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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
허공에서 철퇴와 철퇴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충격파가 울려 천막이 흔들릴 정도였다.
“쳇.”
카탈린의 발뒤꿈치가 적기사의 팔꿈치에 틀어막혔다.
‘그래. 역시 진짜 기사구나.’
투구를 벗는 순간 시야가 가려지는 걸 노렸지만, 소드 엑스퍼트의 반사신경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카탈린은 기습이 실패한 걸 알아챈 순간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럼 못 이기지.’
기사와 정면에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건 더 강한 기사뿐이었고, 적기사는 성기사 수십 명과 맞붙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로서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이길 희망이 없었다.
카탈린은 진을 밀치고 천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비상용 가방 하나만 챙겨서 천막촌 인파 사이로 숨을 생각이었다.
황실에도 200명밖에 없는 고급 인력이 이런 곳에서 천년만년 배회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며칠만 숨어 있으면 잠잠해지겠지.’
그 순간 카탈린은 시야가 이상하게 왜곡되는 걸 느꼈다.
분명 천막 안으로 몸을 던졌는데, 안쪽의 가방이 가까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도 나고, 하늘까지 보였다.
‘아. 조졌다.’
쾅!
카탈린은 텐티아에게 목덜미를 잡혔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나 텐티아라고. 언니 후배!”
그녀가 충격으로 해롱거리고 있던 와중, 여기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텐티아? 어, 어?’
기사령 둘째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수도로 올라온 후배, 늘 혼자 있는 게 안쓰러워 귀족 사회에 섞이게 도와주었던 후배, 지하수도 슬라임 가지고 놀려먹던 후배, 기사가 되어보자 함께 검을 훈련했던 후배.
인생 가장 찬란하던 시절을 함께했던 목소리였다.
“지, 진짜로?”
카탈린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놀랐고, 반사적으로 ‘목이 잘리지는 않겠네.’ 하고 안도했으며, 반가움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 그녀는 멋진 선배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모습이었다.
텐티아가 투구를 벗었다.
얼굴은 아카데미 때보다 더욱 늠름해졌고, 눈빛은 더더욱 깊고 결연해졌다.
‘진짜 너로구나.’
이번에는 카탈린도 돌려차기를 날리지 않았다.
텐티아가 말로 된 돌려차기를 날렸다.
“그래서. 언니.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천막 옆 그늘에서 기사와 깡패와 학생회장이 사이좋게 얼굴을 맞댔다.
기사는 편안하게 웃고 있었고, 깡패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며, 학생회장은 편안해 보이는 웃음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카탈린은 머뭇거렸다.
“아…… 그게.”
그녀 역시 지금 그녀의 모습이 아끼던 후배 앞에서 보여주기에 부끄럽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답, 안 해?”
“송구합니다. 기, 기사님께 말씀드리기는 너무나 상스러운 내용입니다.”
카탈린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텐티아는 단순한 걸 미덕으로 아는 기사였고, 사악한 생도 깡패 조직의 두목이 아니라 제 ‘언니’와 재회한 기쁨에 흠뻑 빠져 있었기에.
“우리 사이에 어색하게 왜 기사님이야? 그냥 텐티아라고 불러.”
그녀를 여전히 기숙사 룸메이트 언니 대하듯 대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카탈린은 텐티아의 찬란한 백금 갑옷에 제 초라한 모습이 비치는 걸 보았다.
이제 텐티아는 막 상경해 수도의 거대함과 지하수로의 슬라임에 떨던 시골 소녀가 아니었다.
서임을 받은 이상 몰락 귀족 출신인 그녀보다 계급도 사실상 위였다.
“아. 부르라고!”
그러나 텐티아는 추억 앞에서 골치 아픈 걸 따지지 않았다.
“알았어. 텐티아.”
카탈린은 기사님의 자비에 감복했다.
“그리고 뭐? 기사님께 말하기는 송구? 그런 일은 하지를 말았어야지!”
그녀가 착각한 게 있다면, 텐티아의 자비는 상대가 자비를 받아 마땅한 모양새가 된 다음에 베풀어진다는 것이었다.
“왜 자꾸 진 피곤하게 만들어. 얘 중요한 일 하는 거 알잖아? 좀 시키는 대로 해. 얘 이제 단순한 학생회장도 아니야. 발렌 대공 전하께 인정받은 준 군사 조직의 리더라고. 안 그래도 심란한 시국인데. 오늘도 그래. 나 아니었으면 언니 죽었다고.”
카탈린은 말로 된 화살을 고슴도치가 될 때까지 맞고 몸을 떨었다.
“아니! 개같이 부려 먹었으면 좀 풀어 줘야지. 진 너도 너무하다. 아무리 내가 사고 좀 쳤다 해도 기사님을 불러와?”
“부려 먹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의 공작질을 바로 옆에서 보고 살았고, 그 시점에서 자기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챘다.
“진. 설명해라.”
학생회장의 웃음이 잔뜩 일그러졌다.
* * *
“이런 상황에 아카데미 애들이 더 사고 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학생회에서 계속 주시하고 있는데, 눈치 안 보는 애들이 있어요.”
“눈치를 안 본다면?”
“이상한 흑마법 부리다 침식되거나, 시민들 상대로 깡패짓하거나, 침식자들이 만든 부적이나 상징이나 마도서 같은 걸 빼돌리거나, 뭐 그런 거죠.”
텐티아의 목소리에 의문이 어렸다.
“그럼 죄다 잡아다 패거나 교회에 넘기면 되지 않나? 네 자리가 원래 그런 자리라고 알고 있는데?”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평소에는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그게 되려 보통 애들까지 자극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려요. 집도 가족도 다 박살 난 상황인데, 학생회가 학생들 도와주지는 않고 다 잡아 족치는 모습만 계속 보이는 거니까요.”
진은 당당했다.
“사람 마음이 칼로 자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점점 우리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기강 잡는 일은 외주를 줬어요. 압수하고, 때리고, 끌고 가고, 이런 걸 패거리들에게 시켰죠.”
정확히는 그때까지 당당했었다.
“외주? ……아.”
카탈린이 삐질삐질 손을 들었다.
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외주를 받은 애들이 자꾸 일탈하는 거예요. 압수한 침식 마도구 숨겨서 팔아치우고, 압수하라고 했더니 약탈하고. 그래서 서로 상잔시켰죠. 그때는 학생회에서 직접 나서기도 했고요. 문제는 너무 센 패거리가 하나 있는 거예요.”
다른 패거리를 붙여도 물리쳐 버리고, 그렇다고 학생회가 나서자니 피해가 너무 커질 듯하다.
큰 피해를 보았다가는 발렌시아누스가 맡긴 일을 하지 못하게 되고, 지금껏 학생회에서 억누르던 다른 패거리들도 날뛰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기사님을 부르게 된 거예요.”
진이 긴 설명을 마쳤다.
텐티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하고 당당하게 산다는 건 역시 참 힘든 일이었다.
“발렌 전하께서 널 아끼는 이유를 알겠군.”
쾅!
텐티아는 진의 머리를 한 데 쥐어박았다.
진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고, 카탈린은 양손을 들었다.
“텐티아, 잠깐만!”
“언니도 한 대만 맞읍시다.”
쾅!
진과 카탈린이 모두 바닥을 구르는 가운데, 텐티아는 천막을 활짝 열고 그 안에서 침식이나 흑마법의 기운이 담긴 마도구를 죄다 꺼내 으스러트렸다.
“언니. 진짜 화형당하고 싶어서 작정했지?”
“…….”
카탈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누님!”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카탈린의 패거리가 몰려왔지만.
“다들 무릎 꿇고 엎드려라!”
쾅!
아무리 악명 높은 깡패라도 기사 앞에서는 순한 양일 뿐이었다.
“진!”
“네, 넵!”
“대충 해결된 듯하군. 난 다시 침식자를 잡으러 가겠다. 앞으로 외주를 줄 때는 관리에 더 신경 쓰도록.”
“알겠습니다.”
“아. 언니는 애들 데리고 따라와. 아무리 언니라도 그냥은 못 넘어가. 소드 유저면 침식 저항도 꽤 높지?”
살금살금 도망치던 카탈린이 식은땀을 흘렸다.
* * *
텐티아는 세레라지에가 만든 마도구와 그녀의 감을 따라서 천막촌을 배회했다.
특중갑을 입은 텐티아와 가죽 갑옷 차림의 카탈린이 구도상의 대비를 이뤘다.
텐티아는 천막촌 구석 한 높은 천막 앞에서 멈춰 섰고, 카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언니 솜씨 좀 보게.”
“그래. 준비됐어.”
다음 순간 텐티아는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발렌시아누스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꺄아아악!”
일가족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 기사에게 습격당한 사람들이 가져 마땅한 당황감이 떠올라 있었다.
“기사님! 왜 이러십니까?”
“무슨 일이죠?”
그들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람 같았다.
“텐티아. 제대로 찾은 거 맞아?”
카탈린이 민망한 표정으로 한번 뽑았던 곡도를 넣으려 할 정도였다.
그러나 텐티아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보검 화한을 내리쳤다.
사악!
아버지였던 사내의 팔이 잘려 나갔다.
그 단면은 검은 곰팡이와 녹색 균사로 가득 차 있었다.
“이익! 들켰다, 쳐!”
어머니였던 것이 비명을 지르고, 일대 천막에서 침식 교단의 신자들이 몰려나왔다.
“그웨에에엑!”
“잡아! 잡아!”
“우리의 숲을 빼앗아 가려는 자들이다!”
적어도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텐티아는 면갑을 내리며 카탈린과 생도 깡패들을 돌아보았다.
“언니. 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
카탈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텐티아는 단숨에 어머니였던 것의 머리를 날렸다.
서걱!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난전이 시작되었다.
“왜 우리 사는 세상에 기어들어 와서 난리야!”
“기사님이 우리를 보고 계신다!”
“저 큰 놈 다리 관절 약해 보인다. 같이 치자!”
생도 깡패들이 철퇴와 전투 망치를 휘둘러 침식자들의 머리를 깼고.
“그웨에엑!”
“죽여라! 죽여!”
침식자들의 몸에서 검은 사슴뿔이 나뭇가지처럼 자라나 생도 깡패들의 몸을 꿰뚫었다.
“도망쳐!”
“X발!”
“일단 살고 보자!”
생도 깡패 중에는 카탈린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들도 여럿이었다.
“저것들이!”
카탈린은 곡도를 휘두르다 욕지거리를 토했다.
믿던 이들이 도망자 사이에 섞여 있는 모습은, 한때 기사를 꿈꿨던 그녀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텐티아는 투구 아래서 미간을 찌푸렸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그들의 등에 던졌다.
쐐애액!
기사가 던지는 단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탄에 필적하는 위력을 자랑했고, 그들은 가슴팍이 꿰뚫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몰려드는 침식자들과 자리를 지키고 이 악물고 싸우는 생도 깡패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강자 앞에서도 강한 자, 전사된 자들은 많지 않지. 전사되지 않은 자들이 전사인 척하며 신민들의 피땀을 빼앗으면, 그게 기사도에 반하는 불의고.”
그녀의 검에서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일렁였다.
“이제 골라질 만큼 골라진 모양이야.”
“테, 텐티아.”
카탈린은 텐티아가 백금 기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자각했다.
텐티아는 그녀가 못 오른 경지에 올라 그녀가 못 본 경치를 본 사람이었다.
“언니. 전장에서 등을 보이는 자들은 결코 기사도를 걸을 수 없어. 그리고 전장에서 등을 보이지 않았다면-.”
텐티아의 어깨 위에서 붉은색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막대한 기도에 침식자들이 주춤거렸다.
“아무리 오탁에 빠져 있다 한들, 참회하고 다시 시작할 기회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츠카아악!
텐티아가 종횡무진 검을 휘둘렀고, 수십 명의 침식자가 바닥을 굴렀다.
핏빛 마나 블레이드는 침식자들의 나뭇가지 같은 뿔과 균사 갑각을 가볍게 갈라버렸다.
“저게 진짜 기사구나.”
“세상에.”
“텐티아.”
카탈린은 입을 쩍 벌렸다.
그녀가 한때 꿈꿨던 광경이 가장 아꼈던 동생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침식자 64명이 죄다 시체가 되기까지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쪽이다!”
“수레랑 천 다 가져와!”
“신학생도 데려오고!”
학생회원들이 수레와 천을 가지고 달려왔고, 생도 깡패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침식자 시체 수습을 도왔다.
카탈린은 여전히 충격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텐티아의 검격이, 그 마나 블레이드가 눈앞에 선했다.
텐티아는 면갑을 올려 얼굴을 보였고, 그들이 아카데미에서 놀았을 때처럼 웃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지?”
“…….”
“300년 전 동부의 검백 아이런은 나이 43세에 소드 엑스퍼트에 올랐고, 나이 80세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지. 전전대 흑철 기사 부단장도 서른 넘어서 소드 엑스퍼트가 되었고.”
“난 이미-”.
텐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기사는 살인자야. 기사가 영웅이 되느냐 깡패가 되느냐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어. 그림자를 짊어지고 빛을 향해 나아가. 재능은 누리고, 보속도 해야지. 나도, 언니도.”
카탈린은 절로 몸을 떨며 텐티아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기사가 되고 싶으면 기사를 닮아. 기사답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기사답게 싸우려고 노력하고, 기사답게 행동하도록 노력해.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되어 있을 테니까.”
텐티아가 성벽 쪽으로 사라졌다.
카탈린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 * *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나? 표정이 묘하군,”
텐티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발렌시아누스의 물음에 답했다.
“예. 전하. 아카데미에서 친했던 언니를 만났습니다.”
“반가웠겠군. 잘살고 있었나?”
“앞으로는 그럴 겁니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발렌시아누스가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물불 안 가리는 칼잡이들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경이 알 만한 사람은 없겠군. 혹시 알게 되면 소개해 주게나.”
텐티아는 눈앞이 노랗게 물드는 걸 느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갱생 직전의 언니를 저 망나니가 타락시키는 걸 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