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17)화 (217/340)

(217)

40년 차 행정관료이자 야전 원수가 다시 한번 이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일단 전선 일선에서 몸을 뺏다.

물론 침식자와 이물들이 몰려왔지만.

“어딜 감히!”

“그 더러운 주둥아리 치우세요!”

텐티아가 화한을 휘두르고, 루디가 마총을 쏴 머리를 쪼개놓았다.

그는 황궁 앞까지 물러난 뒤 전령들을 불러 놓고 지시를 시작했다.

“청은 기사단은 우선 귀환. 폭격용에서 공중전용으로 장비를 교체한 뒤, 부상자를 수습하고 재출격하게. 비행 이물들을 상대하도록.”

마테오스가 빠르게 말했다.

“와이번핏 쪽으로 치유 사제들을 보내라 명령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전령들이 각오에 찬 표정을 하고 말을 잡아탄 채 달려 나갔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의 등에서 애써 눈을 떼며 말했다.

“그리고 주민 소개(疏開)에 집중하도록 하지. 마법의 위력을 조절할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까.”

헐레벌떡 달려온 흑철 기사가 발렌시아누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치안감과 흑철 기사단만으로는 도저히 인력이 모자랍니다.”

“백금 기사단에게 귀환을 명하겠다. 마경 진입은 잠시 미루고, 황동기사단이 수도 안에 돌입할 때까지 대피를 도우라 하겠네.”

“예. 전하.”

황제의 고문이자 기사총감의 명령은,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전령들에 의해 수도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빛 신호를 받고 돌아온 청은 기사단장은 거친 숨을 들이쉬었고.

‘주민 대피라. 고결하신 판단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이물 사냥은 미뤄질 수밖에 없어. 무슨 대책을 세워 두신 건지 아직은 모르겠군.’

백금기사단장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악우들을 향해 달려갔다.

“바르바토스!”

“네, 네놈이 여기에는 왜!”

“누가 더 많이 목을 베는지 겨루는 거다! 오늘에야말로 누가 황제 폐하의 제일 날카로운 검인지 정하자.”

백기사의 도발에 거인 기사가 콧김을 뿜었다.

“후회나 하지 마라!”

거인 기사가 전투 망치를 휘둘렀다.

쾅!

인간형 침식자의 목뼈가 무너져 내리고, 머리가 가슴 안까지 박혔다.

“그 정도냐?”

백기사가 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베어 올렸고, 짐승형 침식자가 사지가 잘린 채로 바닥을 굴렀다.

“이제 시작이다!”

거인 기사의 포효와 함께, 거리 곳곳에서 흑철 기사들이 검을 쳐들었다.

* * *

“지지 마라!”

“무리하지 마. 시간만 끌라는 명령이시다!”

“치안감들은 주민 소개에 집중해라!”

“지금 제일 큰 문제가 뭐냐? 말하라!”

“피난민들을 어디로 인도할지가 문제입니다. 도시 외곽으로 몰려 있지만, 그곳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발렌 전하! 상황이-”.

수도에는 동서남북으로 큰 성문이 있었고, 황궁에 가로막힌 북문 주변에는 민가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시민들은 주로 동문과 남문, 서문 근처에 모여 있었다.

상아탑 특구로 향하는 문 역시 서문 쪽에 있었지만, 그 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는 보고를 듣자마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동문과 남문 둘 중 하나 앞은 비워놔야 한다. 그래야 헬레나와 중부에서 올라온 기사들이 수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어.’

솔레타라온의 공식 인구는 약 40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인구는 약 50만, 실제로는 60만도 넘었다.

그 많은 사람이 문 앞을 막고 있으면 기사고 나발이고 들어올 방법이 없었다.

“동문 앞을 비운다.”

“동쪽에는 강이 있어서 중부 기사들이 다리를 건너와야 합니다.”

“그래서다. 저 많은 인파가 다리를 이용하다가는 폭삭 무너질 거고, 죄다 물고기 밥이 될 거다. 그럼 아무도 나갈 수 없고, 중부 기사들도 못 들어와.”

“아.”

기사가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다.

같이 달려온 전령이 송구하다는 듯 말했다.

“이동하는 중 침식자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수도 구역을 떠올렸다.

“그래. 그렇지.”

백금 기사들도 흑철 기사들도 모두 북쪽의 황궁에서 중앙 운하까지 달려갔다.

시민들이 이동할 수도 동남부 구역에는 기사가 적고 괴물이 많았다.

물론 대성당의 성기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성당 주변의 시민들을 대피시키기에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백금기사들과 흑철기사들을 그쪽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끝까지 싸워라!”

“우리 뒤에 황궁이 있다!”

“일어나라! 본넬 경! 지금 경의 누나가 어디 있는지 잊었나?”

지금 그들은 가족이 있는 황궁을 등지고 싸우고 있었고, 그렇기에 막대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인원을 뺐다가 황궁이 함락된다면, 그때부터는 기사들의 불복종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따라서.

발렌시아누스는 냉엄하게 명령했다.

“타이밍 싸움이다. 보내라. 동문으로는 중부 기사들이 들어올 것이고, 남문과 서문으로는 신민들이 대피할 것이다.”

“예. 전하.”

전령 아홉이 각지의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의 배지에 달린 조 번호가 모두 다르다는 것에 주목했다.

‘3인 1조였다. 거의 서른 명을 보냈겠군. 도착한 건 9명인가?’

훗날 하드리탄을 시켜 전령들의 유족들에게 뭐라도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발렌시아누스!”

“하드리탄?”

재무관 하드리탄이 황궁 아래로 달려왔다.

“안 된다! 남문과 서문을 개방하면 안 돼!”

그의 하얀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정장은 구깃구깃했으며,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평소 사용하던 안경 역시 안경알에 금이 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평소보다도 시린 총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방금 계산 결과가 나왔다. 잠재적으로 추가 침식될 사람이 총 3만 5천 명이야. 그리고 그들이 수도 밖으로 나가고, 중부 타 도시나 총독령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그렇게 침식이 번진다면 한 달 안에 최대 85만 명까지 늘어난다.”

“!”

“이건 네가 나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충성맹세 전후로 온갖 침식 교단에서 수도에 사람을 보내기 위해 별 짓거리를 다 했다. 수상하리만큼 돈이 많지만, 활동 기록은 없는 상단이 사방에서 튀어나왔어.”

숫자로 세상을 재 온 전문가의 말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그것들이 저 사람들과 접촉할 거다. 집도 가족도 잃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다. 문을 열고 저들이 나가게 놔뒀다가는 오늘 죽은 사람들보다 열 배는 더 많은 침식자가 탄생할 거다.”

“…….”

“빵이 타든, 설익든, 반죽이 되든 수도 안에서 끝내야 한다. 교전 지역 대피로 끝내. 성문 개방만은 안 된다!”

“…….”

“넌 제국의 대공이고, 난 제국의 재무관이다. 솔레타라온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도시와 총독령을 생각해라. 그들을 이끌어야지!”

* * *

코넬은 장애인이자, 빈민이자, 고아이자, 소녀이자, 이종족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제국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의원이 된 그녀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아무도 버리지 않을 겁니다! 거리를 유지하세요! 압사만은 피해야 합니다.”

“코넬 님. 침식자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번 블록에 5번 건물 짓던 거 무너뜨릴 수 있나요? 그걸로 길을 막겠습니다.”

“그건 코넬 님이 아끼던 8층 석조 건물이…… 알겠습니다.”

“내가 가진 건 사람뿐이에요.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하고, 믿음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했다.

어릴 적부터 돈과 약 때문에 서로를 찌르는 걸 질리도록 보았다.

그랬던 거리가 이제는 건물을 쌓아 올릴 정도로 부유해졌다.

돈이 들어온 건 결과고, 그 과정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돕고, 사람이 사람을 믿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그녀 역시 그녀가 자신들의 삶을 더 좋게 바꿔 주리라는 믿음을 받아 그 자리까지 왔다.

“아몬 신도들. 완전 변이를 허락합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에요.”

“친위대만큼은 남겠습니다. 코넬 님의 몸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럼 제가 일선으로 나가겠습니다.”

“!”

그러니 그녀가 믿는 건 사람의 선의가 아니라, 선의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큰일입니다! 코넬 님. 서문이 개방되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황궁 쪽에서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을 겁니다! 여기가 어떤 상황인지는 제일 잘 아실 텐데!”

저 골목 사이에서 무언가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끼이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침식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하늘에서는 끔찍하게 생긴 새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코넬은 영악하리만큼 똑똑한 소녀였다.

이 상황에서도 성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폐문을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꺄아아악!”

“침식자다!”

“내 손 꼭 잡아!”

사람들은 성문을 향해 몰려들었고, 병사들은 도르래가 있는 성벽 위에서 좁은 계단을 통제하며 사람들을 밀어냈다.

“아.”

코넬은 세레라지에가 만들었다는 전격 반지를 하늘로 들어 올리다, 손을 측 늘어트렸다.

“전하께서는 이깟 사람들 몇몇이 중요한 게 아니겠지요. 평생 아래도 옆도 아닌 위만 보고 사셨을 분이니까요.”

그녀가 마지막까지 맨 뒤에 서 있기 위해 친위대와 함께 움직이려던 순간.

“정신 차리게!”

한 노귀족의 고함의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발사!”

노귀족의 사병들이 성수 묻힌 화살을 당겼고, 낙하하던 이물 새들이 네 장의 날개를 펼치며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의원이라는 자가 먼저 포기하면 어쩌자는 건가? 살아서 뭐라고 할 생각을 해야지. 그대 평민 의원들은 우리와 달리 저들의 바람을 짊어진 존재가 아닌가?”

“당신은……?”

수도 의회에서 코넬과 매일같이 싸우던 궁정 귀족 의원이었다.

그녀의 자경단 법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법 지금은 참 든든하군그래. 정신 차리고 저 사람들 통제하게. 이러다 서로 밀치고 깔리는 순간 나가기도 전에 죽는 거야.”

코넬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아아아!”

“코넬! 내가 왔다!”

그녀의 파벌에 속한 의원들이 자경단을 이끌고 시민들을 통제하며 모여들고 있었다.

저 뒤에서는 아몬 신도들이 혼란에 찬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난리였다.

“밀지 말라고!”

“이쪽에 쇠줄 쳐!”

“발광 시약으로 표지판 만들어!”

코넬은 친위대와 함께 성문 근처로 향했다.

나무상자 위에 올라서서, 아몬에게 전투 함성 기도를 올린 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커진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다들 안전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뒤에서 자경단과 궁정 귀족들이 사병들이 여러분을 지켜줄 겁니다! 그러니 서로를 믿고, 천천히 이동하십시오!”

선의를 믿지는 않았다.

선의 같은 걸 믿기에 그녀의 삶은 너무 치열했다.

그러나 그렇기에 사람이 선의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믿었다.

“거기 당신! 말에서 내리십시오! 이 사람들을 다 치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황제 폐하의 기수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전언을 가져왔다! 길을 비켜라!”

자세히 보니 그는 이 상황에 말을 타고 나온 미친 자가 아니라, 한쪽 팔이 뜯겨 나간 황실의 전령이었다.

코넬은 늑대인간 친위대를 앞세워 그를 성문 앞 병사들에게 데려갔고.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명이시다. 성문을 개방하라!”

그녀의 믿음에 보답받았다.

‘아.’

코넬은 우레 같은 함성을 들으며 생각했다.

‘악의만 계산하며 살아오신 분도 선의를 바라는 걸까요.’

발렌시아누스는 코넬을 배신하지 않았다.

* * *

같은 일이 북문과 남문에서도 일어났다.

“이제 살았어!”

“다들 나가자!”

“기사님들! 감사합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청은 기사단을 공중 방위가 아니라 동문에서 남문 쪽으로 이동하는 시민들을 돕는 데 보냈다.

상대적으로 북문과 더 가까운 배움의 거리 쪽 학생들과 시민들은 아예 북문 쪽으로 인도했다.

이때 진과 학생회원들은 도저히 생도라고 볼 수 없는 실력을 뽐내며 날뛰었다.

“거대 거미 잡았어!”

“비켜 봐!”

“너 그거 수명 깎는 기술 아니야?”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우리 아버지도 지금 시민들 대피시키고 있다는데, 내가 뺄 수는 없지!”

“검술 학부는 놀고 있냐! 대열 유지하자!”

그들 중에는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으나.

“회장! 눈이-”.

발렌시아누스가 선택한 학생회장은 그것마저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아까 뭐 들어갔어. 잘 안 보이는데, 많이 이상해졌어?”

“눈동자가 노란색으로 변했어.”

“젠장. 황족들하고 같은 색이잖아. 일단 나가자.”

진은 생도들을 내보내며 생각했다.

배움의 거리 어둠의 정점에 선 그지만, 그때만은 순수하게 감사했다.

‘대공 전하.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동부 성문 앞 대로로.

“가자!”

헬레나와 중부 기사들, 그리고 성 밖에 군막을 치고 있던 대영주들이 들어왔다.

‘어어?’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의 깃발을 보며 생각했다.

‘너희는 오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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