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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누스는 남쪽 성문 위에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비어버린 도시와 광대한 천막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느 쪽을 볼 때든 그의 눈빛에 깊은 애상함이 묻어났지만, 그가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텐티아는 테이블 위에 올라온 서류들을 보며 물었다.
“또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발렌시아누스가 옆에 앉은 코넬에게 턱짓했다.
고아 장애인 소녀 의원에게 일과 책임을 떠맡기는 건지, 빼어난 활약으로 입지를 올릴 기회를 주는 건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코넬은 서류를 탁탁 정리한 뒤, 텐티아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아남았어요.”
사람을 아끼는 코넬이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침울해져 있었다.
“이물과 싸운 밤에 곡식 창고 세 개가 약탈당하고 불타서 배급량이 애매해요. 일단 가을 추수 때까지는 버텨야 치안이 유지될 텐데.”
텐티아는 고개를 슬쩍 갸웃했다.
“치안은 지금도 충분하지 않나? 우리 기사들이 와이번을 타고 저공비행까지 하고 있는데.”
코넬은 잠시 뭐하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민가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매일같이 항쟁이 벌어질 때도 수도 시민들은 몰랐잖아요. 아니. 정확히는 수도 시민들에게 큰 피해가 가지는 않았잖아요.”
“그랬지.”
“그런 거예요. 배급을 줄인다고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겠죠. 황실도 기사들도 독이 잔뜩 올라 있으니까요.”
“음.”
“대신 자기들끼리 패거리를 만들어서 약탈하고 싸우겠죠. 지면 굶어야 하니까 힘을 원하게 되고, 그럼 침식 교단이 미친 듯 번지는 거예요. 이미 패거리 중에는 배급 빵을 잔뜩 약탈해서 쟁여다가 어떻게든 한 번 더 구워서 비스킷으로 만드는 애들도 있어요. 있을 때 모아놔야 한다는 거죠.”
텐티아는 몇 시간 전 만나고 왔던 언니를 떠올렸다.
그녀의 천막 근처에도 역시 당장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배급 빵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에도 삼시세끼 고기를 써는 기사였고, 카탈린 한 명을 설득해 깡패짓에서 빼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의 본업은 선을 긋고 잘라내는 일이었으니, 수백 수천의 패거리들을 모두 그렇게 감싸 안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텐티아조차도 본래 카탈린을 두들겨 패고 진 앞에 무릎 꿇리려 찾아간 거였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겠군.”
적어도 폭도로 돌변한 전 시민들이 침식에 시달리며 서로를 물어뜯고, 그녀 같은 기사들이 그들을 죄다 베어 넘겨 대지가 피로 물드는 상황은 벌어지면 안 되었다.
텐티아는 무의식적으로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전하?”
발렌시아누스는 초연한 표정이었지만, 한쪽 다리를 미친 듯 떨고 있었다.
“텐티아 경. 이렇게 된 이상 죄다 다른 영지로 내쫓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정신 차리십시오! 전하!”
“일단 가을까지는 버텨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어. 비축된 곡식이 있냐 없냐 이전에, 어떤 미친 상단이 이 꼴이 난 수도에 찾아오려고 하겠어?”
그때 빛바랜 백발을 짧은 꽁지머리로 정리한 푸른 눈의 황족이 중지로 검은 태 안경을 추켜세우며 다가왔다.
“발렌시아누스.”
“……하드리탄.”
* * *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가 졸도할 듯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하는 걸 보았다.
하드리탄은 재무관이었고, 그 방면으로는 문외한인 텐티아로서도 지금 수도 경제가 완전히 박살 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무관 하드리탄이 들고 오는 소식은 모두 악재였고, 당연히 발렌시아누스 역시 그를 볼 때마다 또 무슨 환장할 일이 일어났는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중부 대상단들이 곡식을 보내올 거다. 비축분과 묵은 곡식, 늦게 수확한 보리 같은 걸 죄다 가져오기로 했다. 늦어도 다다음 주면 도착하겠지. 약탈과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병사를 준비해 주기 바란다.”
외다리 소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발렌시아누스가 노란 눈을 부릅떴다.
“그게 사실인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지?”
1km 이물을 불태워 버린 마법사에게도 마법 같은 일이었다.
하드리탄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우리 황실이 중부 곡식 70%를 계약했다는 걸 기억할 거다. 운송 역시 각 대상단에 나눠서 맡겼지. 이미 가진 곡식을 가져오나 햇곡식을 가져오나 그게 그거니, 지금 당장 가져오라 요구했고, 그들은 받아드렸다.”
“이 꼴이 난 수도에 오려 하는가?”
“그들로서는 당장 비축분과 묵은 곡식을 처리할 기회다. 안 팔리면 사료로나 써야 하는 걸 햇곡식값에 팔 수 있다는데 오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텐티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하드리탄 전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그러도록. 경.”
“지금 대금 지불이 가능합니까?”
수도 중앙부가 완전히 박살 난 상황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듣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징발이 어쩌고 중얼거렸고, 하드리탄은 씩 웃었다.
“곧 적기제독이 올려보낸 금화가 도착할 거다. 그걸로 어음을 만들어서 지불하면 그만이야.”
“어음 말고 금화를 달라 하거나, 이미 가지고 있던 어음을 금화로 바꿔 달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하드리탄이 낄낄 웃었다.
“알게 뭔가? 발렌 대공과 경들이 있는데.”
안경알 너머 그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우린 제국이다. 경제는 빚으로 굴리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못 살려. 일단 굶어 죽는 건 막아야 그 노동력으로 다시 수도를 복구할 수 있다.”
텐티아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리만큼 편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주 정의롭기만 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나, 재무관마저도 사람을 위해서 머리를 쓰고 있는 게 기꺼웠다.
“발렌 전하. 다시 순찰하고 오겠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경. 조금 쉬는 게 어떤가?”
텐티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부터 쉬십시오.”
“그럴 순 없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산더미인데.”
“예. 전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망이 깃들어 있었고, 발렌시아누스는 피식 웃으며 가도 좋다고 손짓했다.
텐티아는 투구를 눌러 쓰며 생각했다.
여전히 막막한 상황이지만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이 모든 재앙도 끝날 거라고.
* * *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나는 내 이름이 적힌 도장을 보며 허리를 폈다.
며칠간 너무 많이 찍어서인지 점점 도장에 파인 부분이 깨지고 있었다.
“아이고.”
어찌 된 게 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하나를 해결하면 그것 때문에 또 다른 일이 생기니, 일이 새끼를 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의원. 무슨 일로 찾아왔나? 뭐든지 편하게 말해 보게.”
“감사합니다. 전하.”
그는 멋들어진 제복을 입고 권위 어린 금배지를 단 궁정 귀족 출신 대의원이었다.
대표적인 친 황실 파 의원이었고, 오랫동안 코넬과 치고받아 온 노인이었으며, 교회가 법을 개정하려던 당시 내 밀명에 따라 만장일치를 이끌어준 파벌장이었다.
그는 루디가 끓여 온 차를 품위 있게 홀짝였고, 예절에 맞춰 감상을 토로한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곧 곡식이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네. 우리 재무관들이 힘써 주었지.”
“덕분에 수도 여론은 한결 안정된 듯하니, 감히 한 가지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무섭게 뭘 그리 무게를 잡나? 내가 그대에게 진 빚이 한둘이 아닌데, 편하게 이야기하게. 편하게.”
그가 여전히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수도에 큰 재앙이 닥쳐왔으나, 저희 귀족들은 상대적으로 큰 손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이종족 혼혈이었고, 마법이나 검술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병들을 이끌고 침식자 무리와 싸우느라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친지들이 많습니다.”
“음.”
“물론 귀족의 의무를 다한 것이고, 곧바로 교회의 치료와 정화 기도를 받았으니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난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자기들이 충분히 의무를 다했음을 상기시킨다는 건, 뭔가 어마어마한 걸 요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직 수도에 마경이 열려 있고, 일시적으로 저택에서도 퇴거한 지금, 아이들을 계속 천막촌에 두기는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않은 게 사실입니다.”
난 이때 이 노인이 무엇을 요구할지 알아챘다.
“교외 별장으로 가족들을 보내는 걸 허락해 주소서.”
지금 난 중부 기사들과 그들이 데려온 사병단을 통해 아무도 천막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시 중이었다.
침식의 기운에 물들었을지 모를 사람들이 전 제국으로 번지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귀족들은 이종족 혼혈인 만큼 훨씬 강인하고, 교회의 정화를 제대로 받은 만큼 침식의 위험도 적었다.
하지만 모든 수도 신민들이 불안과 공포에 떠는 이 상황에서 그들이 수도를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여론은 미친 듯 격화될 거다.
대공방을 이끌던 부르주아가 천막에서 풀죽을 먹는 상황이었다.
수도 50만 신민이 ‘도망친’ 귀족들을 적대할 거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 황실을 원망할 거다.
그러니까 안 된다.
……내가 두 번 죽어도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일단 그들은 엄연히 권리를 가진 귀족이었고, 진작 떠나가지 않은 것도 내 상황을 제법 신경 써 준 것이었다.
식량난이 해결되고 민심이 어느 정도 진정되기를 기다려준 것도 고마운데, 여기서 그들을 더 홀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제국 상류층은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기사들도 대부분 궁정 귀족 가문 소속이었다.
당장 바르바토스 경의 남동생은 행정관이고, 여동생은 고등재판소의 법복귀족이며, 아버지는 대의원, 어머니는 전전대 황동기사단 부단장이자 현 의원이었다.
즉, 이 노인이 내게 와서 이런 부탁을 한다는 건, 기사들도 슬슬 제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매일 같이하는 일이 침식자 수백 명을 갈아버리는 거였다.
침식자가 제 가족들을 공격하거나, 보복성으로 침식을 옮겨서 정화 당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충성할 맛 안 날 거다.
그리고 주군이 기사에게 해야 하는 일 중에 제일 중요한 게 충성할 맛을 나게 해 주는 거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하루만 기다리게.”
* * *
나는 수도 하늘에 열린 마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마경은 사라질 줄도 열릴 줄도 몰랐다.
상아탑 마법사들과 황궁 마도 공방 마법사들이 그 아래서 빼곡하게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세레라지에 누나는 좀 자면서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엊그제는 나 도와주느라 사람들 앞에 섰고, 헹가래까지 받느라 피곤해 죽으려 하던데.
그러고 보니 나도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잤는지 모르겠다.
낮에는 서류를 처리하고 밤에는 텐티아 경이랑 같이 순찰을 뛰고 있다.
어제였나 그제였나 텐티아 경의 선배라던 깡패 출신 학생회원과 만났는데, 둘이 참 친해 보여서 좋았다.
여름의 막바지였고, 날은 무척 더웠다.
평소였으면 얼음 꿀물을 마시든 했겠지만, 지금은 반쯤 전시였다.
서류에 떨어진 땀을 닦자니,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발렌시아누스. 왜 이렇게 수척해졌습니까?”
훤칠한 장신에 파도 같은 남색 머리, 눈보라 같은 회색 눈.
“아, 세베릭.”
북부 대공 세베릭이었다.
나는 풀어놓았던 제복 단추를 여미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못 보일 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베릭이 손을 내저으며 선선한 바람을 일으켜 주었다.
“괜찮습니다. 대공. 저 역시 요새에 고립되었을 때는 부하들이랑 어깨 맞대고 오들오들 떨며 비스킷을 씹었습니다.”
“하하하.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 괜찮습니까? 아래서 들어 보니 대공 이름이 사람들 입에 참 많이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귀족들이 가족을 이탈시키는 걸 내가 몰래 허락해 주고, 그걸 안 세레라지에에게 걸려서 두들겨 맞는 연극이었다.
귀족들의 요구와 황실에 대한 지지를 동시에 지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뭐가 된 겁니까?”
“찢어지지는 않았고, 터지지도 않았지요. 일단 하루하루 버티는 게 우선입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세베릭은 안타깝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르세나의 손가방에서 커다란 주석 잔을 꺼내 들었다.
짙은 꿀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미적지근하던 꿀물에 살얼음이 끼었다.
“마시십시오. 대공.”
“고맙습니다. 세베릭.”
“이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합니다.”
나는 씩 웃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세베릭이 아니었다면 그날 밤부터 문제였을 겁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올해도 약속한 곡식은 반드시 보내 주겠습니다.”
“!”
그의 회색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강인한 어깨가 축 처졌고, 그의 옆에 선 르세나 역시 자신이 못 할 짓을 한 듯 울상을 지었다.
안 봐도 뻔하다.
세베릭이 이 사달이 난 황실에게 어찌 곡식을 요구하겠냐며 몸을 빼고, 르세나가 그럼 우리 병사들을 굶길 거냐며 끌고 왔겠지.
난 자신만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친구. 나 발렌시아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