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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제일의 대귀족들이 황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제일 앞에 서 있는 건 백상아리 깃발을 든 기수를 거느린 카리오사였다.
“갑옷도 잘 어울리네. 그래. 분명 날 기다렸겠지?”
그녀는 상어 비늘을 닮은 철편 갑옷 아래에 가오리 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둘렀고, 두 자루 마법 검을 차고 있었다.
그녀가 육식동물처럼 웃자, 어둠 속에서 뾰족한 상어 이빨이 반짝였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과 얇은 입술은 당장이라도 광소를 터트릴 듯 떨리고 있었다.
“그게…….”
난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그녀 뒤로 모인 면면들을 바라보았다.
“친구, 내가 왔습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소드 마스터, 북부 대공 세베릭.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되요.”
창천 기사단을 이끌고 온 프로이하이트의 가주, 시그나인.
“……난 당신과 다르니까.”
황금기사단을 이끌고 온 그레모리우스의 가주, 그레이스.
“우리가 할 일이 있으면 좋겠군.”
암살자들과 공포새 기병들을 데려온 서남부의 맹주, 암살자들의 후작 체사르.
“비공정은 준비해두었습니다만 당장 그걸 타고 도망갈 생각은 없는 것 같네.”
기계 기사들을 거느리고, 본인도 기계 갑옷으로 무장한 마커스까지.
카리오사가 내 옆에 바싹 붙으며 내 어깨에 팔을 턱 하니 걸쳤다.
아주 자연스러운 몸놀림이었다.
“이물에, 침식자에 아주 가지가지 바글바글 몰려왔구만.”
“하하.”
“황실이 혼자서 진압하기에는 어려워 보이는데, 우리 대영주들이 봉신으로서 한 손 거들어 드릴까?”
“하하하.”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저들에게 충성맹세를 시키기 위해 협상을 이어 나갔다.
모두가 만족은 못 해도 인정은 할 수 있는 협상안이 완성된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저들에게 다시 손을 벌린다?
병사들의 피 값으로 뭘 더 내놓으라고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참에 아주 황실의 등골까지 빼먹으려고 하겠지.
금화 몇 닢이 아니라 황실이 가지고 있는 권리나 광산, 땅을 원할 거다.
그리고 완전 박살이 난 수도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돈을 생각해 보면, 여기서 저들에게 손을 벌렸다가는 진짜 식물 황실이 되어 대영주들에게 질질 끌려다닐 수도 있었다.
혹자는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런 걸 따질 생각만 하냐고 따지겠지만.
이런 걸 따지는 게 내 일이었다.
황실이 대영주들에게 질질 끌려다니게 되면, 전 제국적인 연계를 통해 침식자들을 철저히 색출하겠다는 제이릴리스의 계획은 첫 단추부터 일그러지는 거였다.
대도시 하나 짓는 데에는 한 5년 걸리지만, 이런 협정을 뒤집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리니, 막말로 시민만 다 나가면 도시에 운석을 떨군 다음 새로 짓는 게 손해가 덜할 수도 있었다.
“아니요. 카리오사. 괜찮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 성벽에 올라가 구경이나 하고 있으시지요.”
“그런 거치고는 너무 많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저기, 지금 또 정예병 하나 물렸다.”
“제 눈에는 안 보입니다.”
“봐봐. 너도 눈을 다쳤는데, 병사들은 오죽하겠어? 우리가 도와준다니까 그러네. 순순히 받아. 내 백린 기사단은 매일 매일 어인족이랑 싸우면서 단련된 애들이야. 저깟 침식자 놈들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다고.”
카리오사가 내 왼쪽에서 싱긋 웃었다.
세베릭이 내 오른쪽으로 다가와 또 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세베릭.”
“우리 북부는 부동항 이상은 원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내 왼쪽에서 카리오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부동항? 설마 나한테 빼앗아서 줄 건 아니지?”
흑철관을 쓴 그레이스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손가락질했다.
“사람이 이렇게 죽어 나가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아직도 손익만 따지고 있으십니까!”
진심 어린 분노가 그 목소리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힘없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뻔뻔하게 웃었다.
“나중에 금고가 텅텅 빈 다음에 그때 가서 후회할 수는 없잖아?”
“사람이 살아남아야 금고도 다시 차는 법입니다.”
“한번 금고가 비면 상어 떼가 와서 그 금고까지 물고 가버릴 텐데, 어떻게 다시 채워?”
카리오사가 키득, 하고 웃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황이 급하지. 일단 왔으니 내쫓을 수도 없고, 재난 상황에서 자기 방위를 위한 자구적 전투 행위까지 문제 삼을 수는 없어. 하지만 나는 그대 대영주들의 모든 참전과 전공을 부인할 거야. 공식적으로는…… 말이야.”
피를 흘렸으니 뭐라도 주기는 줘야 한다.
하지만 다 뜯어먹을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런 뜻으로 말했다.
카리오사가 포식자의 웃음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나와야지.”
다행히 알아들은 듯하다.
이상하리만큼 내게 주목한 듯했지만, 착각이겠지.
아마도.
* * *
“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주지 마라!”
카리오사가 동화 속 해적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나갔다.
마지막 달빛이 내리쬘 때마다 철편 갑옷의 미늘들이 물고기 떼처럼 빛나고, 허리를 단단히 동여맨 두꺼운 혁대에서 마나의 빛이 반짝였다.
달빛 아래서 더더욱 강해지는 마법이 걸린 혁대였다.
가장 흉폭한 백상아리를 따라 동부의 바다 사나이들이, 피에 굶주린 상어 떼가 철편 갑옷을 입고 내달렸다.
“크하하하!”
“썩 길을 비켜라! 괴물 새끼들아! 폭풍의 딸, 서머린의 후예, 동쪽 바다의 주인, 세 군도의 정복자, 해적과 어인족의 재앙이 뭍에 올라오셨도다!”
그들의 앞을 막아선 건 불을 뿜는 늑대 형태의 완전 변이형 침식자였다.
“아우우우!”
어깨높이는 4층 건물만큼 높았고, 몸길이는 30m에 달했는데, 전갈의 꼬리를 네 개나 가지고 있었으며, 벌어진 주둥이 사이로 용수철 같은 이중 턱이 엿보였다.
“던져!”
쐐애애액!
동부 사나이들이 미늘이 달린 투창을 던졌다.
예리함, 견고함, 관통 강화 등의 주문이 걸린 투창은 침식자의 사지를 꿰뚫었고, 동부 사나이들은 사방으로 달려 침식자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당겨라!”
쿵!
상어 떼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침식자 늑대는 빙판 위의 사슴처럼 넘어졌다.
“켕, 케에엥!?”
그렇게 쓰러진 침식자에게 동부의 기사가 달려 나갔다.
탁, 탁, 타악!
배에서 배로 건너뛰며 싸우던 기사의 각력은 어마어마했고, 그는 수십 kg 갑옷을 입고도 새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침식자의 머리에 올라섰다.
츠카아악!
동부 기사가 푸른 마나 블레이드가 일렁이는 장검을 휘둘러 놈의 머리를 잘라냈다.
“하나 잡았습니다!”
“잘했다!”
“여기도 잡았습니다.”
“나도다!”
카리오사는 그들의 선두에서 날뛰었다.
그녀는 사나운 마법 검 폭풍과 늘씬한 마법 검 순풍을 휘둘렀고.
“아-하하하하!”
그곳에 닿는 침식자들은 모두 사지가 떨어져 나가며 죽음을 맞았다.
“시이이익!”
집채만 한 거미가 독과 거미줄을 뿜으며 달려들었지만.
츠카아아악!
카리오사는 땅을 박차며 거미의 몸을 일도양단했고, 그 너머로 달려 나갔다.
“가자, 얘들아!”
“예! 전하!”
세베릭 하이시스 셉텐트리오스는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빙하 같은 뺨에 생생한 호승심이 떠올랐다.
“우리 북부의 기사들만 용맹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쿵!
그의 곁에 선 부관 르세나는 검은 머리를 정갈하게 묶으며 애원하듯 간언했다.
“무리하지 마시고, 너무 주목받지 마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르세나.”
쿵!
“적을 적어도 두 번에 걸쳐 쓰러트리십시오. 한 번에 잡으면 경계를 살 겁니다. 카리오사 후작, 아니. 공작보다 조금만 더 강해 보일 정도면 됩니다.”
쿵!
세베릭은 고개를 돌려 황궁을 향해 다가오는 있는 거인형 침식자를 바라보았다.
“우어어어!”
거인은 피부가 보라색이었고, 등에 여섯의 촉수가 나 있었으며, 목에 수십 명의 사람이 상반신까지 튀어나와 아우성치고 있었고, 키가 석조 건물 10층 높이에 육박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어째서이십니까?”
“나도 친구 앞에서 멋 좀 부리고 싶으니까요.”
세베릭이 북해 같은 남색 머리를 쓸어넘기며 걸어 나갔다.
“제가 맡겠습니다.”
밀리고 있던 황실의 흑철 기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기겁했다.
“세, 세베릭 대공 전하?”
“소드 마스터!”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는 북부의 은철로 만든 장검이 쥐여 있었다.
사아아아-.
장검은 서리처럼 날카로웠고, 공기에 닿을 때마다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 성에가 끼었다.
흑철 기사들과 백금 기사들은 주변 온도가 확연히 내려간 걸 느꼈다.
우우우웅!
세베릭의 검이 검푸른 빛으로 달아올랐다.
백금 기사가 입을 쩍 벌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오러 파이어.”
세베릭이 씩 웃으며 검을 베어 올렸다.
츠카아아악!
오러의 푸른 빛이 검의 궤적을 따라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검풍이 휘몰아쳐 일대에 눈보라를 일으켰다.
쿵!
황궁을 짓뭉갤 듯 다가오던 침식자는 가랑이부터 정수리까지 일도양단되어 쓰러졌다.
* * *
“정말 사람 같지도 않은 분들이군요. 저도 빨리 분발해야 할 텐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카리오사 공작이 서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 게 다행스러울 뿐이에요.”
시그나인과 그레이스, 두 소녀 대영주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목소리 톤과 다르게 그들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천 기사단과 황금기사단이 그들의 명령에 따라 남문과 서문 쪽으로 향하며 시민 대피와 대로 확보를 도왔다.
“큰 놈 하나 있다!”
“기사진 투입!”
“열기 내성이다. 빙결 특화 마법사를 데려와!”
그레이스는 예상외라는 눈빛으로 시그나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대피를 돕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어요.”
시그나인은 부채를 펴 입가를 가렸다.
피어오르는 웃음을 숨기려고.
“이것도 중요한 싸움이지요. 게다가 남의 신민들을 위해 우리 기사들이 피를 흘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거대 이물을 향해 돌진하는 것보다는, 대충대충 호위해주는 게 손실이 덜하겠죠.”
“정말 비뚤어지셨군요.”
“목숨에 가치를 매기는 게 우리 일이죠. 난 몰라도, 당신은 비교적 황실과 가까운 대영주예요. 언제 헬레나 대공이 기사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올지 모른다고요. 생색은 잔뜩 내면서 소모는 최대한 억제하는 법을 배우세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난 광산 도시의 영주에요. 당신과 달리 타고난 무가는 아니죠.”
“음.”
“그러니 내 전장은 이곳이 아니라 서류 위에요. 조약과 협정을 맺고, 신의 있는 동맹을 만들 거예요. 평화로운 세상에서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삶을 살겠어요. 발렌시아누스 대공도 제이릴리스 황제도 내 협조를 원하게 될 거예요.”
“그게 재앙의 씨앗이 될지, 부흥의 씨앗이 될지 기대해 보죠.”
그들은 대화를 끝내고 다시 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3번가는 청소 끝났습니다!”
“5번가에서 소탕전 진입!”
“남문에서 주민 소개 65% 끝났습니다.”
슬슬 희망의 불꽃이 보이고 있었다.
* * *
“이대로는 안 됩니다. 물론 아시겠지만요.”
치이이익, 치이익!
마커스는 기계 기사들, 마총 사수 대대에게 막 중앙대로 확보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의안과 멀쩡한 눈을 따로 굴렸고, 의안으로는 도시 중앙에서 버티고 있는 이물을, 멀쩡한 눈으로는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결국 저놈이 정신 파동 한 번만 더 지르면 이 짓을 다시 해야 합니다. 심지어 이번에는 성벽 밖에서 말입니다. 가서 쓰러트리기 전까지는 안 끝나는 싸움이라는 말입니다.”
“마커스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가야 합니다.”
마테오스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마커스의 말에 동의했다.
마커스와 발렌시아누스, 모두와 한 번씩 손을 잡았고 또 뒤통수를 후려쳐 본 교회의 성자로서, 둘을 동시에 보는 게 편할 수는 없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겠습니다.”
마테오스는 그가 여전히 황제가 사라진 마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발렌시아누스의 시선은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휘이이잉-.
습기를 머금은 밤바람이 불어왔다.
저 하늘에서 거대하고 새까만 덩어리가 둥실둥실 다가와 달빛과 별빛을 가렸다.
“대공. 지금.”
거대한 뇌운 속에서 노란 불꽃과 푸른 불꽃이 번뜩이며 내달렸다.
“저게-”.
우르릉!
“예.”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영주라 불렸던 마커스, 성자 마테오스, 소드 마스터 세베릭, 동부의 패자 카리오사가 모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세레라지에 누나가 내리치면, 그때 돌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