지켜야 할 사람을 지켰으며, 얻어야만 할 것을 얻었다.
북부 세베릭, 동부 카리오사, 서부 프로이하이트와 마커스, 중부 그레이스, 남서부 체사르, 그 외 수십 명에 달하는 날고기는 대영주.
기나긴 밀실 협상이 끝났다.
이제 그들은 선황에게 했듯, 제이릴리스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그럼 제이릴리스는 제국 전체를 손에 쥔 진짜 황제가 된다.
회귀 전에는 수십 년 동안 수십, 수백만의 피로 얻어냈던 걸, 2년도 되지 않아 얻어낸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피가 약간은 흘렀다.
전대 그레모리우스와 전대 프로이하이트가 내 손에 죽었다.
최대한 깡패나 침식이 진행되고 있는 사람에 한정하기는 하였으나, 빈민가에서 수천을 베고 불태웠으며, 배움의 거리에서 진을 끼고 온갖 패악질을 벌였고, 홍등가의 적가면과 옛 빈민가의 코넬을 통해 수도 암흑가를 통제했다.
하지만 그건 제이릴리스가 아니라, 내가 한 일이었다.
그녀의 악명은 모두 피로 물든 즉위식 날에 기인했고, 바꿔 말하자면 그 이후로 추가적인 악명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황족 대숙청도 나와 그녀가 함께 한 일로 알려져 있으며, 그조차도 점점 내가 주도한 일로 여겨지게끔 유도하고 있다.
그 결과 자리가 위태로워질 만큼 많은 원성을 받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세계 최강의 무력과 금력과 권력을 가진 존재에게 믿음을 샀고, 더 많은 직위와 권력과 직함으로서 내 존재를 용인받았다.
이만하면 썩 나쁘지 않은 성적표가 아닌가 싶다.
물론 누군가는 내게 물을 것이다.
-생명의 무게를 어떻게 잴 수 있지?
-수천이 죽었어. 이게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그건 누군가가 아니라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은 내 양심일 수도 있겠다.
인정하겠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질문을 비웃는다.
“당연히 잴 수 있지. 그게 내 일인데.”
적에서 더 큰 손해를 끼치기 위해 더 적은 손해를 입은 부대를 진격시키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더 적은 사람이 사는 영지를 포기하는 것.
언제나 그 일에서 가장 더럽고 치사하고 고통스러운 순간 때문에 월급을 받는 거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베어 죽이는 것만으로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악한 마왕이 살고 있지 않으니까.
때로는 마왕을 만들고, 때로는 용사를 후원해주며.
이 위태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통치해야 하는 것이다.
“제이릴리스.”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중얼거려본다.
그 여름날 나를 대신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던 황립 마도 공방 지하로 들어갔고, 몇 년 뒤 홀로 돌아와 1황자파의 신성으로 떠올랐으며, 때로는 경계 받고 때로는 환영받은 끝에 스스로 정점에 오른 나의 쌍둥이를.
이번 삶에서만큼 널 폭군으로 만들지 않겠어.
만민의 환호성보다도 네 웃음이 좋아.
네 웃음, 네가 줄 권력, 네가 만들 세상.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며 꿈속의 꿈에 취해있던 와중.
“!”
우오오오-!
날카로운 칼날이 척추를 파고드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눈앞에는 테이블에 누워 잠든 제이릴리스가 있었고, 손끝에 어제 마시던 술이 걸렸다.
“밖인 것 같잖니?”
“전하.”
소파와 테이블에 각각 쓰러져 자고 있던 세레라지에와 텐티아 경도 고개를 들었다.
텐티아 경이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걸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시간에 머리카락 색이 보인다고?
촛불도 샹들리에도 다 껐는데?
“!”
다급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넓은 유리창 안으로 들이치는 빛은, 저 창백한 청록빛은, 결코 달빛 따위가 아니었다.
“세상 X발.”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구름 낀 밤하늘, 거대한 청록색 빛무리가 둥둥 떠다니며 뭉쳐 있었다.
“이건 아니지! 시X! 이건 아니잖아!”
지름이 수백 미터는 되어 보였다.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할 짓 못 할 짓 다 했는데!”
저건 마경이었다.
“시X! X발!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
그것도 내 회귀 전 삶 40년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강력한 마경이었다.
* * *
황제와 대공 둘, 백작 하나와 기사 하나가 비틀거리며 별궁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미칠 노릇이로구나.”
“세상.”
“발렌. 내가 한 번 측정해 봐서 알잖니. 저거 곧 넘칠 것 같구나.”
“전하. 갑옷을 가져오겠습니다. 근신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닌 듯합니다.”
“발렌 님. 괜찮으세요?”
“어어.”
그들은 권력자이자 초인이었지만, 밤하늘에 청록색 구멍이 뚫린 상황만큼은 익숙하지 못했다.
황궁은 수도 북쪽 고지대에 있었고, 별궁은 황궁 부지 안에서도 꽤 높은 곳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밤에도 밝은 수도 솔레타라온의 거리와 하늘을 창백한 빛으로 물들이는 거대한 구멍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찌지지직!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세상 시X…….”
발렌시아누스는 그게 어떤 거대한 존재가 핵을 통해 이곳으로 넘어올 때 나는 소리임을 알고 있었다.
과거 제이릴리스와 용의 굴에서 보았던 하늘 해파리는 지금 넘어오는 존재에 비하자면 아담할 게 분명했다.
우웅!
지름 500m의 청록색 빛 덩어리가 크게 요동쳤다.
“우오오오…….”
그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이물이 아가리를 내밀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비현실적인 서커스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그것의 강하를 바라보았다.
“고래?”
그것의 등은 매끈한 검은색이고 그것의 배는 부드러운 회색이었다.
배 쪽에는 턱 아래부터 꼬리까지 이어진 깊은 세로 주름이 나 있었다.
몸통은 타원형이었으며, 덜퍽진 지느러미 같은 발을 좌우 각각 네 개씩 달고 있었다.
촤아아악!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제국 수도 한가운데에 발을 들였다.
마치 바다의 긴수염고래에게 네 쌍의 다리를 달아주고 덩치를 수백 배로 늘려놓은 듯한 이물이었다.
수도 중심부 운하는 놈의 발을 다 적시지도 못했다.
툭 부딪히기만 해도 석조 건물이 무너지고 으스러졌다.
“그대. 저것이 얼마나 거대한 듯한가?”
발렌시아누스는 건물 한 층의 층고가 3.3m라는 사실을 떠올렸고, 이물 옆에서 간신히 부서지지 않고 서 있는 6층 석조 건물을 통해 놈의 몸길이를 추측했다.
“발끝부터 등까지의 높이가 약 250m. 주둥이 끝부터 꼬리 끝까지의 거리는 약 1km 정도로 추정되옵니다.”
말하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수치였다.
거대한 석조 건물과 화려한 호텔들이 전부 주석으로 만든 장난감처럼 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과거 자신이 세웠던 피난 계획을 하얗게 물든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일단 근교 요새로 폐하를 모시고, 흑철 기사단에게 황립 마도 공방의 마법사들을 호위하도록 하고, 청은 기사단이 놈을 도시 밖으로 유인…….’
그가 머릿속으로 수도 인구 분포상 놈이 어디를 짓밟고 지나가야 최대한 사상자가 안 나올지 고민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 고민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똑같이 생긴 아가리가 청록색 빛무리 바깥으로 주둥이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미친. 저런 게 한 마리 더 나온다고?’
그는 수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인구의 수를 크게 하향 조절했다.
‘다 조졌다.’
당장 제이릴리스에게 교외 요새로 나가자고 간언하려 했다.
검은 시체룡의 날갯짓 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폐하.”
“그래. 그대여. 차마 못 봐주겠구나.”
그러나 황제는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이를 갈았다.
“감히 저 버러지들이 짐의 영토를 침범해!”
황금빛 기운이 물씬 피어올라 그녀의 몸을 감쌌다.
“조금만 기다리라. 대공. 짐이 저 마경을 단숨에 닫아버리겠노라.”
제이릴리스가 한 걸음 성큼 걸어 나섰다.
밤바람에 백발을 휘날리며 파괴술 주문을 외우는 황제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 신의 화신 같았다.
“폐하!”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제 쌍둥이 여동생의 노란 눈동자 속에서, 그 등에서 수십 년 전의 순간을 떠올렸다.
‘구하려 와줘.’
지독한 환청이 그의 귓가에 울렸다.
그는 이상하게도, 저 당당한 황제가 등을 떨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선 궁정 마법사들과 함께 놈의 실체를 분석하고, 청은 기사단에게 명령을-”.
그는 무례고 나발이고 다 잊어버리고 제이릴리스의 소매를 붙들었다.
되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곳으로 두 번이나 보낼 수는 없었다.
죽고 살아나서도 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낭랑한 목소리로 그의 간언을 뿌리쳤다.
“그대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저런 괴물이 전에도 나왔다면 기록에 안 남았을 리가 없지 않으냐? 그리고 짐은 그런 기록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노라.”
발렌시아누스는 세레라지에에게 눈빛을 돌렸다.
“누나! 뭐라고-”.
금은요동의 마법사는 이복동생의 처음 보는 절박한 눈빛에 숨을 들이쉬었지만, 끝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전례가 없잖니.”
제이릴리스는 차분하게 그녀의 소매를 붙든 발렌시아누스의 손가락을 떼어놓았다.
발렌시아누스는 회귀자다운 절박함을 담아 상처 입은 짐승이 울부짖듯 외쳤고.
“폐하. 절 두고 가지 마십시오. 절 두 번이나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제이릴리스는 언제나 그랬듯 나른하고도 초연하게 웃었다.
“그래. 짐도 그러고 싶었노라.”
다음 순간 황제의 몸이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황금빛 오러와 용언의 기운을 물씬 두른 황제의 모습은 마치 한 줄기의 유성과 같았다.
“제이릴리스!”
무너져 내리는 발렌시아누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가운데, 황제의 손아귀에서 마경의 이물을 향해 한 줄기의 빛이 쏘아져 나갔다.
파괴술 최고위 주문, 진노의 창이었다.
퍽!
정통으로 얻어맞은 이물이 막 내밀었던 고개를 움츠렸고, 제이릴리스가 몇 배로 가속했다.
쾅-!
두 번째 이물의 몸을 관통해버린 황제가 마경 안으로 사라졌고, 두 번째 이물도 다시 마경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발렌시아누스는 창백한 빛을 뿜는 마경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지켜주려고 했는데.’
지독한 자괴감이 다시 한번 소년 대공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좌절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수도 한복판에는 여전히 이물 하나가 남아 있었다.
“……!”
“……! ……!”
“……, …………!”
그 덩치로 무수한 생명의 단말마를 묻어버리며.
와지지직!
움직이기만 해도 건물 하나를 무너뜨리면서.
* * *
마경에서 떨어진 이물은 생소한 세상의 생소한 기운에 당혹스러워했고, 탐나는 영혼의 향기가 옅어졌다는 사실에 당황했으며, 최종적으로 동료를 늘려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쿵-!
이물이 여덟 개의 다리를 땅에 박고 고개를 쳐들었다.
우지지직!
그것만으로도 충격파가 파도처럼 일어나 일대의 건물들을 무너트렸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쳐든 이물은 거대한 산 같았고, 세상을 덮으려고 온 종말의 해일 같았다.
이물의 배와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연무장만큼 거대한 아가리가 쩍 벌어지고, 청록색 기운이 온몸의 혈관을 따라 내달리며 아가리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정점에 달했을 때.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수도 전체를 뒤흔드는 정신 파동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강력한 기운을 정통으로 뒤집어쓰고 즉사한 후 침식성 언데드로 다시 일어난 게 8천 명이었고, 산 채로 침식을 시작한 게 1만 5천 명이었다.
“꺄아아악!”
“엄마, 엄마! 물지 마!”
“도망쳐어어어어어!”
“세상의 종말이다! 회개하라!”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머리에서 굵은 촉수가 솟고, 팔이 갑각에 휩싸이더니 집게 팔로 변하고, 몸이 개구리처럼 부풀어 오르고, 온몸이 털과 가시로 뒤덮이고, 핏줄과 힘줄이 녹아내려 옆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
옛 빈민가 중심부 6층 건물, 고아 장애인 빈민 출신의 초선 의원 코넬은 저절로 늑대 인간으로 변해버린 부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몬의 기도를 외웠다.
“코넬 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제가 변이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침착하세요. 너무 강한 다른 옛것의 기운에 아몬신께서 힘을 보태 주셨습니다.”
“아……!”
“일단 주민들 대피부터 시작하세요. 서쪽 성문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코넬은 그녀의 세상이 뒤집히는 일을 여러 차례 겪어본 사람답게 의연히 지시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기분으로.
* * *
발렌시아누스는 나라 잃은 표정을 만면에 띄운 채로 전령에게 지시했다.
“백병전으로는 답이 없다. 청은 기사단 대기시켜. 대마법 급 마도구를 이용한 폭격을 허락한다. 부수적인 피해는…… 내가 책임지겠다.”
세상에서 제일 황망한 목소리로.
“그리고 마커스를 불러와라. 니벨룽겐을 띄우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