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16)화 (216/340)

(216)

마테오스는 세계에서 가장 신과 가까운 성직자였고, 영혼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아아아악!’

‘안 돼!’

‘제발 그 아이만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단말마가 그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렸다.

“아아.”

맑은 물에 한 방울 녹색 물감이 떨어져 녹색으로 물들고, 한 방울 붉은 물감이 떨어져 적색으로 물들고, 다시 한 방울 검은 물감이 떨어지다 보면.

쏴아아아!

마테오스의 가슴속은 그 머리카락만큼이나 검게 짓물러버렸다.

발렌시아누스를 만나고 아르고스를 만나며 세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걸 배웠다.

그저 사람을 구하고 싶고, 그저 사람을 돕고 싶던 소년 신학생의 동심은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마테오스는 고개를 돌려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화르르륵!

“크오오오!”

수도 제일의 망나니는 불타오르는 도시와 거대한 이물을 배경 삼아 고고하게 서 있었다.

황금색 술을 늘어트린 까만 투구로 얼굴을 감추고, 광오하고 잔혹한 태도를 견지했으나, 성자의 초인적인 감각은 투구 안에서 떨리는 숨소리를 들었다.

‘어째서.’

그 발렌시아누스도 울먹이고 있었다.

마테오스는 고개를 약간 돌려 발렌시아누스가 아니라 이물을 바라보았다.

여덟 개의 다리가 달린 고개를 닮은 이물을.

마테오스는 이물과 옛것과 마경이 득세하기 전에도 이 세상의 지성체들이 다퉈 왔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이렇게까지 처절한 지옥으로 만든 건 그들의 책임이 아닐지도 몰랐다.

마테오스는 처음 품었던 마음을 다시 떠올렸다.

그저 구하고 싶고, 돕고 싶었다.

세상이 이 꼴이 난 게 저 이물 때문이라면, 저걸 죽이면 또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이윽고 마음을 다잡은 성자가 불구덩이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건틀릿 낀 손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성자님. 다 조졌습니다. 대피하십시오.”

발렌시아누스가 면갑을 올리며 말했다.

마테오스는 저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그게 무슨 개,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 * *

나는 40년간 제국 곳곳에서 열린 마경과 싸웠고, 온갖 형태의 이물을 보아왔다.

그리고 저 고래 닮은 이물이 거대한 아가리에서 썩은 거대 갈매기 같은 이물들을 토하는 순간 직감했다.

이건 조졌다.

청은 기사단의 폭격을 견뎌낸 걸 보아하니, 상처를 입히려면 저 지방층부터 뚫어야만 했다.

정신 파동과 이물을 어찌어찌 피해서 가죽과 지방층을 뚫어낸다고 해도, 그 밑에도 갑옷 같은 근육이 있을 뿐이었다.

관절이나 내장 같은 급소를 노리려면 얼마나 큰 무기가 필요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물 중에도 100m 단위의 개체는 흔치 않다.

작년 말, 프로이하이트의 마경에서 싸웠던 용도 약 45m이었고, 그것만 해도 상당한 거구였다.

같은 곳에서 보았던 하늘 해파리 역시 촉수 길이를 제하면 몸통은 20m 정도였다.

차라리 중, 소형 이물 10만 마리가 쏟아졌다면 이보다는 대응하기 쉬웠을 것이다.

대마법급 마도구 한 방에 죄다 녹여버릴 수 있었겠지.

그러나 저 이물은 회귀 전에도 보지 못한 거구였고, 지금 당장 저 이물을 증발시켜버릴 힘은 우리에게 없었다.

물론 카리오사와 세베릭 등 제국의 대영주들을 죄다 불러 모아 힘을 합치면 가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저것보다도 더 큰 아가리를 가진 이물이 마경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걸 보았다.

그렇게 간신히, 간신히 쓰러트린 다음에 몇 마리가 더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물이 다시 한번 아가리를 벌렸다.

썩은 갈매기처럼 생긴 대형 육식 조류가 또다시 때 지어 날아올랐다.

아무래도 마커스의 비공정을 처음 계획과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해야 할 듯했다.

그래서 나는 마테오스의 소매를 붙들었고, 텐티아 경을 향해 말했다.

“경.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게나! 아주아주 잘 들어야 하네.”

철컥, 텐티아가 막 침식자 하나를 베어 넘기고 면갑을 올렸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예. 전하! 명령만 하십시오!”

지금 필요한 건 투지가 아니었다.

“루디와 함께 세레라지에 누나를 호위하고 상아탑 특구로 가도록. 게스타르테가 제자를 두 번이나 버리지는 않겠지.”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명령이십니까!”

텐티아 경이 기겁하고, 마테오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피같이 붉은 눈동자와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가 동시에 요동쳤다.

몸이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숨을 들이쉬며 잔혹한 내용을 전달했다.

“황제 폐하만 돌아오시면 나도 그쪽으로 가겠어. 기사들과 그 일가족, 고위 성직자들, 대귀족들을 니벨룽겐에 태우고 중부의 총독령으로 이동해 임시 수도로 삼겠다. 이제 솔레타라온은 되찾아야 할 곳이야.”

텐티아 경이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고, 마테오스와 세레라지에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발렌시아누스 대공! 제정신입니까?”

아주 드물게도, 둘의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가 도망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을 거란다!”

“경전에 이르기를,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그대의 도시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나는 세레라지에의 눈동자 대신 저 불지옥 너머 이물을 바라보았다.

“고오오오!”

청은기사단이 분투해준 덕에 아직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상처다운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펑!

모르기는 몰라도, 지금 터지는 마도구 한 발이 금화 수십 닢에서 수백 닢도 할 거다.

“키이익!”

지금 떨어진 와이번 한 마리가 또 금화 수백 닢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기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늘어놓았다.

“수도를 포기하자는 게 아니야! ……약간 후방에 방어선을 설정하고 안정적인 전투를 하자는 것뿐이지.”

* * *

마테오스는 발렌시아누스를 때려눕힐 생각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때 고위 성직자 하나가 그의 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성자님.”

“이거 놓으십시오!”

“아르고스 성하께서 하신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

“성자님께는 순교가 허락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와 민중을 위해서, 반드시 성자님께서는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에 의미가 없다고 가르치신 것도 성하님이십니다!”

발렌시아누스와 성직자가 동시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성직자는 끝내 그 손을 놓지 않았다.

텐티아는 이물과 세레라지에, 발렌시아누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단순한 걸 좋아했고,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좋은 사람과 술잔을 나누고, 나쁜 사람은 베어 넘기고, 황실에 충성하면서.

하지만 발렌시아누스의 옆에서 본 세상은 단순하지 않았다.

수도 시민들의 목숨, 중부 기사들의 결집, 수도에 올라와 있는 대귀족들, 충성맹세까지 한 걸음 남은 정세, 그리고 마경 속으로 사라진 황제.

어쩌면 발렌시아누스 본인도 지금 최적의 방도가 무엇인지 모를지도 몰랐다.

텐티아는 세레라지에가 일개 마법사가 아님을 알았다.

‘나와 결혼하면 황제의 남편이나 황제가 될 수 있잖니.’

과거 프로이하이트에서 그녀가 직접 했던 말을 기억했다.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노란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만에 하나 황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발렌시아누스가 여기서 죽을 생각이라는 걸 알아챘다.

제국이라는 기계에서 가장 거대한 톱니 두 개가 사라졌을 때, 그곳을 어떻게든 메울 수 있는 톱니바퀴를 지정했다는 것도 알아챘다.

“세레라지에 전하.”

텐티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살아서 황실을 다시 일으키실 의무가 있습니다.”

“너-!”

세레라지에가 텐티아를 쏘아보았다.

금은요동의 마법사가 배신감에 몸을 떨었고, 적기사는 묵묵히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니?”

“전하!”

“색도 발렌이 더 밝히고, 통치도 발렌이 더 잘하는데, 발렌이나 끌고 갈 것이지 왜 날 도망치게 하려는 거니?”

세레라지에는 발버둥 치며 반항했고, 텐티아가 주춤했으며, 발렌시아누스가 텐티아에게 가세했다.

“난 인망이 없고 평판도 망했잖아! 내가 살아 봐야 생존자들을 결집할 수가 없다고! 누나는 그래도 영웅 이미지가 있으니까, 누나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검은 갑옷을 입은 그의 기세는 무시무시했지만, 세레라지에는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치며 반박했다.

“닥치렴! 난 황족 이전에 마법사란다! 영웅 이미지도 소문도 다 네가 만든 거면서 뭔 소리니? 아니. 애초에 사람 구하자는 소리를 왜 내가 하고 있니? 원래 내가 못 이룬 꿈이 아까워 도망치자고 하고, 텐티아 경이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말리고, 네가 뭔가 끔찍하면서도 대단한 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 아니었니?”

“아니, 세상! 저 큰 걸 어떻게 잡아? 대마법급 마도구를 지금 몇십 개나 퍼부었는데도 안 통하잖아! 상아탑 원로들 불러도 못 잡을 수도 있다고!”

“그, 그건!”

그건 세레라지에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대마법급 마도구의 위력은 그 가격만큼이나 무시무시했다.

비슷한 위력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를 고용하는 게 더 비싸서 사용할 뿐이지, 위력 자체는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을 떨게 했다.

즉, 상아탑 마법사들이라도 저 마도구 들보다 강한 마법을 그때그때 사용하기는 힘들었으며, 빗자루를 타고 날아와 마법을 퍼부어도 시간 끌기 이상은 안 될 확률이 높았다.

“저거 잡으려면 저것만 상대하기 위한 마법을 하나 만들어야 해!”

주로 피나 조직을 분석한 다음, 융해 계열의 혈마법을 개체의 특성에 맞게 조율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상아탑이라도 며칠은 걸리겠지. 내가 기사들이랑 최대한 시간을 끌 테니까, 누나는 상아탑에 가서 준비해. 누나는 전선에서보다 연구실에서 더 도움이 돼. 워록이 아니고 메이지잖아.”

발렌시아누스가 못을 박듯 말했다.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떨궜다.

챙 넓은 고깔모자의 짙은 그림자가 새침한 얼굴에 짙게 드리워졌다.

“나로는 부족하니?”

“뭐?”

“충성맹세 일정이 시작되고 이것저것 개발한 게 많단다. 제자들, 워록들이랑 같이 뇌운을 불러서 단일 개체 대상의 전격 마법도 연습해 봤고, 카리오사 이후로 캐스팅 속도도 더 올렸잖니.”

“아니, 누나.”

“저 침식자랑 이물들은 어찌어찌 막을 수 있잖니. 지방층이 두꺼워서 문제라면, 그 지방층에 한 번만 불을 붙이면 살아있는 양초로 만들어버릴 수 있지 않겠니?”

발렌시아누스는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잡았고, 그제야 자기가 갑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진짜…… 말 안 통하네!”

마법사 세레라지에에게는 칭찬에 가까운 말이었다.

“네가 만들어준 영웅 이미지잖니. 내가 여기서 끝까지 뭐라고 해보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토벌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생존자들을 규합할 수 있지 않겠니?”

“!”

“네가 이 사달을 내놨는데, 황실에 대한 여론이 어떻게 되겠니? 저 대영주들은 그걸 어떻게 이용하겠니? 황실의 배신이 아니라, 이번에도 발렌시아누스 개인의 타락으로 둘러대야 하지 않겠니? 그러려면 내가 도망치면 안 되잖니.”

세레라지에의 파란 눈은 여전히 한없이 맑았다.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를 위해서만 사는 마법사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란 눈동자는 발렌시아누스의 것을 묘하게 닮아가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흘렸다.

신음성 같기도 했다.

상황 판단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살았던 그는, 악의를 계산하는 분야에서 오랜만에 뒤통수 맞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하늘에서 창백한 청록색으로 빛나는 마경을 바라보았다.

미친 듯 떨리던 몸이 한결 편안해졌다.

분명 제이릴리스는 그를 믿었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마경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래.”

“발렌!”

“누나는 황궁으로 올라가서 대마법을 준비해. 나는 사람들 대피시켜 놓고 타이밍 맞춰서 돌진할게. 눈알을 파고 들어가든, 삼켜진 다음에 입천장을 뚫고 올라가든, 뭐라도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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