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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끼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른쪽에는 궁정 귀족 대의원이 서 있었고, 왼쪽에는 광명신교 홍의주교가 서 있었으며, 반대편에 서 있는 건 재무대신과 황족 재무관 하드리탄이었다.
그녀 역시 빈민가의 거물이고, 나름 파벌을 이룬 의원이었지만, 이 자리에 끼어있기는 너무나 어색했다.
물론 그녀는 형식상으로나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가지고 있던 발렌시아누스 대공과도 여러 차례 밀월관계를 이어 왔지만.
“그럼 피난민 대책에 관해 코넬 의원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지.”
“예, 예?”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아닌가?”
대낮에 그와 마주 볼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는 건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애와 야심으로 벼려진 두뇌는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더 재빠르게 회전했고.
코넬은 지금이 자신의 체급을 몇 배로 키울 기회라는 걸 알아차렸다.
영악한 눈빛을 긴장으로 굳은 눈매 아래 감추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럼 존귀하신 분들과 황형 전하께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수도 인구는 공식적으로 40만, 준공식적으로는 50만, 알음알음 알려진 수치로는 60만에 달합니다. 어젯밤에 침식된 사람이 약 2만 3천, 죽은 사람이 약 1만이나, 여전히 37만에서 57만에 달하는 인원이 남아 있습니다.
시급한 문제로는 첫째가 침식이고, 둘째가 식량입니다. 아직 날이 따듯해 추위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침식과 배고픔은 언제나 빈자들에게 더더욱 가까웠습니다. 그들 모두가 평원에 천막을 치고 기거한다면 그 천막촌은 너무나 광활할 것이고, 한번 침식이 번지기 시작하면 들불처럼 타올라 걷잡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따라서 소녀가 아뢰되, 제일 중요한 것은 치안입니다.”
“치안?”
흑철 기사단장 바르바토스와 치안총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줄 말이었다.
“예. 각하. 아주아주 엄격한 치안 관리가 필요합니다.”
코넬은 인간의 선의가 아니라, 선의를 바라는 마음을 믿었다.
그녀는 결코 머릿속에 꽃밭만 들어찬 소녀가 아니었다.
‘당장 8층 석조 주택에 살던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면, 그 석조 주택 바닥 넓이 8배의 부지가 필요해진다. 천막촌은 너무 넓어질 거고, 그 사이사이에서 감시의 눈을 벗어나는 자들이 생길 거야. 따듯한 집에서 살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는데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어. 그것들은 깡패가 되거나, 침식되거나, 아니면 둘이 다 되겠지.’
“소견으로는, 최소한의 호위와 마경 감시를 제외한 수도에 있는 모든 무력 단체가 천막촌의 치안 유지에 투입되어야 할 듯합니다. 백금, 흑철, 황동, 청은, 치안감, 근위대, 교도병단, 자경단, 귀족 가문 사병, 모험가와 용병까지 모두 말입니다.”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급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좋겠는가?”
코넬은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
어느새 그녀의 자세는 썩 당당해져 있었다.
“치안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배급의 방식은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경험에서 우러난 말에는 신뢰가 있었고.
발렌시아누스는 믿음을 힘으로 바꿔줄 능력이 있었다.
“재무관으로 하드리탄, 정화와 치유로는 이쪽의 홍의주교님을 붙여 주겠다. 3시간 동안 서류로 만들어 와. 그대로 시행하겠다.”
주변 의원 중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제 손녀와 비슷한 나이의 꼬맹이가 상황을 주도하는 건 예상외의 일이었다.
특히 평민 의원들이 그런 분위기가 강했다.
‘우리는 세습 의원들과 달리 인기로 먹고사는 자들입니다.’
‘저 꼬맹이가 수도 시민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오른다면, 우리는 저 꼬맹이의 파벌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막아야 하지만, 지금 상황이-’.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의 생각이 다 읽힌다는 듯 말했다.
“백금 기사를 한 명 붙여 주겠다. 합당한 이유 없이 반항하거나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모두 베어라.”
코넬이 고개를 숙였고, 몇몇 의원들이 이를 갈았다.
발렌시아누스는 청록색 빛 일렁이는 하늘을 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수도를 지켜야 한다. 이런 시국에 봉기가 일어나게 둘 수는 없지. 여론 관리에 주의하라. 관리 배급이나 치료 같은 구호는 교회와 폐하의 이름으로, 척살과 징발은 내 이름으로 하도록.”
50만도 넘는 신민들 사이로 침식이 번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 * *
제국에서는 검기를 만들 수 있는 소드 엑스퍼트만이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소드 엑스퍼트면 타국에서는 백작 후작은 물론이요, 공작도 될 수 있는 경지였다.
아무리 제국에 인재가 많다고 해도 함부로 굴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제국 기사들 역시 실제 작위와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일개 중부 기사령 출신의 기사단원 텐티아가 거물급 궁정 귀족이자 공작인 궁무 대신과 동석했고, 백금기사단 신입 기사 본넬은 아무리 황족 대우가 바닥에 떨어진 시대였다고 한들, 황제의 친오빠를 향해 검술 극의를 펼치려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황제 없는 제국을 이끄는 황형 발렌시아누스의 호위 기사, 텐티아에게 온갖 관심과 권력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텐티아 경! 수도 안에서 꼭 가져와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수도 복구 사업에 대해 긴히 말씀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한 번만 만나 주십사.”
“부친의 영지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 전하를 한 번만 알현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텐티아는 오늘도 백금 갑옷을 입고 천막촌 일선을 순찰했다.
원한다면 거지꼴이 된 사람들을 바라보며 호의호식하거나, 토목 길드, 자재 길드와 수도 재건을 논하며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었겠지만, 텐티아는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는 인종이 아니었다.
“카아아아악!! 카아아악!”
“반항해 봐야 의미 없다. 나와라.”
그녀의 강철 건틀릿이 침식자 한 명의 머리채를 질질 잡아끌었다.
그는 빼곡하게 늘어선 천막 틈 안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지만, 텐티아의 감각과 세레라지에가 개발한 마도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침식자가 마침내 햇볕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머리에는 사슴 같은 뿔과 버섯, 곰팡이가 가득 솟아있었다.
“세상에! 또, 또!”
“그럴 만도 하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외침을 들었는데.”
“눈 감으렴. 저거 보기만 해도 옮을 수 있다고 하네.”
“혹시 피에르 거기 있어?”
“여기서 배급 준다고 했던 놈 누구냐? 젠장. 사흘을 굶었는데.”
혼란 속에서 가족과 친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침식자의 위험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모여들었다.
텐티아는 투구 아래서 미간을 한 번 찌푸렸고,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다들 백 걸음 밖으로 물러서라!”
붉은 비단 끈이 달린 투구를 눌러쓰고 붉은 망토를 걸친 그녀는 백금 기사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성기사들과 싸워 발렌시아누스를 빼돌린 일로 적기사라는 미묘한 악명도 퍼져 있었다.
전前 수도 시민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망치듯 물러섰고, 텐티아는 보검 화한 대신 혁대에 매단 전투 망치를 들어 침식자의 머리를 깼다.
“실례합니다.”
“어어, 밀지 마요.”
“배고픈데 짜증 나게.”
“아, 빵 줄 거 아니면-”.
“실례하겠다니까!”
“누구……! 으아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소년 소녀들이 다가갔다.
천막촌 시민들은 언제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냐는 듯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눈을 피하며 슬슬 길을 텄다.
아카데미 검술학부, 마법학부 학생이라면 수도 제일의 깡패들이었고, 지금은 그 망나니 대공 발렌시아누스의 인가를 받아 그의 명령을 받는 준 치안 조직으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더러운 성질과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미친 망나니를 등에 업고 있는 자들은 건드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 반응을 본 학생들은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그들은 며칠째 자지도 못하고 기사들이 토벌한 침식자들의 시체를 처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텐티아 기사님. 어제는 조금 주무셨습니까?”
“그제 4시간 잤다. 우리 기사들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아앗. 전 3시간 잤습니다. 부럽군요.”
깔끔하게 넘긴 회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학생회장, 진은 텐티아에게 인사를 하는 동시에 침식자의 시체를 수습했다.
시체 몸뚱이, 피, 살점은 물론이요, 근처 흙까지 잘 모아서 외발 수레에 담고, 신학생들이 축성한 천으로 수레 위를 덮었다.
하던 일이 있다 보니, 아주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텐티아는 아카데미 학생들이 수레를 끌고 화장장이 설치된 수도 성벽 안으로 향하는 걸 보며 진에게 물었다.
“화장장은 잘 돌아가고 있나?”
진은 정중히 답했고.
“예. 기사님. 발렌시아누스 전하와 세레라지에 전하가 직접 불길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착 낮추며 덧붙였다.
“화기(火氣)를 이용해 침식을 정화하고, 그 힘을 흡수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십니다.”
텐티아는 고개를 무심히 끄덕였고, 진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너희도 적잖이 인원이 부족한 모양이군.”
진은 기본적으로 어깨가 넓고 기골이 장대한 무골이었지만, 지금 그의 뺨은 핼쑥하게 들어가 있었고, 눈 밑에는 검은 원반이 선명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 친지들에게 배급, 치료를 먼저 받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텐티아 역시 귀족의 수사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안에도 파벌이 여럿 있다고 들었다. 혹시 네 지휘에 반항하는 인원도 있나? 내가 다소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 같은데.”
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처음부터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 *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진의 지시에 불응하던 옆 아카데미 학생회장이 머리 숙여 용서를 구했다.
아카데미 연합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의 협조 요구를 죄다 거절하던 옆옆 아카데미 학생회장이 바닥에 머리를 찧으려 제발 연합에 받아달라고 빌었다.
신학생들이 만든 성수를 빼돌려 암시장에 밀매하던 신학교 부학생회장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
천막촌에서 막 만들어진 옛것 관련 마도서와 각종 부적을 빼돌리던 한 마법 학과 대표가 교회에 넘겨졌다.
마지막으로 이 시국에 깡패 짓이나 하던 패거리 하나가 두들겨 맞고 학생회 아래로 흡수된 순간.
텐티아는 아카데미 연합회의 영웅이 되었다.
“텐티아! 텐티아! 텐티아!”
“기사님 같은 기사가 되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만세!”
진, 서기, 부회장, 총무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머리를 숙였고, 학생회원들이 한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텐티아는 기사답게 주먹을 번쩍 들어 그 환호에 응해주었고.
“이제 이쪽이 마지막인가?”
동시에 착실하게 요청에 응했다.
“제일 포악한 학생 깡패 중 한 명입니다. 벌써 4년째 휴학 중인 장기 휴학생이죠.”
진은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에는 이참에 아카데미의 문젯거리들을 다 쓸어버리겠다는 각오가 어려 있었다.
“실력은 어느 정도지?”
“소드 엑스퍼트의 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본래 기사단 입단을 목표로 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저도 1대 1로는 자신이 없습니다.”
텐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하군.”
제국에서 소드 유저는 기사가 될 수 없었다.
기사 갑옷 자체가 마나 블레이드 없이는 씨알도 안 먹히는 강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소드 유저 최상급이라면 객관적으로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인재였다.
근위대나 치안감, 귀족 가문의 사병이나 호위, 고위 용병 등, 그들을 찾는 자리는 많았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인재라면, 끝끝내 기사가 되지 못한 충격에 좌절하고 비뚤어지는 일도 흔했다.
‘카탈린 언니도 그랬지.’
텐티아는 그리운 이름 하나를 기억 속에서 애써 지우고, 진을 따라 생도 깡패들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여기입니다.”
“화려하기도 하군.”
20여 개의 천막이 한쪽에 모여 있었다.
전문가는 전문가인지, 으슥하면서도 옆 수풀과 강가로 빠져나가기 편한 위치였다.
이미 시민들을 여러 번 약탈했는지, 빵을 쟁여 놓으려 하는지, 배급용 빵 자루가 주변에 여럿 놓여 있었다.
텐티아는 제일 큰 천막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무리 악명을 떨쳐 봐야 소드 유저였고, 그럼 절대 소드 엑스퍼트인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때 천막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자매 같아 보일 정도로 텐티아를 닮았지만, 조금 더 눈매가 고혹적이었고, 뼈대가 가늘었다.
약간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는 수도 제일의 장인이 관리한 듯 아름다웠으며, 피부 역시 맑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눈썹부터 턱까지 길게 가로지르는 거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텐티아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
여인은 텐티아가 아니라 진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 이건 반칙이지! 아무리 그래도 기사님을 데려오는 게 어디 있어?”
“시끄럽습니다! 이 상황에 적대 파벌을 담그고 약탈을 해대는 게 말이 됩니까?”
“난세가 곧 기회지! 못할 게 뭐 있어? 심지어 절반은 회장 의뢰였잖아?”
“기사님 앞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과 여인이 목소리를 높이며 싸워댔고.
텐티아는 가볍게 한 손을 들어 둘을 입 다물게 했다.
“카탈린 언니.”
“어, 어?”
그녀는 천천히 투구를 벗었고.
“나야. 텐티아.”
그 순간 카탈린은 텐티아의 관자놀이를 향해 있는 힘껏 돌려차기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