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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총을 개량한다면 강화 회로를 새긴 쇠뇌보다 나은 게 두 개는 있어야 해요. 저는 그 첫 번째가 무게, 두 번째는 장탄수와 연사력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제 마총 카스파도 황실 기사 갑옷 정도 되는 수준의 갑옷은 못 뚫거든요. 이게 상아탑에서도 최상위급 화력의 마총인데도 말이에요. 마총이 처음 나왔을 때는 갑옷이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어지간한 침식자 몸뚱이는 박살 낼 수 있지만, 무장을 잘 갖춘 정예병이나 거대 개체를 상대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어요. 한 발 한 발의 위력을 신경 쓰기보다는, 더 많은 탄환을 퍼부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루디는 해맑게 웃으며, 그 웃음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내뱉었다.
“가, 감사합니다. 루디 각하의 말씀대로 개량해 나가겠습니다.”
담당 조수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주군 마커스가 눈독 들였던 소문의 시녀 사수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훨씬 억척스럽거나 앙칼진 인상일 줄 알았는데.’
루디는 풍성한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하얀 머리띠를 썼으며, 큰 녹색 눈동자를 더 크게 보이게 하는 ‘야간 투시의 사점 안경’을 썼다.
하얀 레이스가 화려하게 붙은 고급 블라우스 위로 검고 빳빳한 천으로 만든 원피스를 걸쳤고,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단화를 신었다.
상냥하고도 활기찬 웃음만 보자면, 결투광 시녀니, 암살자 시녀니 하는 소문은 모두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퍼트린 헛소문 같았다.
“이쪽으로 오셔서 시험 사격해 보시면 됩니다. 마갑 착용을 염두에 둔 물건이라 조금 크고 무거우실 수도 있지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조수는 루디를 연무장 쪽에 새워진 사격장으로 안내했다.
루디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가던 중, 벽과 바닥에서 주문 회로가 빛나고,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에에에엥!
“왜, 왜 이러죠?”
루디가 당황하며 한 걸음 물러나고, 조수는 당황하며 제자들을 시켜 감지기를 끄게 했다.
“이게 마법 무기 탐지기거든요. 혹시 마총 가지고 들어오신 거 있으세요?”
“마총은 아니고…… 아. 네. 있네요. 여기 두고 들어갈게요.”
빳빳한 검은 원피스 안에서 마법 소검 생동 두 자루가 쑥 튀어나왔다.
“어, 어? 그게 대체 왜? 아니. 어디서 그런 소검이 튀어나오는 겁니까?”
조수는 눈을 보름달처럼 키웠고, 루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비밀이에요.”
마커스의 마총 사수 부대 역시, 근력 강화 주문이 새겨진 마갑을 입는 게 전재였다.
따라서 마커스의 마총은 권총형이라도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무거웠다.
타아앙! 타아앙! 타아앙!
루디는 그걸 몇 번 쏴 보더니, 상냥한 눈웃음이 어려 있던 눈매를 찌푸렸다.
“아…….”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일순 어린 서늘한 기운에, 조수는 남몰래 전율했다.
“세레라지에 전하하고 마커스 각하 모두 불러 주시겠어요?”
“예, 예.”
고깔모자 쓴 마법사와 의안 찬 마도 공학자가 도착하고, 시녀 사수는 철혈당주의 발명품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게 권총일 필요가 없어요.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무조건 장총 형태로 만들어 주세요. 그게 위력도 정확도도 사정거리도 훨씬 올라가요.”
마커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장전 속도가 너무 느려지지 않겠습니까? 은폐성도 떨어지고요.”
그러나 시녀 사수는 그녀 나름의 전문성에 긍지를 가지고 말했다.
“어차피 마총 장전은 느려요. 각하의 마총 부대는 부대잖아요. 순차 사격을 해도 되고, 상하쌍대로 만들어도 되고, 리볼버 형태를 이용해도 돼요. 산탄도 있고요. 중요한 건 화력과 거리를 확보하는 거예요.”
“…….”
마커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손뼉을 쳤고, 가볍게 히죽거리며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 기술을 얼마나 공유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세레라지에는 마총이 최대한 퍼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주문 회로를 그리다 침식된 마법사, 마총 든 암살자에게 등을 맞아 허무하게 죽은 마법사의 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리볼버 구조를 이용하는 게 좋겠구나. 크기도 확실히 키워서 술식도 빼곡하게 새기고. 그럼 탄은 그냥 쇳덩이나 납덩이를 써도 되겠지.”
다행히 그녀는 이 무기의 발전에 기여 또는 간섭할 수 있는 위치였고, 적어도 은폐성만큼은 없앨 수 있었다.
그렇게 발렌시아누스 휘하 정예 마총 사수 부대가 쓰게 될 대형 마총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 * *
발렌시아누스는 온종일 공방에서 머물렀고, 텐티아 역시 그리하게 되었다.
명예로운 기사 나리인 텐티아가 회로를 그리며 죽어가는 마법사들과 같이 섞여 있을 수는 없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기계 갑옷을 입는 기사들을 찾아갔다.
“…….”
“……!”
둘의 만남은 썩 좋지 않았다.
마커스가 수도에 온 날, 알베토스와 텐티아가 서로를 썰어버릴 기세로 부딪힌 게 시작이었다.
“후! 후! 후! 후!”
“힘줘! 더!”
“적기사에게 질 셈이냐?”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같은 기사였고, 칼로 번 빵과 고기를 먹고 사는 자들이었으며, 용병과 모험가들이 진작 버린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발렌시아누스의 종합 공방에서는 모순적인 그림이 자주 그려졌다.
공방과 탑에서는 매일같이 최고의 지성들이 복잡한 술식을 그리며 갈려 나갔고, 기사 연무장과 식당에서는 매일같이 최고의 기사들이 단순 무식하게 팔씨름으로 힘을 겨루었다.
“아…… 또 졌군.”
“이번에는 나다. 패자는 비키도록!”
“으하하하! 이 텐티아에게 도전하려면 갑옷 입고 줄 오르기 훈련을 연속으로 쉰 번은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노익장은 존중하겠으나, 힘으로 내게 도전하겠단 말이오?”
“우리 기계 기사들의 갑옷은 백금 기사들의 갑옷보다 여섯 배는 무겁지. 나는 아직 그 갑옷을 입고 등반 훈련을 한다네. 젊은이.”
붉은 머리의 기사와 백발이 섞이기 시작한 중년인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았다.
‘강하군.’
‘강하다.’
둘은 상대의 손바닥에 굳은살이 방패처럼 박혀 있음을 느꼈고, 시작 소리와 동시에 온 힘을 다했다.
텐티아의 얼굴에 핏줄이 솟고, 중년인의 목에 힘줄이 솟았다.
끼이이익!
테이블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비명을 지르고, 텐티아가 조금씩 미소를 지었다.
“하!”
쾅!
마침내 텐티아의 손이 중년인의 손을 내리눌렀다.
“벌주는 맥주 한 잔이오!”
중년인은 식당 주인이 내온 잔을 보고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은 이 잔에서 목욕도 할 수 있을 것 같군.”
맥주잔과 우유 잔이 비워지고, 어마어마한 구운 고기, 끓인 고기, 훈제한 고기가 뱃속으로 사라졌으며, 훈련장에서는 끝없이 증기가 피어올랐다.
텐티아는 마커스 휘하였던 기사들과 함께 검을 휘둘렀고, 마커스 휘하였던 기사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치이이익!
기계 갑옷을 입은 기사가 어깨에서 증기를 뿜으며 달려들면, 텐티아라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무시무시한 힘이군!”
하지만 갑옷을 벗고 하는 단련에서는 텐티아가 기계 기사들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니? 이것도 못 하는가?”
“우, 우리는 명상 수련을 통한 마나 훈련에 집중했단 말이오.”
“근력은 갑주가 증폭시켜 주니 그쪽이 효율적이지.”
“지성과 무력을 겸비했다고 말해 주시오.”
텐티아는 늠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조소를 띄우며 말했다.
“내 기꺼이 이해해 주겠소이다.”
“!”
기계 기사들의 눈이 돌아가고, 텐티아는 그들에게 제국 검술식 마나 단련법을 전수했다.
‘기계 갑옷의 힘과 제국 검술의 폭발력, 지속력이 더해지면 어찌 될지 나도 궁금하군.’
그걸 함께 알아갈 수 있는 게 텐티아의 축복이었다.
* * *
어느 날, 발렌시아누스가 그녀를 불렀다.
“경. 이리 와서 이것 좀 입어 보게나.”
“세상에.”
텐티아는 하얀 바탕에 웅장한 붉은 무늬가 들어간 기계 갑옷을 올려다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인체 구조를 닮은 골격 위로 복잡한 톱니와 체인이 자리 잡았고, 웅장하리만큼 거대한 철판이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내한, 내열, 방전, 방독, 방진, 시야 확장, 수중 빙결 등 기사 갑옷에 들어가는 방어-보조 마법 회로는 모두 새겨져 있었지만, 공격용 주문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는 씩 웃으며 그 갑옷을 가리켰다.
하얀 눈썹과 노란 눈이 멋들어진 호선을 그렸다.
“경 것일세.”
세레라지에와 마커스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건들건들 걸어 나와 그들의 역작을 소개했다.
“6서클 마법과 오러 블레이드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설계했단다. 마나 증폭 마법진을 몇 개나 박아넣었는지 모르겠구나.”
“몇 배로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거인이 되는 기분을 느껴 보시지요.”
텐티아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기계 갑옷을 입었다.
치이이익!
톱니바퀴가 맞물리고, 금속 벨트가 몸을 조였으며, 체인이 돌아갔다.
입다, 와 타다, 의 중간에 선 느낌이었는데, 시야가 적어도 30cm는 높아진 듯했다.
‘마나 운용도 훨씬 편해졌다.’
마도구에 새겨진 회로가 마나의 운용에 영향을 주기에, 기사 중에는 공격용 마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자가 여럿이었다.
검에 집착하는 검객 중에는 아예 갑옷도 입지 않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갑옷은 마치 몸이 커지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마나를 받아들이고 또 돌려주었다.
‘수백 개의 회로가 그려져 있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레라지에가 새침하니 웃었다.
“내가 생체 전류를 증폭해 감각 자체를 확장하는 술식을 만들었고, 마커스가 인체 근육 구조를 이용해서 골격과 피스톤 구조를 설계했잖니. 근력 증폭이 회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단다.”
텐티아는 환희하며 발렌시아누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하. 더 헌신할 수 있어 기쁠 따름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무언가를 받는 건 언제나 감동적인 일이었고, 광기의 천재 둘이 합심해 만든 갑옷은 그 자체만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이 갑옷을 입기 위해서라면 왼손도 내줄 기사들이 줄을 섰을 거다.’
발렌시아누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좋아하니 나도 좋군. 이제 시작일 뿐이네. 더 강해져야지. 나도, 경도.”
그는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격장에서 정예 사수들이 루디와 함께 마총을 쏘고 있었고, 연무장에서는 기계 기사들이 개량된 주문 회로에 적응하는 훈련을 마쳐 갔다.
“훨씬 빨라졌군.”
“전격 그물의 장탄수 제한도 사라졌고, 화염 방사 속도와 사정거리 모두 올랐습니다.”
“투구 쪽에는 침식 저항 술식도 추가되었군요.”
세레라지에와 마커스의 대립도 일단락되었고, 제자들과 조수들은 이미 두 사람 밑에서 동화되었다.
아직 기계 기사들도 마총 부대도 그보다는 마커스를 더 따랐지만, 이건 시간과 돈이 해결해줄 일이었다.
‘이만하면 사병으로는 충분한 병력이다.’
“루디. 폐하께 알현 요청 좀 넣어 주라.”
겨울부터 공방에만 집중했고, 지금은 초여름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었다.
* * *
“그대여. 작년 그대의 영지에서 올라온 순수익이다.”
제이릴리스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기계 기사들을 회유하고, 니벨룽겐과 종합 공방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이건 황실 직영 상단에서 그레모리우스의 광물을 수입하며 얻은 순이익의 그대 몫이다.”
그 역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두 종이를 공손하게 받아 품속에 넣었다.
온갖 보석이 화려하게 박힌 브로치와 금장 장식이 하얀 제복 위에서 번쩍번쩍 빛났다.
제이릴리스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찌 된 게 그대가 짐보다 보석을 많이 단 듯하구나. 짐은 고작 이 브로치 하나만 사용하고 있거늘. 지난 몇 달간 보석을 모은 것인가?”
발렌시아누스는 눈을 부릅뜨며 과장된 어조로 고개를 저었다.
“마도구 개발 중 마나 수용량이 한계를 넘어 시약으로서 완전히 소모된 보석을 재활용했을 뿐이옵니다. 황실의 재정이 어려운 이 시기에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황제는 흡족하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조금 사치해도 좋음이야.”
그리고 나른하니 뜨고 있던 노란 눈을 번뜩이며 본론을 꺼냈다.
“사병이…… 준비되었는가?”
이례적으로 망설임이 어린 어조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거침없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제 폐하께서는 어떠한 오탁도 저지르실 필요가 없을 것이옵니다. 부디, 성군이 되십시오.”
제이릴리스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정말로 짐을 약하게 만들어. ……그 다섯 달 동안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았나?”
“제 황제는 폐하뿐입니다.”
죽어도, 죽은 후에도.
발렌시아누스의 얼굴에는 비인간적인 각오가 어려 있었고, 제이릴리스는 더없이 인간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대가 짐을 위해 칼춤을 추겠다면, 그 충정 기쁘게 이용해 주겠노라.”
* * *
다음날 황제 제이릴리스는 포고를 내렸다.
발렌시아누스가 그녀의 이름으로 발행했던 국채와 어음을 모두 무효화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