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25)화 (225/340)

(225)

중간중간 시녀와 시종들이 들어와 뜨거운 물을 갈아 주었다.

물론 발렌시아누스도 카리오사도 자신들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나신 또는 그에 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불꽃이 피어오르고 꺼지기가 몇 차례 반복되고, 발렌시아누스는 온몸이 따끔따끔한 고통에 치를 떨었다.

심장 박동이 가라앉자 무수한 생채기가 느껴졌고, 소금물이 스며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순 몸에 힘이 들어가고, 아이처럼 뽀얀 피부에 섬세한 근육이 갈라졌다.

카리오사는 발렌시아누스가 고통을 참는 표정을 보고, 다시 한번 아릿하게 웃었다.

“아파?”

그녀는 검지를 세워 그의 아래 가슴부터 복근 아래까지 길게 훑었다.

발렌시아누스는 카리오사의 손톱이 크고 작은 생채기에 닿을 때마다 이를 악물었고, 카리오사는 발렌시아누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프지?”

황금빛 눈동자가 오로지 그녀를 향해오고 있었다.

카리오사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입가를 핥았다.

“발렌시아누스.”

무심한 하얀 머리에 탐욕스러운 노란 눈, 넓은 어깨와 단단하고도 섬세한 몸, 겉은 용의 피로, 속은 정령의 정수로 벼려진, 제국에서 제일 고귀한 사내.

“나한테는 네가 어울려.”

그 정도는 되어야 동부의 주인이 될 그녀의 옆자리에 격이 맞았다.

“아직은 부족하지. 너도, 나도.”

“응?”

“저것부터 보여줬어야 하는데.”

카리오사는 한쪽에 서 있는 시녀를 불러 발렌시아누스가 가져온 서류를 뜯어보게 했다.

“하, 그래. 이것부터 보여줬어야 했네. 괜찮은 거야?”

그리고 침음성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멋들어진 글씨로 쓰인 서류는 임명장이었다.

[카리오사 서머린 아세노르타를 닻 군도의 왕으로 인정한다.]

“제국 안에서는 공작이고 제이릴리스의 봉신이지만, 닻 군도에서는 독립 군주다. 이 상황에 이 정도는 줘야 네가 남아주겠지.”

“너. 진짜 사람 말 막히게 하는 데 재능 있어.”

“제국의 대공이 되어 공작 따위에게 묶여 살 수는 없지. 날 가지려면 왕 정도는 되어야 해.”

“닻 군도면 해적들이 제일 많이 우글거리는 곳인데, 내가 걔들을 다 쓸어 버리고 요새화하고 영민들 옮겨서 개간까지 해야 왕 노릇도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한 40년간 중앙에는 눈길도 주지 마라?”

발렌시아누스가 옅게 웃었다.

하얀 이빨이 붉은 입술 아래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노란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단단한 목선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고, 긴 쇄골에는 그녀가 만든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그가 노란 눈을 치뜨며 말했다.

“그 정도도 못 기다려 주는 건가?”

카리오사는 헛웃음을 흘렸고, 발렌시아누스의 손가락을 물었다.

“내가 20년 안에 끝내고 돌아온다.”

발렌시아누스는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와 기다릴게, 가 공존하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고, 카리오사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시녀를 시켜 수건과 데운 민물, 셔츠를 가져오게 했다.

“군대만 회군시키고, 나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 볼게. 일단 봉신들 통제 때문에라도 군대는 많이들 돌아가야 하겠지만, 마경에서 두 번째 이물이 나왔을 때 나랑 기사들이랑 도와줄 수는 있을 거야.”

“고맙군.”

“씻고 가. 옷도 줄게. 따갑지?”

“그걸 알면서 날 이 꼴로……!”

“난 일어나지도 못하겠으니까 알아서 씻고 가. 머릿기름 필요하면 여기 내 거 쓰고. 옷은 나중에 보내줄게.”

발렌시아누스는 천막을 나설 때, 중간 울타리를 지나칠 때, 숙영지 목책을 벗어날 때까지 총 세 번 뒤돌아보았다.

카리오사는 그때마다 기사들에게 발렌시아누스를 다시 잡아 오라고 명령할지 말지 고민했다.

* * *

좋은 소식은 빨리 퍼지고, 나쁜 소식은 더 빨리 퍼지는 법이었다.

대제국 솔레타라스의 수도가 이물들에게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은 세작들을 통해 눈 깜짝할 사이에 전 대륙의 권력자들에게 알려졌다.

드넓은 남방대륙의 북쪽을 차지했고, 대사막 건너 암흑지대인 남쪽을 개척하며 부를 끌어모으는 제국.

아미르 토후국의 술탄 바포메르는 술잔을 기울이며 말을 골랐다.

‘솔레타라스의 당대 황제가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 하지만, 국력이란 황제 한 명으로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다. 수도가 그 꼴이 났다면 정상화하는 데 최소 4년, 경제까지 살리려면 그 두 배는 걸리겠지. 그동안 대영주들은 각자도생을 시작할 테고, 제국은 제국이 아니라 사실상의 왕국 연합 신세가 된다.’

따라서.

“오랫동안 우리를 가로막았던 자들이 무너지겠구나.”

“술탄. 하면-”.

“체사르. 그 지독한 노인네를 드디어 뿌리 뽑을 수 있겠어.”

“유목민족들을 충동질해 시카리우스 가문과 솔레타라스 제국 남서부 가문들의 힘을 빼놓겠습니다.”

술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의 제물들을 들여오라 명령했다.

“살려 주십시오!”

“꺄아아악!”

“안 돼! 안 돼!”

그는 번제용 단검을 뽑으며 화려한 옷을 벗었다.

“누가 먼저 그분의 품에 안기겠느냐?”

남방의 술탄이 인신 공양을 준비할 때, 동방의 대왕은 해적질을 준비했다.

“그래. 백상아리가 동부를 떠나 뭍에 올라가 있다 그 말이렸다?”

“예. 전하. 제국 수도의 마경 사태에 휘말려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 해도 한동안 그쪽에 매여 있겠군.”

“하루빨리 세 군도에 병사들과 신민들을 보내 정착시켜야 합니다.”

“그래. 솔레타라스가 더 이상 동진하게 둘 수는 없지. 작금의 어린 황제도 카리오사를 경계해 그의 확장의 발목을 잡을 터. 이건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다.”

“그럼-”.

“해적 두목들을 모두 불러라. 사략 허가를 내주겠다.”

동방의 대왕이 해적질을 준비할 때, 서부의 통령은 이를 갈았다.

그의 조국, 랑소와 공화국이 제국의 탐욕스러운 대영주들에게 침공당한 게 벌써 수십 번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전파해줘야 합니다.”

“제국 귀족들은 사실상 인간이 아니라 이종족입니다. 그곳 사람들에게 이종족의 폭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등한, 우리 인간들의 정신을 알려줍시다.”

랑소와 공화국은 이종족 혼혈 귀족이 없는, 순수한 인간의 나라였다.

천 년 전 이종족들이 몰락한 이후로 철저하게 이종족을 탄압해온 결과였다.

‘제국 수도에 마경이 열려 반신 황제가 사라졌고, 벌써 넉 달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면.’

민중의 지지는 높았고, 통령은 그 기대에 부응해줘야 할 책임이 있었다.

통령은 개인적 복수심과 정치인으로서의 의무를 모두 이행하기로 했다.

“전쟁을 준비하십시오.”

랑소와의 통령이 전쟁 준비를 시작할 때, 도로이센 왕국의 검왕은 전쟁 시작을 준비했다.

“아들아. 네가 가거라.”

도로이센은 랑소와처럼 제국 서방의 국가였고, 소국 하나를 중간에 낀 채로 인스트로멘툼과 마주 보고 있었다.

언제 마커스의 기계 기사들이 국경을 넘어올지 모르는 나라였다.

다행히 260년을 살아온 소드 마스터 국왕 아래 모든 기사와 영주가 뭉쳐 있었지만, 최근 마경을 토벌하던 중 국왕이 크게 다쳐 나라가 혼란에 차 있었다.

“마커스의 몰락을 들었다.”

“저 역시 들었습니다.”

“최근 유성이 떨어졌다지. 국경 조사를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겠다. 네가 이끌어라.”

그리고 원래 내부의 혼란은 외부로 돌려서 막는 법이었다.

“본부 받들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국채를 야금야금 파먹혀 왔지.”

“오욕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되갚아줄 때다.”

도로이센의 왕태자가 왕성을 나설 무렵, 자한 동맹의 상인 귀족들은 한데 모여 축배를 들었다.

“위하여!”

금력이 무력에 질질 끌려다니는 세상이었다.

아무리 큰돈을 번 상인이라도 기사가 찾아와 빌려 달라면 달라는 대로 빌려줘야 했고, 언제 얼마나 어떻게 갚을지는 기사의 마음에 달려 있었으며, 기사가 갚지 않아도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다.

“수도의 몰락을 시작으로 영지 간 교류는 줄어들 겁니다.”

“그때가 제국에 파고들 때죠.”

“그 거대한 시장이 모두 우리 품에 안길 겁니다.”

남방, 동방, 서방.

술탄, 대왕, 검왕, 통령, 상인 귀족.

세계의 권력자들이 제국의 시체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게 있다면, 제국의 망나니는 순순히 죽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 * *

“내가 반드시 이 금수의 자식들을 죄다 회 쳐 버리겠다!”

루디는 발렌시아누스가 도로이센 왕국이 보낸 국경 조사 통보서를 갈기갈기 찢어 화로에 던져 넣고, 그 통보서를 전해온 도로이센 전령을 마구 걷어차 쫓아내는 걸 바라보았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었고, 루디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잠시 하얀 장갑 안쪽이 힘없이 눌리는가 싶더니, 이내 단단한 감촉이 돌아왔고, 루디는 쓴웃음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어. 고마워. 괜찮고말고.”

발렌시아누스는 문자 그대로 초인처럼 일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수도 신민들을 수용할 거대한 천막촌을 순식간에 지었다.

‘회귀 전에 30만 대군도 이끌어 봤다. 군막이라고 생각하면 돼.’

각지의 상단에게 어음을 뿌려 가며 곡식을 끌어왔다.

‘빚지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자. 이 정도 빌렸으면 내가 갑이야.’

네 기사단, 아카데미 학생회, 생도 깡패, 중부 기사들, 마커스와 기계 기사들, 프로이하이트의 창천 기사들 등 온갖 무력 단체를 주무르며 음지로 양지로 치안을 안정시켰다.

배급이나 침식자 색출같이 좋은 건 모두 교회나 제이릴리스 이름으로 했고, 탄압이나 징발 같은 건 모두 제 이름으로 했다.

‘내가 날 지키려 하면 다들 날 노린다. 교회와 제이릴리스가 날 지켜주게끔 해야 해.’

“발렌시아누스! 이대로는 파산이다!”

“발렌시아누스. 와이번핏에 양 공급이 끊어졌습니다. 환자들 용으로 빼놓은 양고기가 있는데, 징발해도 되겠습니까?”

“전하. 르세나 경이 열세 번째 회군 요청을 올렸습니다.”

“전하. 남쪽에서 유목민족들이 계절이 맞지 않는 난폭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루디는 옆에서 그 말들을 듣기만 해도 머리가 터질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감히 제 주군을 동정하지 않았다.

뺨이 핼쑥해지고, 눈이 깊어지고, 눈매가 더러워졌지만, 발렌시아누스의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불꽃처럼 타올랐다.

“누나. 준비 얼마나 됐어?”

“시안 나왔단다. 모레, 아니. 밤샘하면 내일 아침이면 저걸 뜯어낼 수 있잖니.”

그는 그에게 주어진 일들을 관성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하드리탄. 일단 자한 동맹에서 차관 끌어와. 나중에 내 이름으로 진 빚은 전부 폐하께서 무효처리하실 거다.”

“청은 기사단장. 일단 그 양고기의 절반만 우선 가져가고, 한동안 와이번들을 다른 영지의 와이번핏으로 보내 놓게.”

“르세나 경에게 이 서류를 전하게. 제국 동북방 최대 부동항의 지분 40%야.”

“이미 체사르 후작에게 축성 허가를 내렸네. 배후에 토후국들이 있을 테니, 암살자를 보내라고 하게. 감히 제국을 간 보는 놈들에게는 혀가 터질 듯한 쓴맛 짠맛 매운맛을 보여줘야지.”

그는 제이릴리스에게 그러하듯, 그녀가 다스릴 제국에 헌신했다.

“전하.

“루디. 진짜로 나 괜찮아.”

발렌시아누스는 주기도문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

제이릴리스만 돌아오면.

“오히려 이 사달이 나서 좋아진 것도 있어.”

“네?!”

“모든 대영주가 침식자와 침식 교회, 이단 신앙과 수상한 마법사, 그리고 황실 혈통 사생아들에 대한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거든.”

“아.”

“같이 싸울 때 제일 힘든 게 적이 진짜 위험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일인데, 그게 아주 제대로 성공했어. 이제 폐하만 돌아오면 제국은 하나로 뭉칠 수 있을 거야.”

루디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물었다.

“지금 움직이는 다른 왕들은요?”

발렌시아누스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다 갈아버릴 놈들이었어. 조금 당겨진 걸 가지고 그렇게 불평불만 가질 필요는 없지.”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진지했고, 진심이라고 하기에는 가벼운 목소리였다.

“게다가 결국 이 사달 자체가 폐하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거잖아.”

“네.”

“바꿔 말하면, 폐하만 돌아오면 어찌 될지 모른다는 말이거든.”

* * *

상아탑 최고의 흑마법사들과 마경 연구자들, 황립 마도 공방 최고의 공방주들, 교회의 최고위 성직자들이 마경 아래 모였다.

“드디어 오늘이군요.”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이게 끝이 될지 시작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난 끓어오르는 기대감을 애써 누그러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난 세 달간 평소라면 300년이 걸려도 못할 쾌거를 이루었다.

애초에 공간과 차원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던 상황에서, 옛것 쪽에서 닫은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는 연구가 쉬울 리가 없었다.

“뭘 그렇게 보니?”

그 연구를 이끌었던 게 세레라지에였다.

반드시 황실이 이 연구를 주도해야 했기에, 그녀는 눈엣가시 같은 교회와 영원한 고향 상아탑 사이에서 원치 않는 줄타기를 해야 했다.

“고마워서.”

그녀는 나보다도 수척해진 얼굴을 들어 새침하게 웃어 보였다.

평소 멋으로 들고 다니던 지팡이에 몸을 진짜로 지탱하고 있는 걸 보니,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정말 수도가 뒤집히기는 했잖니.”

세레라지에가 옅게 웃으며 넓은 은판에 다이아몬드를 가득 박은 주문 회로를 들고 한 걸음 나섰다.

지난 몇 달간 만들어낸 공간 마법이 담긴 회로였다.

천재 마법사는 무너진 선착장과 넘친 운하, 폐허가 된 건물들을 배경 삼아 고개를 들었다.

나, 마테오스, 텐티아 경, 루디, 게스타르테,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세레라지에가 지팡이를 바닥에 가볍게 내리쳤다.

불씨가 튀고, 그 순간 저 하늘 위에서 소용돌이치던 청록색 빛 덩어리가 크게 일렁였다.

쿠르르릉!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리고, 금빛 파동이 새어 나왔다.

하늘에 파문이 일고, 청록빛 마경에 금기 가며 그 기운이 흩어지고 사라졌다.

“세상에.”

“오오.”

콰득, 콰지직!

금빛 기운이 마경 입구를 칼날처럼 뚫고 나왔다.

마치 황금으로 된 칼이 마경을 부수고 있는 듯했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전격, 대지에 이어 공간까지 다룬 천재 마법사는, 당황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색이 다른 두 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았다.

뭐야?

나는 다급하게 그녀 곁으로 다가가, 속삭이듯 물었다.

“누나. 왜 그래?”

세레라지에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잖니?”

“뭐?!”

아니, 그럼 저건 누가 뭘 하고있는 건데?

그 의문은 빠르게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내가 알기로, 마경을 저렇게 뜯어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쾅!

폭음이 울리고, 황금빛 기운이 하늘에 원을 그리며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청록빛은 완전히 잡아먹혔고, 결국 찢겨 사라졌으며, 수도 하늘은 다시 맑은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그 하늘에서 내 쌍둥이가 천천히 내려왔다.

햇볕을 받은 백발이 한껏 달아올라 보석처럼 빛났고, 금빛 눈동자는 태양을 훔친 듯 찬란했으며, 붉은 입술에는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알아볼 수 있는, 나의 황제였다.

“폐하!”

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외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내가 지난 몇 달간 누렸던 권력 아닌 권력에 조금의 미련도 없음을 드러내겠다는 계산도 슬쩍 하면서.

“발렌시아누스!”

제이릴리스는 그대로 내 품을 향해 내려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양팔을 벌렸다.

황제를 껴안고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리는 게 불경이라는 사실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뒤였다.

“미안하구나. 짐이 너무 늦었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햇살과 레몬, 홍차가 섞인 향기가 났고, 그녀의 몸은 내 생각보다 너무 가벼웠으며, 그녀의 체온은 용이나 고양이처럼 따듯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이리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셔서 감사할 뿐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내 등을 한껏 껴안았다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랑스럽고, 미안하고, 고맙고, 걱정스럽고, 흡족하고, 오만가지 감정이 그녀의 눈빛에 스치고 사라졌다.

“강해졌구나. 또 힘들었구나. 놀라지 않을 테니 솔직히 말하라. 짐이 돌아오기까지 몇 년이나 걸렸는가?”

“예, 예?”

“그대 정도 되는 실력자가 이렇게 지치려면 몇 년은 필요했겠지. 혹시 전쟁도 있었는가?”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마경 안은 이곳과 시공간이 다를 때도 많았다.

핵을 찾으려 일주일을 헤맸는데, 밖으로 나가니 들어간 지 10분도 흐르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즉.

제이릴리스가 내 안색을 보고 생각한 시간의 흐름이 적어도 년 단위라는 이야기였다.

제이릴리스가 눈썹을 가볍게 치켜세웠다.

“그대 반응을 보니 짐 생각보다는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은 듯하구나. 그럼 수도 복구도 조금은 쉬워지겠어.”

“복구…… 말씀이십니까?”

“지금 바로 보여주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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