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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저러니 해도 수도 정세는 아직 혼란스러웠고, 지식인들과 부르주아들은 혼란스러울 때보다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더 강한 힘을 내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절대적인 머릿수를 가진 빈민들과 서민들은 제이릴리스 덕에 이 겨울날 밖에서 떨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했기에.
“발렌시아누스가 이번에도 ‘발렌시아누스’ 했나 보군.”
발렌시아누스가 망나니 짓을 했다는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덮쳐온 무수한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망자 없는 사건에 그리 분노하지 않았다.
당장 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황실에서 진행하는 재건축 사업에 나가서 땀 흘려 일하며, 돌아오는 길에 가족을 먹일 뜨거운 스프와 빵을 가져올 뿐이었다.
그렇게 발렌시아누스의 공방은 착실하게 완성되어 갔다.
부지 전체를 두른 높은 담장, 8층 높이의 석조 연구 건물 두 개, 개발한 무기를 시험해볼 넓은 연무장, 철골 뼈대에 3층 높이로 지어진 거대 공방 여섯.
수십 명의 기계 기사가 주둔할 숙소와 식당, 거대한 연무장과 기타 건물들, 니벨룽겐의 착륙장으로 이루어진 공방 단지였다.
황궁 서쪽에 지어진 이 단지는 황립 마도 공방과 무척 가까웠고, 배움의 거리, 마법 거리와도 꽤 가까웠다.
마커스와 세레라지에가 능력 있는 연구자들을 뽑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대지 마법과 파괴술에 재능 있는 졸업생, 주문 회로와 주술 회로를 그리는 게 빵 먹는 것보다 재미있는 졸업생, 마법을 신비가 아니라 학문으로서 대하는 졸업생 구함.
생도 깡패 경력 불문.
막대한 보수, 숙식, 과로사 가능성.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는 설렘 제공.]
철혈당주 마커스의 공고였고.
[전격 마법과 대지 마법에 재능 있는 졸업생, 한 사람의 탐구자로서 신비의 길을 끝까지 걸어보고 싶은 졸업생, 마법이 좋아서 잠도 안 오는 졸업생 구함.
생도 깡패 경력 불문.
막대한 보수, 숙식, 과로사 가능성.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는 설렘 제공.]
세레라지에의 공고였다.
앞쪽은 다르지만, 뒤쪽은 같았다.
“괜찮은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대박이지! 그 두 분이라고!”
“나도 슬슬 취업해야 해. 언제까지 이따구로 살 수는 없지.”
이 바닥에서 과로는 상식이니, 중요한 건 과로에 돈과 배움이 딸려오는가, 아닌가다.
진의 학생회에서 이름을 떨쳤던 마법학부 생도들이 진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왔고.
악명 높은 생도 깡패들이 헬레나의 징병을 피해 취업을 갈구했으며.
무산된 졸업설명회로 인해 무수한 재능의 소유자들이 취업을 위해 밀려들었다.
“헬리오스 아카데미에서 전격 전공으로 3년 연속 과탑, 상아탑 생도들이랑 교류회도 했구나. 이 정도면 상아탑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인재 중에서는 최고잖니. 합격.”
“전격 쪽은 그저 그렇지만, 부여 술식에 재능이 있구나. 주술 회로를 잘 새기는 건 좋은 재능이잖니. 합격.”
“생도 깡패 출신? 지난 다섯 달간 카탈린 밑에서 현장을 뛰었다고? 그 정도면 거의 워록이잖니. 그래. 워록은 깡패 출신들은 안 받아 주지. 하지만 난 워록이 아니잖니. 합격이란다.”
20대에 6서클의 경지를 엿본 마법사, 세레라지에의 밑으로 수많은 마법사가 모여들었고.
“성적은 썩 좋지 않았지만, 대지 마법으로 건물 구조를 바꿔 비밀 방을 만든 뒤 동료들과 흑마법 연구와 실험을 한 경력이 있군요. 공간 감각과 부여 술식에 재능이 보입니다. 같이 가 보죠.”
“대지 마법 전공. 부친도 대지 마법을 이용한 금속 정제 사업채 운영. 구리값이 올랐을 때 동전을 녹여서 주괴로 팔아먹다 걸려서 정학. 음. 딱 제가 찾던 인재입니다. 함께 미래를 보러 갑시다.”
“4서클 파괴술사이자 부여술사. 역장 마법을 갑옷에 새길 수 있고, 힘의 창을 이용한 마도구를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으며, 비행 술식과 반중력 술식을 주술이 아니라 주문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환영합니다.”
한때 서부에서 제일 위험하다고 불렸던 대영주에게서, 광기가 아니라 미래를 본 자들이 줄을 섰다.
그렇게.
총괄 발렌시아누스 대공.
섬광 공방주 세레라지에 대공.
마도 공학 연구소장 마커스 후작.
세 사람 아래로 무수한 인재가 모였다.
세간에서는 망나니 발렌시아누스가 제이릴리스의 눈을 피해 자신의 궁정을 차렸다고 떠들 정도였다.
“혹시 반란을 준비하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충성맹세가 시작되기 전에 했겠지. 폐하가 실종되었을 때 했거나. 그래도 불안하군.”
용언과 정령의 힘을 부리는 망나니, 서부 제일의 마도공학자, 20대 6서클급 마법사.
그 셋이 수십의 기사와 비공정, 빼어난 마법사들을 휘하에 두고, 마도구를 개발 판매하니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그 역사적인 장소는 그야말로.
“그러니까 왜 주술 회로를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거니?”
“분석하지 못한 걸로 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자! 일단 둘 다 진정하고 기계 기사들 마갑부터 손보도록 하지!”
난장판이었다.
* * *
“아니. 주술 회로 사용을 왜 이렇게 못마땅해하는 거니? 결국 마법은 신비고 감각이잖니. 선택받은 자들만이 부리는 힘! 그걸 최대한 활용해야 우리의 절대적인 위치가 지켜지지 않겠니?”
세레라지에가 노란 눈을 번뜩이며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그녀는 앞으로 이어질 연구 개발 과정 일체에서 주술 회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자는 주의였다.
주술 회로와 주문 회로는 모두 마법 회로의 하위 분류였는데, 그 차이점은 마법이 발현되는 원리가 모두 명백히 밝혀졌느냐 밝혀지지 않았느냐로 나뉜다.
원리가 밝혀지지 않고 그냥 술사의 재능과 노력, 감각에 의존해서 새겨야 하는 게 주술 회로였고, 원리가 완전히 밝혀져서 마법사라면 누구나 새길 수 있는 게 주문 회로였다.
그리고 세레라지에는 마법사들의 장인화를 누구보다 경계했으니, 술사 한 명 한 명이 최대한 대접 받을 수 있는 주술 회로를 좋아했다.
“말한 대로 마법이란 신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는 일은 신비를 밝혀내고 분석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해하지도 못하고 설명하지도 못하는 걸 그냥 ‘오 되네.’하고 쓰는 게 마법사답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커스가 검은 의안이 튀어나올 듯 포효했다.
그는 애초에 스스로를 마법사가 아니라 마도공학자라고 설명했고, 기계 기사와 마총 사수 부대 모두 양산된 장비로 무장시켰다.
침식자와 옛것, 이물과 마경이 점점 늘어날 미래를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언제든 마도구를 양산할 수 있는 체계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모든 마도구에 이미 원리가 밝혀진 주문 회로만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마법사들이 제 재능 이상의 주문을 억지로 새기다가, 정신 오염으로 침식된다는 걸 모르니?”
“마차 사고가 무서우니 걸어 다니겠다고 하십시오. 결국 가야 할 길입니다. 왜 이리 장인화를 경계합니까? 싸움꾼이 아니라 연구자로서 더 큰 가치를 가지게 해줄 방법입니다.”
그러니.
마법사의 장인화라면 치를 떠는 세레라지에와.
마법사를 장인화 하기 위해 노력해온 마커스는.
이렇게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회귀 전에 허무하게 죽은 둘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은 걸로도 크게 만족했다.
이 다툼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고, 나름의 해결책도 만들어놓았다.
나는 헛기침하며 둘의 시선을 모았다.
색이 다른 두 눈과 재질이 다른 두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우리가 벌써 4월이 다 되어 가잖아?”
벚꽃이 만개한 4월이었다.
공방을 짓고 제자들을 뽑으니 겨울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몇 달간 연구를 시작하지도 않았어.”
“……어쩔 수 없잖니.”
“사실 마법 연구라는 게 원래 성과가 나려면 몇 년에서 몇십 년은 필요합니다만.”
“그래도 시작은 해야 해. 황제 폐하가 왜 내가 땅 가지고 장난치는 걸 봐주셨을 거 같아? 둘이 만나서 생길 시너지를 기대하셨기 때문이야.”
“…….”
“이 공방도 다 죽은 사람 땅 빼돌려다 지은 거 알잖아. ……물론 최대한 무연고자들 우선으로 골랐지만, 빼돌린 건 빼돌린 거라고. 그럼 최소한 너희 희생 덕에 이런 걸 만들었다, 할 만한 건 나와야지. 안 그래?”
“미안하구나.”
“둘이 의견이 다른 건 차차 조율해 가자. 앞으로 연구 방향은 누나가 순수 기술을 개발하면, 마커스가 상품화하고 도구화하는 쪽으로 가자고.”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새침하니 웃고 있었지만, 그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순수 기술이 그녀의 소유인 이상, 모든 술식을 주술 회로로 짤 생각이겠지.
물론 마커스 역시 웃고 있었다.
색이 미묘하게 다른 검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뭘 가져오든 모두 해석해서 공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린 눈빛이었다.
난 다음 발자국을 제시하며 말을 맺었다.
“일단 기술 교류부터 하면 좋겠네. 서로 뭘 할 수 있는지 알아야 그거에 맞춰서 갈 수 있을 거 아니야?”
* * *
“비켜주세요! 위험합니다!”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 행차시다! 모두 물러나라!”
세레라지에의 두 상급제자, 로레인과 투피올이 끝도 없이 짐을 날라 왔다.
세레라지에에게 주어진 황립 마도 공방 안에 쌓여있던 거의 모든 연구자료였다.
그녀는 마커스를 앞에 앉혀 두고 자료를 한 권 한 권 펼쳤다.
“이게 내가 개발한 전격 술식이잖니. 각각 ‘침투’와 ‘확산’이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은 천재 중의 천재들이었다.
세레라지에는 오랜만에 전공용어를 잔뜩 써 가며 수다를 떨었고, 마커스는 그 모든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대지 마법과 함께 사용한다고 생각해 보면…… 이제 마갑에서 전격 그물을 발사하기 위해 극세 은철사 그물을 수납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럼 이 부분을 통째로 들어낼 수 있고, 그 공간에 대지 주문 ‘강철의 속박’ 회로를 새겨서 즉석에서 그물을 생성하면 되겠군요. 장탄수 제한도 꽤 완화될 겁니다.”
“생성은 이 부분을 참고해보는 게 어떠니? 용찬 한 동생 놈 몸뚱이 치료해주려다 개발한 건데, 물질화와 마나화란다.”
“약간만 손보면 바로 이용할 수 있겠네요. 아니, 그냥 이대로 응용해도…….”
기계 기사들의 마갑에 몇 가지 기능이 더해졌다.
예전과 달리 전격 그물 등 몇 가지 주문을 사용하는 게 훨씬 빨라지고 다채로워졌다.
빈 부분에는 새로운 기능을 넣거나 강도를 강화하는 마법진을 새겼다.
“불꽃을 이용한 정화란다. 동생 놈이 하는 거 보고 술식으로 만들어 봤는데, 이걸 이용하면 침식 저항을 올릴 수 있잖니.”
“……어마어마한 발견입니다. 이걸 연구하고 있다는 건 한동안 둘, 아니. 셋만 알고 있지요. 교회에 의지하지 않고 침식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말이 통해서 좋구나.”
“일단 기사들의 마갑과 마총 부대의 마갑에 바로 적용하겠습니다. 무기가 강한 만큼 그들이 침식되었을 때 위험도 올라가니까요.”
지난 사태 때 생겨난 신기술도 공유했고,
“마경을 열거나 닫는 공간 계열은 파괴술과 전격의 합작이란다. 전격 쪽은 내가 완벽히 이해하고 있지만, 파괴술 쪽은 네가 났겠구나.”
“제품화하려면 어쩔 수 없이 주문 제작이 들어가야 하는 부분도 있겠습니다.”
“공통분모를 찾아보는 건 어떠니? 옛것인 이상, 그리고 마경인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핵심적인 부분만 골라내서 피해를 준다고 가정하면…….”
자연스럽게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집에 가고 싶어요.”
“이번 주에 몇 시간 잤어?”
“넌 아직도 단위가 시간이야? 난 분인데.”
“아니. 세레라지에 전하는 졸리다는 게 뭔지 모르시나?”
“커피 더 먹을 사람?”
“나. 샷 열두 번 추가해서.”
나와 루디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제자들과 조수들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확인했다.
나는 나름 익숙한 광경이었으니 말없이 샌드위치와 활력의 마법약을 돌렸다.
“좀 주무셨어요?”
루디가 한 조수를 붙들고 물었다.
“아아. 루디 각하. 또 뵙네요. 그때 뒤로 안 잤어요.”
조수가 실실 웃으며 답했다.
“네? 저 사흘 전에 왔는데요? 그때도 이틀은 밤새웠다고 하셨잖아요?”
“원래. 시안 다 나오기 전에는 못 자요. 이제 열두 개 남았는데, 아. 저쪽에서 루디 각하 찾으시던데, 바로 가주실 수 있으신가요? 마총 관련해서 뭐 한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