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14)화 (214/340)

(214)

배움의 거리는 벌집을 쑤신 듯 분주했다.

“아아아악!”

“안 돼!

평소 흑마법과 옛것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던 학생들은 너무나 거대한 존재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절하거나 침식되었다.

아카데미 회장이자 아카데미 연합회장 진은 사생아들을 한데 모아 놓고 감시하는 동시에 보살폈다.

“일단 귀부터 막아. 그리고 빨리 주기도문을 외워. 정 못 버티겠으면 그냥 약이라도 먹고 자.”

“나,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눈 감아. 성수 부어줄게.”

진은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여기 성수 더 가져와.”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바깥쪽에서도 너무 소모가 심해.”

그는 어떻게든 대책과 해답을 찾아 나갔다.

“아카데미 신학과 애들하고 신학교 애들 다 데려와. 저쪽 뒷길이 신학교 기숙사랑 이어져 있어. 연합회 이름으로 먼저 협조 요청하면 다 올 거야. 끝까지 버티면…… 알지?”

“알았어. 회장.”

“회장! 큰일이야. 정문 쪽에 완전 변이 침식자가 나타났어.”

“싸우지 말고 흘려보내. 교전 소리를 듣고 더 몰려올 수도 있어.”

“회장! 애냐랑 다섯 명이 침식을 시작했어. 너무 가까이서 정신 파동을 들었더니-”.

“칼로 파내고 성수로 정화해.”

“뭐, 뭐?”

“황실 관계자가 알려준 방법이야. 하라면 해.”

언제나 침착한 척해라.

그게 ‘조직의 장’ 된 자의 일이었다.

“다들 침착해! 황제 페하와 대공 전하께서 곧 움직이실 거다. 지금 수도에는 세베릭 전하와 카리오사 각하도 있어! 금방 진압될 테니 당황하지 마!”

평소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보여 주던 진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푸른 눈을 빛내며 현장을 지휘하는 모습은 뭇 학생들의 믿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역시 진이야!”

“회장님! 믿습니다!”

“일단 다들 격리 시작했고, 검술 학부랑 마법 학부 애들 모았습니다.”

“상점에서 시약 다 모았습니다. 언제든 사용 가능합니다.”

그를 중심으로 조직은 돌아갔고.

“정문 침식자 잡았습니다!”

“와아아아아!”

나름의 결과를 내놓았다.

그렇기에.

아무도 진의 속이 까맣게 불타오르고 있다는 건 몰랐다.

‘대공 전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 * *

‘아무래도 이거 X 된 것 같은데.’

홍등가 여명 카지노의 지배인이자 밀수 연초 사업의 대모, 적가면은 제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VIP들이 상황을 묻고 있습니다. 뭐라고 대답할까요?”

“침식자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거리 입구에서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신풍조를 투입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은 끌지 못할 듯합니다.”

“금빛 유성은 코드 ‘폭룡’이었습니다. 황궁에서 곧바로 비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명백했다.

애초에 카지노 옥상에서도 저 멀리 수도 중심부에 있는 이물이 보이는 판이었다.

대성당 첨탑만큼 큰 이물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적가면은 가면 너머의 얼굴을 그 가면처럼 굳혔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지금 당장 금화와 보석을 마차에 실어서 수도에서 도망치는 게 정답이었다.

아무리 황실 기사들이 강하다 한들, 최소 수천, 최대 2만에 달하는 침식자들을 시가전에서 정면으로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가면은 발렌시아누스를 믿었다.

‘정면으로 이기지 못하는 건 대영주 연합도 똑같았어.’

그 주도면밀하고 음습하며 잔혹한 황형이, 솔레타라스 황실이 뭔가 준비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VIP들을 상아탑 특구 쪽으로 대피시켜.”

“적가면께서는-.”

“우리는 여기 남아 시민들을 구할 거다. 침식자 척살보다는 시민 구조에 집중해.”

조직 간부들은 그녀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녀가 할 말은 아니었다.

턱을 분리해놓은 붉은 여우 가면의 입가가 씰룩였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곧 움직일 거다. 어떻게든 진압은 할 수 있을 거라고. 그 후 찾아올 혼란기에 제일 먼저 때려 잡히는 게 우리 같은 깡패들이겠지. 살아남으려면 수도 정세에 뛰어들 명분을 만들어 놔야 해. 연초 창고를 확보하고, 궁정 귀족들의 일가족을 구출하는 데 집중해라. 지하수로를 통해 상아탑 특구로 대피시키겠어. 그들의 우리의 방패가 되어줄 거다.”

“예!”

간부들이 머리를 숙이고 달려 나갔다.

적가면은 두려움에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며 황궁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도 제일의 망나니라 불리는 소년 대공은 두 협력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 *

수도 중심부가 박살이 났고, 많은 사람이 황궁 쪽으로 도망쳤다.

이는 무의식적이었기에 더더욱 진솔한 욕망의 발현이었다.

소드 마스터이자 대마법사라는 황제라면 그들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고 은연중 기대한 것이다.

발렌시아누스는 저들을 모두 받아줬다가는 이물이 이쪽으로 달려올 수도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윤리와 도덕을 떠나 효율적인 명령을 내렸다.

“……근위대장.”

“예. 전하.”

“근위대는 황궁 출입을 통제하게. 궁정 귀족, 행정관, 기사, 근위대원, 치안감, 장교들의 일가족과 친지만 받아 들여주게.”

그저 한없이 비정한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근위대장은 그 명령의 본질을 알았다.

근위대원들과 기사들, 치안감들이 전선을 이탈해 가족들에게 가지 못하도록 통제하며, 만에 하나라도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명령을 잘 따르라는 뜻이었다.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이 아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신민들의 눈빛을 보고 있자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치안총감이 발렌시아누스의 폭발 은폐 명령을 무시했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보았고, 지금 저 망나니 대공의 눈빛이 완전히 맛이 가 있는 것도 보았기에, 순순히 고개 숙여 명령을 따랐다.

발렌시아누스의 명령은 윤리와 도덕을 떠나 효율적이었다.

그는 경험적으로 인간의 선의보다 악의를 이용하는 데 익숙했다.

‘수도 한복판에 출몰한 1km급 이물은 본질적으로 전쟁이 아니라 재난이다. 재난 상황에서 내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지. 바꿔 말하자면 일신의 안전이 아니라, 가족과 친지의 안전만 보장해줘도 충성심을 되찾을 수 있다.’

가족과 친지의 안전을 말로나마 보장받은 기사들과 정예병들의 눈빛에 침착한 기운이 돌아왔다.

‘병사, 기사들의 가족만 받아줬다. 그들은 안도감을 품는 동시에 수도 시민들의 질투와 분노, 원망을 받을 수밖에 없고, 죄책감을 느낄 거야. 동시에 그 죄책감을 덮고자 우리 황족의 명령에 더더욱 복종할 것이다.’

소년 대공은 평소와 달리 제복이 아니라 검은 바탕에 노란 무늬가 들어간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루디가 셔츠 차림으로 달려 나가려던 그를 붙잡고 미친 듯한 속도로 입힌 갑옷이었다.

아직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새 갑옷은 그의 온몸을 빈틈없이 감쌌고, 그는 오랜만에 황제와 함께 전장에 섰던 야전 원수 발렌시아누스로 돌아갔다.

“바르바토스 경.”

거인 기사가 투구를 눌러 쓰고 전투 망치를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치안감들에게 명령해 신민들의 대피를 돕게. 동시에 황동기사단이 들어올 수 있게 동문과 남문을 확보하도록. 흑철 기사단은 그동안 침식자들이 사방으로 도망치지 않도록 성긴 포위망을 유지해주게.”

거인 기사는 잠시 발렌시아누스의 명령에 담긴 의미를 분석했다.

황동기사단이 들어올 수 있게 남문과 동문을 확보하라는 말은, 그곳으로 시민들이 대피할 수 없다는 말이었고, 흑철 기사단 50명으로 침식자들을 포위하라는 건, 기사 한 명당 거리 하나를 맡으라는 뜻이었다.

거인 기사는 언 듯 불합리하다 못해 잔혹하기까지 한 명령을 받들었다.

그는 열여덟 살에 처음 검을 받은 이래로, 단 한 번도 황실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하지요. 전하. 이 흑철의 저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

“그런 눈빛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가 전하였어도 똑같이 명령했을 테니까요.”

발렌시아누스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백금기사단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얀 바탕에 황금 무늬가 들어간 갑옷을 입은 백금기사단장이 명령을 기다렸다.

“경. 와이번핏을 확보하고 마경으로 들어가 황제 폐하를 돕게.”

“본부 받듭니다. 전하.”

마경은 밤하늘 높은 곳에서 여전히 창백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은 거의 자살 명령에 가까웠지만, 대공은 명했고, 백금기사단장은 따랐다.

발렌시아누스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전령을 바라보았다.

“상아탑에 가서 조약에 따라 참전을 요구해라. 이물의 시체를 잔뜩 떼어줄 테니, 원로들까지 다 튀어나오라고 해.”

전령 서른이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수도 전체에 침식자 2만 3천이 우글거리고 있다.

서른 명 중 몇 명이나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제국 제일의 기수들은 곧바로 준마를 잡아타고 거리를 내달렸다.

발렌시아누스는 마지막으로 텐티아와 루디,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하얀 갑옷을 입은 적기사와 마총 카스파를 쥔 시녀 백작, 진주 귀걸이를 한 천재 마법사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듯 각각 늠름하고 상냥하며 새침하게 웃고 있었다.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옵니다.”

“죽어도, 죽은 후에도 발렌 님을 섬기겠습니다.”

“교만하구나. 네가 너보다 빨리 죽을 것 같니?”

그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투구를 눌러 썼다.

“그럼 우리, 서로를 지켜주도록 하지.”

협상이 끝나면 협상할 수 없는 존재가 찾아오는 환장할 세상에서.

* * *

발렌시아누스는 이물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황궁은 수도 북쪽 중앙에 있었고, 이물은 수도 정중앙에 있었기에, 대로를 따라가면 쉬웠다.

문제는 대로가 사람 잡아먹으려는 침식자와 그들로부터 도망치는 신민들로 가득했다는 사실이었다.

제국은 엄한 법으로 대로에 나올 수 있는 신분과 직업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생존에 대한 욕구 앞에서 법은 무의미했다.

따라서 발렌시아누스는 그리 뜨겁지 않은 불길을 뿜어내며 신민들을 밀어냈고, 루디는 침식자들의 대가리를 향해 끝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비켜라! 이 몸의 행차시다!”

“지옥으로 돌아가세요!”

수많은 인파와 침식자가 황궁 쪽으로 향하는 가운데, 그 흐름을 거스르려는 자는 단 넷이었다.

그러나 그 넷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수만을 뒤로 한 채 거대한 이물 앞에 섰다.

텐티아는 혼자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루디는 발렌시아누스의 등만을 따랐으며, 세레라지에는 자신이 왜 따라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발렌! 이제 어쩔 생각이니!”

그리고 발렌시아누스는 원군이 올 걸 알고 있었다.

“조금만 버텨줘!”

“사방이 터진 구토 슬라임처럼 생긴 괴물 새끼들이잖니! 저놈은 아침에 카지노 문 닫았을 때 전 재산 다 잃은 폐인처럼 생겼구나!”

“조금만 버티라니까!”

‘수도가 망하면 교회로서도 큰 타격을 입지. 게다가 이걸 황실이 혼자 진압해버리면 적어도 20년 동안은 아무 말도 못 하게 될 거거든.’

몰릴 대로 몰린 발렌시아누스는 악의의 계산법만을 이용해 세력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그리고 지난 40년간 그랬듯, 그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사아아아-!

찬란한 백색광이 어둠 내린 거리에 흩뿌려졌다.

촉수와 껍질과 이빨이 뒤섞인 온갖 괴물들이 불타오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다운 짙은 얼굴선, 그윽한 눈빛과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성자.

분노한 신의 검은 숫염소, 마테오스가 온몸에서 공간이 일그러질 듯한 신성력을 뿜으며 다가왔다.

“오! 주여! 저 추악한 자에게 철퇴를 내려주소서!”

“수상한 자는 모두 죽여라! 그분께서 골라가실 것이다!”

검은 사제복 아래 갑옷을 입은 전투 사제들과, 하얀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가장 선두에 선 건 앙겔로스였고, 그는 며칠 전 검을 맞댔던 텐티아를 보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면갑을 들어 올렸다.

“텐티아 경?”

“예. 세상 참 좁습니다.”

텐티아 역시 면갑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마테오스는 검은 갑옷을 입은 망나니 대공을 바라보았다.

“성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대, 대공.”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일단 이 이물 새끼부터 죽이고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아닙니까?”

모든 걸 잃은 듯한 황망한 광기를 본 마테오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씩 웃으며 부탁했다.

“제게 작전이 있습니다. 침식자들을 쓰러트리지 말고, 약화하는 데 집중해 주십시오. 구마의 빛을 넓게 뿌리거나, 변별의 장막을 사용해서 말입니다.”

마테오스는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무슨 작전인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하.”

발렌시아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슬픔을 삼키듯 웃을 뿐이었다.

‘알면 반대하겠지.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찬성하는 건 보고 싶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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