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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별궁으로 돌아왔고, 루디는 별궁 상태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하인과 하녀들을 다그쳤다.
“이런 곳에서 발렌 님을 재울 수는 없습니다! 빨리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지도록 치우세요.”
“적어도 이틀 이상은 걸릴……”.
“이번 달 보너스 200%.”
“2시간을 잘못 말했습니다.”
그들은 삽시간에 모든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과 테이블, 홈과 틈을 닦았으며, 상한 식료품을 버렸다.
덕분에 나는 수도 수복으로부터 며칠도 지나지 않아 포도주를 마시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식료품을 구해온 루디에게 수도 여론을 묻는 사치를 즐길 수 있었다.
그녀가 들려준 대답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내 지지가 번지고 있다는 말이지?”
“네! 드디어 발렌 님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했어요.”
루디가 환하게 웃었다.
녹색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고, 입가도 보기 좋게 올라갔다.
“그 사람들이 발렌 님에게 고문보다 더 많은 권한이 있는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실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수도가 박살 났고, 60만 신민이 천막촌으로 밀려났으며, 황제는 실종되었고, 마경에서 언제 다른 이물이 나올지 모른다.
망나니라는 이미지를 철저히 지키기에는 너무 몰릴 대로 몰린 상황이었다.
구호, 징발, 침식자 색출, 필요한 건 뭐든지 해야 했다.
최대한 구호를 제이릴리스 이름으로, 징발을 내 이름으로 하기는 했지만,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은 모두 알아본 모양이었다.
내가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
지식인들의 지지는 정말로 위험했다.
사실, 법적으로만 따지면 제위는 내게 오는 게 맞았다.
제이릴리스는 우리보다 계승서열이 앞서는 황족들을 죄다 죽이거나 계승을 포기시키는 방식으로 옥좌를 얻었다.
문제는 내가 쌍둥이 중에서 오빠라는 거다.
고맙게도 그녀는 날 죽이지 않았다.
그러니 난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정통성에 문제를 만든다.
충성맹세가 이루어지기 전, 내가 도망친 다음 대귀족들을 끌어모아 내 제위를 되찾겠다고 외쳤다면 어마어마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 거다.
물론 진노의 창을 얻어맞고 망했겠지만.
“루디. 알현 일정 좀 잡아 줄래?”
권력자들에게는 본능이 있다.
위협이 되는 건 살려두지 않는다.
내가 마커스와 기계 기사들을 사병처럼 거느릴 수 있던 건, 그때 내가 조금의 지지도 받지 못하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그녀와 쌍둥이고, 제이릴리스와 우애를 쌓고 있다고 해도, 권력과 권한이라는 측면에서는 철저히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제이릴리스를 찾아가 말했다.
“폐하. 한동안 수도 안 일에만 집중하고 싶사옵니다. 기사총감 자리를 반납하겠사옵니다. 소신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자리였사옵니다.”
제이릴리스는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스윽 밀어 치우더니, 내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대는 역시 눈치가 빠르군. 그래서 기꺼워.”
“실로 감사하신-”.
“하지만…… 약간 서운하기도 하군.”
“?!”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짐이 그 정도 목소리를 눈감아주지 못할 만큼 속이 좁은 듯했나? 짐이 그대에게 보여준 신뢰가 그리도 가벼웠나?”
그녀가 멋진 주전자를 꺼내 커피를 준비했다.
관절 반지가 잠시 달그락거리고 커피잔이 내밀어졌다.
스윽.
그녀는 앙큼한 작은 악마를 보듯 날 바라보았고, 나는 독배를 마시는 기분으로 커피잔을 받았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의 황제께서 직접 내려주신 커피는 참담하리만큼 쓰고 산미가 강했다.
그녀는 자신의 잔에도 커피를 따랐고, 그걸 한 모금 마셨다.
“……이리 주거라. 황명이다.”
그리고 내가 마시고 있던 커피까지 빼앗아 책상 아래 쓰레기통에 부어버렸다.
제이릴리스가 책상을 연달아 내리치며 일갈했다.
“맛이 없으면 말이 없다고 말하거라! 불안하면 불안하다고 말하거라! 짐이 그대 말고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짐이 이 정도로 그대를 의심할 것 같은가?”
콩! 콩!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듯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저 손짓에 약간만 힘을 담으면 전력으로 휘두른 전투 망치보다 강해진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시녀를 불러 새 커피를 내리게 했고,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몇 달간 밤을 새우기를 빵 먹듯 했다고 들었노라. 그래. 그대에게도 휴가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은 했어. 기사총감 자리를 거두겠노라. 한동안 그대 일에 집중하도록. 하던 대로 해 보거라. 수도를 마음껏 싸돌아다니면서.”
나는 머리를 숙이며 일어섰다.
“황은에 망극하옵니다.”
* * *
발렌시아누스가 황궁 복도를 걸었다.
넓은 창으로 드리워진 햇살은 이목구비 또렷한 망나니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고, 하얀 제복에 붙은 금장 장식들을 번쩍번쩍 빛나게 했다.
그의 붉은 입술이 무언가 꾸미는 듯 사악한 호선을 그렸고, 때마침 그의 옆으로 또 다른 황족이 자연스럽게 붙어왔다.
“발렌시아누스. 집계가 끝났다.”
“수고했다. 하드리탄. 쉽지 않았을 텐데.”
하드리탄은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을 보고 몸을 떨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비인간적이었고, 노란 눈동자와 올린 백발, 조각 같은 얼굴도 비인간적이었으며, 햇살에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하얀 장갑도 비인간적이었다.
“천만에. 지난 몇 달간 계속해서 하던 일이었다. 결국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쉬웠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하드리탄은 발렌시아누스와 달리 거짓말에 능했고, 발렌시아누스는 오늘만큼은 선의의 거짓말을 굳이 파헤치지 않기로 했다.
“사태 전 수도 인구가 약 59만 5천, 사태 이후로는 약 45만. 거의 15만 명 정도 죽었군.”
어지간한 대도시 하나의 인구를 논하고 있음에도, 그 망나니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로 강력한 이물이 나타난 상황에서 이 정도 피해로 끝난 건 신의 축복이었다.
“침식이 들불처럼 번져 매일매일 수백 명씩 처형했으니 말이다…….”
하드리탄은 말끝을 흐렸다.
그 처형을 지시하고 화장장을 운영한 게 눈앞의 발렌시아누스였다.
“인구는 다시 증가 중인가?”
“연례행사다. 원래 이때쯤 유민들이 제일 많이 몰려올 때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우니 섞여들기도 쉽고.”
“잘됐군. 내가 원하던 자료는 이쪽인가?”
발렌시아누스가 서류 한 묶음을 팔랑였다.
하드리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자들이 가지고 있던 땅과 건물이다. 본래 5년 이상 상속인을 찾아야 하지만, 긴급 사태인 만큼 기한을 줄여 곧바로 황실에 귀속되도록 했다.”
“폐하께서 수도를 복구하실 때, 보다 고층 건물들을 지으셨지. 그걸로 공급은 충분하겠지?”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고, 하드리탄은 고개를 젓지 못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땅문서 한 뭉치를 팔락이며 웃었고, 하드리탄과 함께 넓은 발코니로 나가서 수도 전경을 바라보았다.
사아아아-.
겨울바람은 차가웠지만, 하늘은 한없이 맑았고, 수도를 바라보는 대공의 눈빛은 어떠한 열망으로 번들거렸다.
“이건 우리가 나눠 먹도록 하지.”
발렌시아누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드리탄은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우리?”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 자신을 공범으로 만들려 하는 건지, 아니면 함께 재산을 축적할 기회를 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파란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고 있으려니, 발렌시아누스가 씩 웃었다.
“그래야 재개발이 편해진다.”
“뭐라고?”
하드리탄은 발렌시아누스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난 이번 사태에서 배운 게 많다. 길도 더 넓혀야 하고, 거리는 부채의 살처럼 깔끔하게 만들어야 하며, 불법으로 중축된 건물은 철거해야 한다. 대피가 늦어져 죽고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아.”
“아.”
“이걸 체계적으로 진행하려면 이 땅과 건물들이 모두 황실 소유여야 한다. 뭐 하나 갈아엎을 때마다 나와서 울부짖고 있으면 진행을 못 해. 그렇다고 이런 일을 겪은 사람들 대상으로 목을 막 날릴 수도 없고.”
“그렇군.”
“지금 건설, 토목, 자재 길드 애들은 비명 지르고 있을 거다. 쌓아둔 물건은 안 팔리는데 대금 치를 시기는 가까워지기만 할 테니까. 만나서 공사 진행해. 당장 일자리 없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도 줄 수 있을 거다. 그게 행정관료 일이지?”
하드리탄은 환하게 웃으며 사본 묶음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깊었던 모양이다.
“발렌시아누스! 미안하다.”
“아직 사과받을 일을 하지는 않았다. 피곤할 텐데 다음에 ‘영생’ 영약이라도 하나 주지. 고생하도록.”
* * *
하드리탄에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그때는 사과받을 일을 하지는 않았었지.”
나도 확인이나 하려고 그 땅문서 원본을 받은 건 아니었다.
지난 몇 달간 이 고생을 했는데, 뭐라고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황실에 귀속.
이 말만큼 재미있는 게 또 없다.
연금이나 전하 호칭과 별개로, 지금 공식적으로 계승권을 가진 황족은 나와 세레라지에뿐이다.
실제로 황족으로서 활동하는 건 나뿐이고.
제이릴리스는 황실의 정점이니, 이렇게 황실에 귀속된 땅문서는 우선 제이릴리스 손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인스트로멘툼을 그렇게 나누었듯, 내게 35%를 때 주었다.
“뭘 하느라 그리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나 싶었더니, 이런 걸 꾸미고 있었군? 쉬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하.”
“짐의 충신이라면 이 정도는 즐겨도 되겠지. ……마음대로 해. 오빠.”
“폐하. 방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잘못 들었을 것이다.”
그곳을 추가로 복구하고,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부지를 통폐합하고, 새 건물을 올리고, 길을 닦는 건 전부 세금으로 나갔다.
그래.
내 연금이 아니라, 세금으로 나갔다.
황실의 일족으로 대우를 받는다는 건, 나라에 지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봉건 사회에서 황족이 세금으로 건물을 복구한 뒤, 그곳을 날름 삼키는 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달랐다.
선황의 첩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여전히 황족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고.
내가 사실상 제이릴리스의 신하로 활동했기에, 신하가 황제의 이름과 힘과 돈을 이용해 제 사적 재산의 가치를 올린 느낌이었다.
그러니 위대한 신성 황제께 세금을 바치고 신성 황제가 그 세금을 연금으로 일족들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망나니가 세금으로 제 건물을 세우는 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이건 오히려 빈민, 서민들보다 중산층, 부르주아들이 더 분노했다.
“우리 돈으로 제 배를 채우다니!”
“내 땅 빼앗아 가서 지가 꿀꺽해? 심지어 수도 복구 예산으로 새 건물을 올려?”
“당장 고등재판소에 고발하겠다!”
사업상 많은 세금을 내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낄낄 웃으며 마차를 타고 대로를 가로질렀다.
내 옆에는 내 땅의 공사를 황실 영토교통부 장관에게 정식으로 수주받은 토목-건설 길드장이 앉아 있었다.
물론 입찰 과정에서 내 입김이 약간 들어갔을 수도 있지만, 난 아무튼 모르는 일이었다.
그 길드장은 적갈색 단발머리에 고아였고, 외다리였다.
코넬이 이례적으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발렌 전하. 아무리 그래도 지식인, 부르주아들에게 이렇게까지 적대 받는 건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르주아 중에는 의원도 있고, 자경단이나 깡패들을 거느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전하가 험한 일을 당하실 리는 없겠지만…….”
“서론이 길다. 코넬.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전하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그들을 적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심지어 전하를 지지하던 사람들이었는데도요. 전하 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잘해주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나는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그래.
그들은 내가 행한 정책이 필요했다는 걸 알아본 이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망나니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날 지지했을까?
절대로 아니었을 거다.
수도 사람이라면 모두 안다.
당대 황제보다 계승서열이 앞서는 황형을 지지했다가는, 그 황형의 입지만 위태로워진다.
그런데도 나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지식인들과 부르주아들이 대놓고 떠들고 다닌다는 건.
“그 사람들은 날 엿 먹이려고 한 거다. 코넬.”
“아!”
날 죽이고 싶다는 말이다.
물론 그게 그들만의 생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혼란을 틈타 들어와서 뭔가 공작을 벌이고 있는 배후가 있겠지.
아마 자한 동맹 놈들일 거다.
빌어먹을 상인 귀족들.
회귀 전에도 지독한 놈들이었지.
어떻게든 엮일 것 같으니 대비하고 있어야겠다.
일단 내실을 다지고 사병을 만들자.
“건물은 잘 올라가고 있지?”
“네. 뼈대를 보니 공방 단지 같은데, 전하가 직접 운영하지는 않으실 것 같고. 누구 주실 건가요?”
“철혈당주 마커스하고 세레라지에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