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24)화 (224/340)

(224)

높은 비명이 사제들 한가운데서 울렸다.

자주색 옷을 입은 노인이 융단 깐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이름은 아르고스.

수억 신도를 거느린 광명교의 교황이었다.

“어디 계십니까?”

성자 마테오스는 10분도 흐르지 않아 도착했다.

어찌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그가 지나온 길에서 흙먼지가 길게 이어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의 손에서 하얀빛이 피어오르고, 잠시 후 아르고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성자님?”

아르고스는 눈을 두 번 깜빡였고, 자신이 천막 바닥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테오스는 그가 바닥에 앉는 걸 도와주며 말했다.

“잠깐 쓰러지셨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쉬셔야 합니다. 이번 주만 다섯 번째 아니십니까? 이제 예전 같은 나이가 아니십니다.”

아르고스는 비틀거리면서도 고개를 저었고, 떨어진 안경을 찾아 매부리코에 얹었다.

“성자님. 교회의 가르침이 절실한 나날입니다.”

“제발.”

교황 아르고스는 교회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 앞에 떳떳하지 못한 짓까지 저지르며 살았다.

발렌시아누스와 손을 잡고 동료 홍의주교 바오로안을 순례길로 날려 버린 게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위해 권력을 탐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지금 저희가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저들은 옛것의 손을 잡게 될 겁니다.”

“…….”

마테오스는 눈을 질끈 감고 아르고스를 일으켰고, 그에게 추가로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그 직후 성자 마테오스의 몸이 휘청였다.

“어이쿠!”

“괜찮습니다.”

모여 있던 사제와 성기사들이 기겁했지만, 마테오스는 끝끝내 자기 발로 중심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아르고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차 한 잔을 내오게 했고, 마테오스는 이걸 마시지 않고 바로 돌아간다면 돌아가는 길에 쓰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성자님. 마경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안정되어 있습니다. 세레라지에 대공과 상아탑이 마경의 기운을 굴절시켜 한데 모으는 마법을 개발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루에 한 번씩만 가서 정화해주면 되니, 내일부터는 많은 인력이 빠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처럼 마경 아래에서 사제 수십 명이 성가를 부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아닐 겁니다.”

둘은 그 시간 동안 상황을 공유했다.

“오오. 다행입니다. 그럼 수도 건물과 곤충, 소동물들의 침식을 정화하는 데 투입될 사제들이 생기겠군요.”

아르고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마테오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해결했습니다. 잔여 인력은 바로 천막촌으로 돌려도 될 것 같습니다.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이 성수를 쟁여 놓고 있더군요. 듣자 하니 암시장 압수품 어쩌고 하던데, 더 들어 봐야 화만 날 것 같아서 그냥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아, 천막촌 남쪽 구역에 배급 문제가 생긴 건 아카데미 쪽에서 해결해주었습니다.”

“다행이군요. 배급 공백이 의료 공백으로, 의료 공백이 침식 정화 공백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그쪽에서 보낸 부상자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화장장도 슬슬 안정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신학생들이 너무나 고생해 주었습니다. 세레라지에 대공도 의외로 협조적이었고요.”

“몇만이나 태웠는지 모르겠군요. 5만은 확실히 넘은 듯합니다.”

교회는 황실부터 빈민까지 빈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친밀했고, 옛것 퇴치와 부상자 치유, 식량 배분을 모두 할 수 있는 유능한 조직이었다.

사람들을 미사에 불러 놓고 성가를 부르면 수 가지 효과를 동시에 가질 수 있었다.

해당 구역의 인원을 파악하는 행정.

신성력을 쬐게 해 각종 오염을 정화하고, 침식의 기운을 몰아내며, 부상을 빠르게 회복시키는 구호.

집단 공포를 환기하고 시민들이 갖는 불안을 달래 주는 정신적 보살핌까지.

돌아가는 길에 빵 한 덩이씩 쥐여주면 그게 곧 통제된 배급이었으며, 갑자기 안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침식자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시민들의 불안을 달래 주는 게 특히 중요했다.

그게 아르고스와 마테오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연단에 서서 이빨이 닮아서 없어지도록 발렌시아누스를 욕하고, 그날 저녁 발렌시아누스와 마주 앉아 신민들의 불만 요소를 전달하는 이유였다.

‘식량 배급이 원활해진 뒤로 대공과 그 일파만 호의호식한다는 불만은 거의 잦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슬슬 감기 환자가 여럿 나오고 있는지라, 성직자들을 대공이 빼돌리고 있다는 불만이 나올 듯합니다. 일단 그쪽으로 몰아붙였습니다만…….’

‘결국 교회의 신뢰성을 함께 깎아 먹는 일이니 오래는 못 쓰겠군요. 오늘 상아탑 생조학파 원로에게 배움의 거리와 마법 거리 마법약 상점주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일주일 내로 교회 쪽으로 물량을 넘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테오스는 사태 이후부터, 발렌시아누스라는 인간이 선악을 떠나 지금 제국에 절실히 필요한 인재임을 감히 인정했다.

그는 마치 자신을 톱니바퀴처럼 대했다.

그가 먼저 돌아가면 다들 따라서 와줄 걸 아는 듯했다.

그는 악역을 자처했다.

교회가 눈앞의 인기를 위해 그를 절벽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리라 믿고, 목을 내주었다.

그와 교회가 입을 맞춰야 한다는 걸, 교회 역시 알아주리라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경전은 광명신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했다.

‘대공. 제가 신성력이라도 써 드리겠습니다.’

마테오스는 그가 기꺼이 받아드릴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망나니 황형은 잠시 고민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 더 급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대공?’

‘사실 용찬으로도 모자라 정령화까지 진행 중인지라, 신성력과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침식자로 몰리기는 싫으니, 오늘은 거절하겠습니다.’

마테오스는 감이 좋았고, 그의 감각은 첫 번째 말이 진심임을, 두 번째 말이 핑계임을 알렸다.

망나니가 제대로 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테오스는 발렌시아누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섰던 순간의 막막함을 떠올리며, 서늘한 청록빛을 뿜는 마경을 바라보았다.

“박살 내버리고 싶습니다.”

이유 모를 답답함에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 * *

슬슬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추수가 끝났고, 황실은 중부의 곡식을 죄다 어음으로 사들여 천막촌 시민들에게 뿌렸다.

제이릴리스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네 기사단과 중부 기사들, 아카데미 학생회원들이 침식자를 때려잡았고.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네놈들을 추방하노라!”

내 이름으로 움직이는 마커스의 기계 기사들과 텐티아 경의 ‘언니’라던 여인이 이끄는 아카데미 깡패들이 불순한 움직임을 통제했다.

“열 명 이상 모이지 마라!”

“집회, 출판, 재판받을 권리는 정지되었다!”

기본적으로 욕먹을 만한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게 통치의 기본이었고, 그 ‘남’이 여기서는 나였다.

마커스는 제이릴리스의 충성스러운 봉신이 아니라 간악한 발렌시아누스 밑에 붙은 행동대장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가 수도 시민들에게 인망을 잃어야 자생과 세력 구축이 불가능할 테고, 그럼 내게 더 의존하게 될 테니, 나로서는 바라는 바였다.

“수도 시민들이 끼리끼리 논다고 말하더군요.”

“아닌가?”

“맞지요. 하지만 제 기사들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어쨌건 그들은 명예로운 기사였으니까요.”

나는 내심 혀를 찼다.

모시던 주군이 하루아침에 영지를 빼앗기다시피 한 상황이다.

아마 마커스의 기술을 원하는 다른 대영주들에게 전향 요구도 많이 들어왔겠지.

카리오사라던가, 카리오사라던가, 카리오사라던가.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마커스 아래 남아 있는 기사들은 무척 충성스럽겠지만, 그만큼 독할 게 분명했다.

“잘 다독일 수 있지?”

“당연합니다.”

“수도 복구하는 중에 공방을 큼지막하게 지어 줄게.”

내게 기대 오는 짐승에게는, 빵을 잘 먹여 주어야 했다.

마커스가 기다렸다는 듯, 다 안다는 듯 웃었다.

“그래. 역시 말이 통하네.”

“…….”

일단 식량난은 해결되었고, 치안도 음지로 양지로 안정되고 있다.

적가면을 시켜 밀수 연초를 풀어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고, 황실이 산 곡식을 교회에 통으로 기부해 교회 구호 물량을 확보했다.

이제 큰 문제는 치안과 민생이 아니라 충성맹세였다.

“발렌 대공.”

“저희도 계속 수도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집이 그립습니다. 전 신혼이라고요.”

대영주들은 자기 영지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며칠간 더 버텨 주십시오.”

본래 충성맹세는 협상과 기 싸움으로 시간 끌어도 여름 안에 끝날 일정이었다.

지금은 늦가을이었다.

왕들이 자기 왕국을 몇 달이나 비운 상황이었다.

특히 세베릭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강력한 전력이었고, 나보다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세베릭. 이번 주 안에 부동항을 받아와 드리겠습니다. 일주일, 아니. 사흘만 더 머물러 주십시오.”

“발렌. 그냥 충성맹세는 문서로 남기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얼음 골렘들이 최전선에 등장했을 겁니다.”

“돌아가는 길에 내한 마도구를 착용한 와이번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그대가 제이릴리스 앞에 머리 숙이는 그림이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최대한 버텨 보겠습니다. 발렌.”

세베릭이 안절부절못하고.

“발렌 대공. 내 병사들이라도 돌려보내겠네. 국경지대에 빌어먹을 유목민족 놈들이 나타났어.”

체사르가 그림자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죽는 소리를 해댔으며.

“슬슬 어인족들 나올 때라서, 나도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카리오사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게 시그나인이었다.

연갈색 머리에 하늘색 눈을 가진, 코넬처럼 영악하고 총명하지만, 코넬과 달리 불꽃 같은 야심만을 가진 서부의 대영주.

“카리오사 공작님이 돌아가면 곤란하지 않으세요? 그분이 거느린 병력도 알게 모르게 치안 유지에 협조 중이었는데, 그만큼 공백이 발생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네 병사들을 쓰고, 그 값 달라는 말이겠지?”

“맞아요. 전 기반을 그럭저럭 잘 다져 놔서 여기 조금 더 있어도 되거든요. 역시 전하는 생각이 깊으셔서 좋네요. 자. 제 병사들 몸값으로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난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받은 땅과 제이릴리스가 총독을 보낼 총독령을 떠올렸다.

그곳을 다 합쳐도 인스트로멘툼의 3분의 2를 넘지 않았다.

“루디. 지도 좀.”

루디가 구 인스트로멘툼 영지 지도를 가져와 펼쳤고, 나는 남쪽 일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너. 옆 동네 후작이랑 전쟁할 생각이었지.”

“하하. 들켰네요.”

“들키기는 무슨. 알아 달라는 듯 정보를 흘렸으면서.”

“그 가문이 지금 상속 분쟁 때문에 찢어지고 있거든요. 이미 저희 쪽으로 넘어온 봉신들도 많아요. 제가 여기 와서 끌어들인 애들도 있다니까요.”

“그럼 피는 거의 안 보겠네. 좋아. 음…… 네가 걔네 다 먹고 올라와서 여기까지 먹으면, 너도 공작 작위를 받을 만한 대영주가 되거든.”

시그나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마 그녀가 원하던 건 그 후작의 봉신들을 자기가 날름하는 걸 황실이 용인해주는 정도였겠지.

나는 도발하듯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거 다 관리할 수 있지? 혹시 내전이라도 터져 수렁에 빠지면 프로이하이트도 갈기갈기 찢어지는 거다? 네가 서부의 카리오사가 되어서 중심 단단히 잡아줘야 해.”

시그나인은 정확히 3초 고민한 끝에 답했다.

“전하.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악하지만, 밉지는 않은 웃음이었다.

“그래. 잘해라.”

“아, 혹시 대영주로서 지금 시국을 안정시키는 데 한마디 해도 될까요?”

“조언이라면 기꺼이 받지.”

시그나인이 단조롭게 내뱉었다.

“즉위하세요.”

“……!”

“찬탈하시라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수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한 구심점이 필요해요. 지금 충성맹세하고 천막촌 유지하고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잖아요. 대영주들 다 보낸 다음에 수도 안정시켜요. 그리고 폐하 돌아오면 바로 양위하면 되잖아요.”

그녀 역시 내가 보인 충성심에 대해 알고 있는지라, 어조도 단어 선택도 아주 부드러웠다.

난 그 마음에 답하고자 겉으로나마 씩 웃으며 답했다.

“나가.”

“네.”

* * *

한 손에는 서류 한 장, 반대 손에는 포도주 한 병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물론 이 상황에 술판이나 벌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빈손으로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리오사 공작. 안에 있나?”

그녀가 미리 이야기해 두었는지, 동부 기사들은 아무도 날 막아서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 기다렸다.”

카리오사는 사태 이후에 수도 성벽 동쪽에 숙영지를 만들어놓고 주둔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큰 나무통에 찬 소금물을 받아 놓고 놀더니, 지금은 천막 안에서 뜨거운 소금물을 받아 놓고 놀고 있었다.

물에 젖어 투명해진 셔츠 아래 비늘무늬 반짝이는 하얀 피부가 비쳐 보였다.

난 어두침침한 천막 안으로 들어서 테이블 위에 포도주를 올려놓고 물었다.

“회군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아무~ 문제도 없지. 다들 마음 정리 잘한 모양이더라고.”

그녀는 본래 같은 황실의 직신이었던 백작, 후작들을 죄다 잡아 가뒀고, 자신에게 충성맹세를 시켰으며, 동부의 패자에서 절대자로 떠올랐다.

난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카리오사의 회색 세로 동공이 기대감으로 커졌다.

그녀가 제 부리로 털을 뽑고 솥에 뛰어든 닭을 보는 듯 군침을 다시더니, 하얀 팔을 뻗어서 내 소매를 붙잡았다.

“부탁을 듣기에는 너무 멀다. 그렇지?”

카리오사가 날 나무통 안으로 끌어당겼다.

“잠깐-”.

“쉿!”

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튀고, 하얀 제복과 붉은 띠가 뜨거운 소금물에 젖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내 무릎 위로 올라선 다음 양팔을 뻗었고, 난 나무통과 그녀 사이에 꼼짝없이 갇혔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상어처럼 뾰족한 이빨이 번들거렸다.

“그거, 딴 남자 부탁이지? 부동항?”

촉촉하게 젖은 물색 머리가 내 뺨에 스쳤다.

“딴 여자 부탁이 아니라서 봐주는 거야.”

카리오사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혀를 차더니,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는 듯 내 목을 만지작거렸다.

회색 눈이 아릿하게 빛났고.

“결국 넌 날 찾아왔으니까.”

하얀 이빨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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