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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대륙에서 온 수행자들은 이 세상 모든 것에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아들을 징집당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곡식을 징발당한 농부도 주저앉겠지만, 도시에서 갑옷 공방을 운영하는 대장장이와 화살 공방의 장인, 장의사는 축배를 든다.
인간으로 당연히 가져야 할 슬픔과 별개로,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이득을 보는 사람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의 수도 중심부가 폐허가 되고, 60만 신민이 초겨울에 들판 천막촌으로 내몰린 이 상황에서도, 웃음을 참는 이들이 있었다.
“우린 이제 부자다!”
“애들 미리 모아놔. 아카데미 쪽 캠프에 가서 대지 마법사들도 확보해놓고.”
“누가 텐티아 경 아는 사람 있나?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호위 기사이자 최측근이라는군.”
바로 건설 길드와 토목 길드, 자재 길드의 고위층들이었다.
그들은 수도 부르주아 중에서도 최상위층이었고, 부유한 평민 계급과 지식인들을 대변했으며, 혈통으로 힘을 물려받은 궁정귀족들과 묘한 대립각을 세워 왔다.
그들은 윤리를 떠나, 지식만으로 이종족 혈통의 귀족들과 맞설 수 있을 만큼 부와 권세를 일궈낸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이미 황실은 몰락의 위기를 벗어난 상태였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수도를 떠나지 않았고, 이는 그가 무언가 생각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솔직히 이야기해 봅시다. 아무리 그가 망나니에 성자 납치범이라지만, 지금껏 그가 큰 처벌을 받거나 실패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후작을 둘이나 죽이고도 반란 소리를 안 들은 수완가라는 건 인정합니다.”
“이미 상아탑과 황실 마도 공방의 마법사들이 마경을 다시 여는 마법을 80% 이상 완성했다고 들었습니다.”
“대귀족들도 수도에 머물러 있고요.”
“지금만 어찌어찌 버티면, 내년 봄에는 초대규모 공사 수주가 들어올 겁니다. 그럼 우리는 몇 배의 부자가 되겠지요.”
그들은 빠르게 거기까지 계산했고, 모든 인맥을 동원해 사방의 거래처에 연락을 넣었다.
“채석장 주인 되는가? 내가 이번에 석재를 좀 대량으로 주문하려는데 돈이 조금 부족하긴 해. 대금은 집행되는 대로 줄 테니 한 번만 믿어 주게.”
“남작님께 벌목 허가받았지? 바로 널빤지로 만들어.”
“코넬 의원이 옛 빈민가에서 벽돌 공장 운영하고 있지 않았나? 일단 만나 봐. 재고 다 처리해준다고 해.”
아무리 솔레타라온이 거대 도시라지만, 1km급 이물과 2만여 마리의 침식자가 싸우며 생긴 상흔은 깊었다.
지하수로가 사방에 뻗어 있는 도시의 특성상, 완전히 무너져 내려 지반공사부터 다시 해야 하는 건물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지하수로 복구에 필요한 예상 예산을 산출한 하드리탄과 재무대신이 헛웃음을 흘릴 정도였다.
‘집은 사치재가 아니라 필수품이고, 조금만 공급이 모자라도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
‘마경이 닫히는 대로 들어가서 발렌시아누스 대공과 말을 나눠야겠어. 금화를 좀 찔러 드리면 다소의 폭리 정도는 눈감아주시겠지.’
‘우리는 이제 부자다.’
따라서 각 길드의 고위 간부들이 ‘일단 무리해서라도 자재를 확보해놓고, 마경이 닫히면 바로 공사에 들어가 분양 가능 물량을 확보한 다음, 어마어마하게 비싸게 팔아먹자.’라고 생각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워낙 많은 돈과 촘촘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가 마경을 닫겠다고 했을 때, 그와 함께 수도 성벽 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과 길을 가리키며 누가 어디를 수주받을지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황제 폐하?”
마경에서 황제 제이릴리스가 튀어나왔다.
새파란 하늘 아래, 황제가 황금빛 기운을 끌어 올렸다.
사아아아-.
찬란한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지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내려앉은 건물들이 들썩였다.
* * *
완전히 무너져 내린 석조 건물이 꿈틀거렸다.
벽돌은 달라붙고 돌기둥은 일어섰으며, 깨진 유리가 다시 하나로 돌아갔다.
우르르릉!
지하수로에 빠진 토사와 도로포장 벽돌이 시간을 거스르듯 다시 튀어나오고, 무너졌던 선착장이 운하 바닥에서 솟구쳤다.
촤아아악.
구부러진 못이 펴지며 제자리로 들어가고, 찢어진 깃발은 다시 깃대 위로 치솟았다.
펄럭!
원래 3층이었던 건물은 5층이, 5층이었던 건물은 8층이 되었다.
지하수로에서 올라온 토사가 뭉치며 암석이 되고, 결을 따라 쪼개져 벽돌과 기둥이 되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속으로 내려앉은 지하수로 위로 철재 골조가 겹치고, 거대한 석판이 맞물리고, 그 위로 자갈과 모래, 포장 판석이 놓였다.
황금빛 기운이 수도 전체를 감싸고 일렁였다.
나는 놀랍다 못해 허탈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게 어떤 마법인지 알아챈 듯, 세레라지에와 상아탑 원로들도 혀를 내둘렀다.
제이릴리스는 지금 골렘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통상적인 골렘 마법이 이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수도 전체를 일으킬 정도의 힘은 오로지 제이릴리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적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복구된 선착장 한쪽 계단 위에 서서, 특유의 나른한 눈빛으로 도시를 굽어보았다.
반원형 극장 객석 제일 높은 곳에 선 것 같았다.
“겉만 번지르르하겠지만, 일단은 사람 사는 곳 같구나. 짐의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지키고 만드는 게 빼앗고 부수는 것보다 위대하지. 그러니 그대여. 짐의 도시를 지켜 줘서 고맙구나.”
나는 막 옆 석조 건물 꼭대기에 피뢰침이 서는 걸 보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회귀 전의 제이릴리스가 도시 하나를 멸망시킨 적은 많았지만, 도시 하나를 복구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관료들과 기사들, 마법사들도 나와 같은 표정이었다.
하드리탄과 재무대신은 얼싸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고, 기사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으며, 상아탑 마법사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제이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때 긍지 높고 낮은 미성이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울렸다.
“47대 솔레타라스! 제이릴리스 폐하 만세! 셉텐트리오스의 세베릭이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북방의 방패, 혹한의 대공이 제이릴리스를 올려다보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실 직속 기사들과 중부 기사들, 다른 대영주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북부 대공이 황제 앞에 머리 숙이는 그림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세베릭은 나와의 약속을 지켜 주었다.
그 뒤를 잇듯, 허탈한 웃음소리가 내 옆에서 들려왔다.
“진짜, 진짜 말도 안 나오네.”
동부의 패자, 폭풍의 딸이 물색 머리를 한데 묶으며 제이릴리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세노르타의 카리오사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황제 폐하 만세.”
그림자 속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태양 아래 섰고, 태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카리우스의 체사르가 남은 삶과 지금껏 살아온 삶을 바칩니다. 황제 폐하 만세.”
영악한 소녀 후작, 시그나인이 한없이 압도된 표정을 지었다.
언니와 오빠를 제치고 후작위를 물려받았으며, 공작 작위까지 내정 받은 소문의 능력자도, 무너진 도시를 마법 한 번에 재건해버리는 기적 앞에서 전율했다.
그레이스가 나와 제이릴리스, 그리고 성문 밖에서 환호하는 신민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가 나도록 붉은 입술을 깨물었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이릴리스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내 밑으로 편입된 철혈당주 마커스도, 희대의 천재 세레라지에도, 그 외 다른 직신 대영주들도 하나둘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제이릴리스 폐하 만세. 솔레타라스의 치세에 영광이 있으라.”
“제이릴리스 폐하 만세! 솔레타라스의 치세에 무한한 영광이 있으라!”
그녀의 이름이 하늘 아래 울리는 가운데, 하늘 위의 존재로부터 표식을 받은 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발렌시아누스.”
나는 마테오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성자님. 법안을 통과시켜 드렸잖습니까? 구호 물품도 모두 교회 이름으로 나갈 수 있게 해드렸고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요.”
마테오스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고, 다시 찬란해진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는 선 그윽한 얼굴에 엄숙한 표정을 띄웠고, 두르고 있던 검은 망토를 풀어 내게 건네주었다.
“으음.”
“흡!”
여기저기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자의 자주색 예복이 겨울 태양 아래서 빛났다.
마테오스는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한 채로 뒤로 쓸어 넘겨 이마에서 빛나는 성흔을 드러냈다.
제이릴리스가 나를 보며 씩 웃었고, 마테오스는 용케도 살아남은 작은 나무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그의 손에서 신성력이 번뜩이고, 나뭇가지는 원을 그리며 길게 자라났으며, 마치 왕관처럼 멋들어지게 꼬였다.
손가락 두어 마디 크기의 샛노란 꽃이 나뭇가지 왕관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만개했다.
나는 마테오스가 방금 성물을 만들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꽃은 영원토록 지지 않으리라.
마테오스가 제이릴리스와 나란히 섰다.
성직자들과 궁정 귀족들 사이에서 침음성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성자가 제관을 줄 때는 신을 대리해 준다는 의미가 있기에, 아무리 왕이나 황제라도 아래 계단에서 받는 게 지금까지의 전통이었다.
“제이릴리스.”
마테오스가 신성 화관을 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검은 머리 위로 신성력으로 이뤄진 광배가 떠올라 은은하게 빛났다.
“그대는 법과 검으로 정의를 수호하겠습니까?”
“그리하겠노라.”
“믿음과 실천으로 교회에 신실하겠습니까?”
“그리하겠노라.”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겠습니까?”
“그리하겠노라.”
제이릴리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세 번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이 땅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겠습니다.”
마테오스가 제이릴리스에게 신성 화관을 씌웠다.
이제 그녀는 아래로는 만조백관과 대영주에게, 위로는 신에게 인정받은 황제였다.
나는 하늘이 떠나가라 외쳤다.
그녀를 사랑받는 황제로 만들고, 그 밑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
절반 이상은 성공한 듯했다.
지독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제이릴리스 폐하 만세!”
이제 아무도 그녀를 폭군이라 부르지 못 하리라.
대영주들이 그녀의 즉위를 문제 삼아오는 일도, 끝없는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유스티아누스 같은 반역 황자들을 지원하는 일도 없으리라.
그들은 회귀 전과 달리, 충성을 맹세했다.
그녀를 폭군이라 부른다면, 폭군을 인정한 자신들의 정통성과 정당성도 흔들린다.
하물며 성자가 직접 신성 화관을 씌워준 황제에게 폭군 소리를 한다면, 교회마저 무시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날 뒤로 세간에서 제이릴리스를 부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
“수도를 단번에 복구한 힘과 성자님이 주신 화관. 그 둘의 의미를 모두 담아서 이렇게 부른다네요.”
“뭐라고?”
“신성 황제.”
* * *
기나긴 충성맹세 일정이 끝났다.
본래보다 거의 5달을 더 끈 일정이었다.
따라서 대귀족들은 충성맹세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떠나갔다.
“친구.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세베릭. 덕분에 황궁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북부 대공 세베릭은 부동항과 곡식을 얻었고.
“폐하께 새언니라 불러보려 했는데.”
“닻 군도 왕위를 인정해준 게 어딥니까? 폐하가 날 건드린 거 아시기 전에 빨리 돌아가십시오.”
카리오사는 공작 작위로 승격 받았으며, 제국 내 작위와 별개로 닻 군도의 왕이 되었다.
마지막 날 제이릴리스가 그녀를 보고 씩 웃던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시그나인은 최대 수혜자였다.
영토를 몇 배로 늘릴 기회를 얻었으며, 공작 작위로 승격 약속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지만, 여전히 전 당신이 미워요.”
“아니까 말하지 마.”
그레이스는 황실과의 교역에서 약간의 관세 혜택을 받았고.
“아, 그 시녀 재능 있더군. 시간만 더 있었으면 제자로 들이고 싶었네.”
“……교관 한두 명 정도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체사르는 축성 허가와 유목민족 추적, 정확히는 토벌 중 국경을 넘어서 문제가 생겨도 시카리우스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물론 되려 뭔가를 내놓게 된 정통성 부족한 대영주들도 있었다.
주로 찬탈했거나, 교회와 척져서 황실에라도 잘 보여야 하거나, 내전 때문에 피곤한 대영주들이 그랬다.
그렇게 모두를 돌려보낸 수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근원지가 빈민가나 날품팔이들의 입이 아니라,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들과 부르주아들이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네.”
“귀족들과 달리 도망치지도 않았고, 끝까지 천막촌에 남았지. 황제 폐하를 되찾아오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고.”
“공도 모두 폐하께 돌리지 않았나? 배급은 모두 폐하 명의로, 징발은 모두 자기 이름으로 하더군.”
“솔직히 폐하 덕에 도시가 복구된 건 맞지만, 우리를 살려준 건 발렌시아누스 대공이야.”
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이러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