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30)화 (230/340)

(230)

자한(xahan) 동맹.

그들은 상인 귀족이라 불렸고,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자한 동맹은 천 년도 전부터, 인류가 이종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을 때부터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물자를 공급했고.

지금도 제국의 육상 수송망 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들의 영지는 제국 서남쪽에 모여 있지만, 그 땅뙈기는 그들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언제든 불타고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천 년간 살아남았지. 우리의 불멸성은 신뢰와 계약에 있어.’

‘우리는 상인이다.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자.’

꾸준한 거래로 신뢰를 쌓아 올린 상단의 이름이 곧 가문이었고.

대륙 전체에 퍼진 지부와 창고, 항구의 지분이 곧 영지였으며.

수천수만의 용병과 모험가들이 그들의 군대였다.

그들은 착실하게 제국과 여러 왕국, 심지어 바다 건너 동방 대륙까지 그들의 색으로 물들여 왔다.

“제국 궁정 귀족들이 보유한 187개 상단 중 자한 동맹의 지분이 총 61%에 달합니다.”

“암묵적으로 경영권을 건드리지 않고 투자만 반복하며 지분을 늘린 뒤, 해당 가문과 적대 가문을 충동질해 해당 가문의 힘을 빼놓고, 그때 달려들어 상단을 사실상 빼앗습니다.”

“이렇게 제국 궁정 귀족의 이름 아래 숨어있는 자한 동맹 상단이, 수도에만 40개가 넘습니다. 지난 사태를 기점으로 그 세가 급성장했으니, 이제는 세는 게 무의미할 지경입니다.”

“이대로 제국의 물자와 수송을 그들에게 빼앗기면 안 됩니다.”

“폐하께서 마경 안에서 분투하시는 동안 제국의 국채와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어음을 모두 사들인 게 그들입니다.”

제이릴리스와 발렌시아누스는 지난겨울에 이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오늘을 기다렸다.

“해당 기간 발행된 채권과 어음을 모두 무효화하노라.”

이미 제국 신민과 귀족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음을 모두 자한 동맹에게 판 지 오래였다.

정확히는 자한 동맹이 웃돈까지 줘 가며 그 어음을 사들인 거였다.

동맹은 그 어음으로 황실을 압박하려 했으니.

‘관세 인하를 받아내고야 말겠다. 제국 경제를 완전히 잠식해야 해.’

이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소리였다.

“폐하를 뵙게 해주시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제국의 신용도가 급락할 겁니다!”

수도에 머물고 있던 자한 동맹 상인 귀족과 지부장들, 그들의 투자를 받은 부르주아들과 황실 의회 의원들이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미친 듯 황궁으로 달려와 무작정 알현을 청했다.

무위 높은 백금 기사와 근위병들도 그들을 막아서지 않았다.

이는 제이릴리스의 명령에 따른 일이었지만, 분노로 눈이 돌아간 부호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솔레타라스시여! 대체 어찌하여 이런 무도한 결정을 내리셨단 말이옵니까?”

자한의 상인 귀족 호셀론이 앞장섰다.

그는 자한의 최고 명가 40개 안에 드는 유명한 가문의 가주였다.

“황제 폐하의 말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겁사옵니다. 저희는 제국과 황실을 믿고 어음을 받았으며, 충실히 밀가루와 고기, 담요와 약을 납품 했사옵니다. 한데 어찌 저희를 이리 배신하실 수 있단 말씀이시옵니까?”

제이릴리스는 얼굴에 베일을 두르고 있었고, 그녀 옆에는 재무관 하드리탄이 서 있었다.

하드리탄은 파란 눈을 번들거리며 호셀론을 쏘아보았다.

‘평소의 두 배도 아니고, 열 배를 받아 처먹은 개자식이.’

호셀론은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치고, 다시 한번 제이릴리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황실이 저희를 이리 대하신다면, 저희가 어찌 앞으로 황실과 거래를 할 수 있겠사옵니까?”

“…….”

평소의 제이릴리스라면 알현조차 받아 들여주지 않았을 자였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제이릴리스의 이름에 한 점의 오점도 남기를 원치 않았고, 소녀 폭군은 제 오빠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황제의 서늘한 음성이 천장 높은 알현실 전체에 울렸다.

“짐이 발행한 어음도 아닌데, 어찌하여 짐이 값을 치러야 하는가?”

“폐하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 발행한 어음이옵니다.”

“짐은 그자를 엄히 벌했고, 기사총감에서 해임했으며, 지난 6달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그대는 그대의 아들이나 부인이 그대의 이름으로 어음을 발행한다면, 그 값을 치르는가?”

“폐하. 저희는 황실을 믿었사옵니다.”

“그리하여 짐이 알현이라도 받아 주는 것이다. 정 금화 한 닢이라도 가져가야겠다면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찾아가도록. 배움의 거리 쪽 공방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제이릴리스는 그대로 퇴궐했고, 호셀론은 치솟아 오르는 혈압에 목덜미를 잡았다.

“저, 저 어린 게 감히-”.

“당장 발렌시아누스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 비공정이라도 빼앗아야지요!”

* * *

이는 호셀론과 이 일파에게 있어 순수한 악재만은 아니었다.

어음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지만,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쌓아 올린 재산은 그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황족으로서의 권리와 여러 지분을 가진 만큼 오히려 좋은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레모리우스의 광산에도 개입할 수 있겠어.’

‘부동산을 여럿 가지고 있다지. 오히려 잘됐군. 수도에 더더욱 깊숙하게 뿌리를 내릴 기회다.’

‘놈이 받은 인스트로멘툼 영지를 다 먹어 치워 주마. 영민은 잡아가 남방 대륙에 팔아넘기고 광산을 뿌리까지 파내버려야지.’

사실상 황제가 허락한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황제. 혈육 하나를 내주고 빚을 퉁 칠 생각인 듯하군.’

호셀론과 상인 귀족들은 호기롭게 사병들과 고위 용병들, A급 모험가들을 불러 모았다.

“자. 가지.”

그러나 제국 수도의 부르주아들은 의외로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저희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뭔가,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가 그를 노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합니다.”

그들은 지난겨울 호셀론의 사주를 받고 발렌시아누스를 칭송하는 목소리를 퍼뜨려, 발렌시아누스와 제이릴리스를 이간질하려 했던 자들이었다.

공방장, 상단주, 부르주아들은 발렌시아누스가 우쭐해질 줄 알았지만, 발렌시아누스는 되레 그들이 먹으려 눈독 들이던 땅을 죄다 먹어 치워 버렸다.

그건 분명히 경고였다.

그들은 황족, 귀족과 대립해온 만큼,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미워할지언정 얕보지는 않는다.

제 기분을 정의 삼아 사는 자들이 강하기까지 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호셀론은 수도 부르주아의 반항을 아주 가볍게 진압했다.

“흐음. 그럼 자네들의 상단과 건물, 창고와 배, 저택과 짐마차를 압수해야겠군.”

상단과 시장, 창고는 선착장 근처에 몰려 있었고, 그곳은 가장 처참하게 부서졌다.

수도 부르주아들이 지금 부르주아로 살 수 있는 건 호셀론의 투자 덕이었다.

호셀론은 어깨를 늘어뜨리는 그들을 뒤로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돌렸다.

‘어차피 사실상 내 상단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경영에도 개입할 수 있겠군. 먼저 곡물 시장부터 공략해 볼까?’

다른 자한 동맹 귀족들도 희망찬 꿈을 꾸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강력한 마법사라지. 그래 봐야 몸은 허약한 마법사야. 사병 좀 거느리고 있다고 기세등등하던 모양인데, 오늘 인생의 쓴맛을 보여줘야겠군.’

‘부모 잘 만나서 황족이 되고, 쌍둥이 잘 만나서 황형이 된 어리석은 놈이겠지. 내 부하들은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께 인생이 실전임을 알려 드려라!”

호셀론이 호기롭게 외치고, 수백의 용병과 모험가가 대로를 달려 종합 공방으로 달려들었다.

초여름답지 않게 흐린 날이었고, 길가에서 행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와아아아!”

“으하하하!”

“가자!”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높은 담도 그들의 기세 앞에서는 단숨에 무너질 듯했다.

끼이이익!

그때 종합 공방의 철문이 열렸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섬뜩하게 울리고, 지면이 흔들렸다.

“…….”

“……!”

미친 듯 달려가던 용병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췄고, 모험가들 역시 마굴에 들어간 듯 긴장하며 눈빛을 교환했다.

사아아아-.

종합 공방 정문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호셀론은 아직 발렌시아누스를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소문의 망나니임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약이라도 한 듯 불길하게 일렁이는 노란 눈빛과 경박하게 넘긴 백발.

사치스럽다는 풍문을 증명하는 화려한 하얀 정장과 붉은 띠, 보석 장신구.

반투명하게 비치는 하얀 장갑에서 느껴지는 비인간적인 기운까지.

“대공 전하! 빚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호셀론은 한 걸음 나서며 양팔을 벌렸고, 발렌시아누스는 그를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빚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전하께서 발행하신 어음 말입니다. 금화로 총 38만 4천 닢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흐린 하늘을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

“예?”

“나도, 자네도 같은 생각이었을 거야.”

“잡아-”.

“그러니, 날 마음껏 원망해도 좋아!”

타아앙!

마총 소리가 거리에 울렸다.

호셀론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가고, 대로에 붉은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마총 사수 부대가 담 너머에서 일제히 일어서며 마총을 겨누었고, 기계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발렌시아누스를 지나치며 달려 나왔다.

쿵!

선두에 선 건 다른 기계 기사들보다도 더 거대한 기계 갑옷을 두른 기사였다.

쿵!

용병 중에는 하얀 바탕에 붉은 무늬로 장식한 그 갑옷을 알아보는 자들이 몇몇 있었다.

“저, 적기사!”

“적기사?”

“아직도 저 망나니를 섬긴다고?”

츠카아악!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기계 기사의 대검에 어리고, 일격에 용병과 모험가 네 명이 바닥을 굴렀다.

* * *

텐티아와 기계 기사들에게 그 싸움은 도살에 가까웠다.

치이이익!

기술을 쓸 것도 없었다.

주먹을 한 번씩 내지르면 상대가 바닥을 굴렀고, 검 한 번 베어 올리면 상대가 반으로 잘려 나갔다.

자한 동맹의 용병과 모험가들도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싸워라!”

“우리를 다 죽일 생각이다! 도망치지 마!”

“나리들을 모셔라!”

최소 소드 유저였고, 소드 엑스퍼트의 벽에 부딪힌 자들도 여럿이었다.

제국 외 나라에서는 기사로 서임 받기에 충분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제국은 ‘기사’의 벽이 하늘처럼 높은 나라였다.

텐티아도, 기계 기사들도 진작 소드 엑스퍼트의 벽을 깬 자들이었다.

사악!

붉은색, 푸른색, 주황색, 각기 각색의 마나 블레이드가 춤을 추면.

쨍그랑!

소드 유저들의 검은 그대로 부러졌고.

“어?”

몸뚱이도 함께 잘려 나갔다.

“이익!”

어찌어찌 수적 우세를 살려 뒤를 잡아도.

캉!

“젠장!”

그들의 무기는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적어도 8백 명은 넘을 용병들이 기사 열댓을 당해내지 못했다.

“항복! 항복하겠소!”

“그만! 자한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음을 80%만 받겠습니다. 아니, 50%!”

자한 동맹 상인들이 앞다투어 양손을 들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마총 사수 부대에 신호했다.

그들 역시 마갑을 입고 있었고, 거대한 마총을 들고 있었다.

철거덕!

백 명의 사수가 백 발의 산탄을 장전하는 소리가 썩 유쾌했다.

나는 소문처럼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한 동맹 상인들을 바라보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어야지.”

대화는 서로 비슷한 세력을 이룬 사람들끼리 하는 거였다.

외교에서 제일 중요한 건 상대가 몇 명의 소드 엑스퍼트를 데리고 있느냐였다.

“집에 개미가 들어와 저들이 해충을 잡아먹겠다고 하면, 마법 약으로 개미와 벌레를 다 죽여야 하지.”

나는 저 기생충 같은 자들을 쓸어버릴 생각에 몹시 들뜨는 동시에, 가슴 한쪽이 아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가만히 놔두면 기둥뿌리까지 갉아 먹히거든.”

저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지켜야 할 상단과 직원들이 있겠지.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누굴 상대로 잔머리를 굴려!”

그들을 지킬 정도로만 부과 힘을 쌓았으면 좋았잖아.

세 배 정도만 불렀어도 차근차근 갚아줄 생각이었어.

그러니까 이건 다 너희가 자초한 일이야.

나는 단호하게 손을 내렸고, 백 명의 마총 사수가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퍼어엉! 퍼어엉! 퍼어엉!

한 발의 산탄이 곧 백 개도 넘는 쇠구슬로 화하고, 눈부신 불꽃의 비가 판석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수만 발의 산탄이 모험가와 용병, 상인들을 사정없이 두드렸고, 그들은 피를 흘리며 바닥을 굴렀다.

“아아아악!”

“끄으으윽!”

소드 유저급 용병 중에는 즉사를 면한 자들도 많았고, 기계 기사들은 기꺼이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푹!

툭, 툭.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쏴아아아-!

이내 여름비가 쏟아지고, 대로가 새빨간 피로 흥건히 물들었다.

마총 사수들이 시체를 모두 공방 안으로 옮겼다.

죄다 지하수로로 떠내려 보내 슬라임 식사로 줄 생각이었다.

나는 붉게 물든 대로에 핏물이 번지는 걸 한동안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재산은 모두 압수하도록. 황실에 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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