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32)화 (232/340)

(232)

제이릴리스는 너무나 쉽게 허락을 내주었다.

오해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헬레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폐하.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즉석에서 명령서를 하나 쓴 다음 인장 반지로 도장을 찍어 내밀었다,

“편제의 편의상 황동기사단 밑에 그대로 배속시키겠지만, 지휘권과 인사권은 그대와 짐만이 가지노라.”

“단, 헬레나 그대의 신병에 문제가 생겨 부대를 지휘할 수 없는 상황에는 황동기사단장이 임의로 기사 장교를 배치할 수 있게 하겠다.”

“그러나 부대를 해체하거나, 부대원을 다른 부대로 전속시킬 권한은 오직 그대와 짐만이 가진다. 이만하면 충분한가?”

헬레나가 각 잡힌 경례를 올렸다.

“예! 폐하! 밤낮으로 조련해 최강의 부대를 만들겠습니다!”

“밤에는 재워주거라. 하하.”

나는 제이릴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

황족을 그렇게 경계하던 제이릴리스답지 않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명령서를 껴안고 희희낙락하는 헬레나를 뒤로 한 채, 오만하고 나른하게 웃었다.

“왜 그러는가. 그대여.”

나는 뭔가 어색한 기분으로 말했다.

“이, 이렇게 쉽게 허락해주실 줄 몰랐사옵니다.”

“인가받고 싶어서 온 게 아닌가? 인가해 줬는데 무엇이 문제더냐?”

“한참 검증하실 줄 알고, 정예 상비군 구축의 이점과 단점에 관한 논문을 10편쯤 읽고 정리해 왔단 말이옵니다. 그 시간과 노력이 억울할 지경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관절 반지 낀 손가락을 달각였다.

“짐도 지금껏 황동기사단의 상비군 증설 요구를 여러 번 받아왔노라. 모르기는 몰라도 짐 역시 그대가 읽었을 논문을 여러 번 읽어 보았을 거야. 소수정예의 기사가 최강인 시대지만, 기사만으로 모든 걸 할 수는 없음도 알고 있노라.”

그녀가 또한, 하고 운을 떼며 말을 이었다.

“헬레나 대공은 짐이 마경 너머에 있던 동안 수백의 중부 기사와 수만의 정병을 지휘했지. 그동안 수상한 움직임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대가 그녀를 내버려 두었을 테고.”

나는 흠칫했고, 제이릴리스는 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웃었다.

그녀 말대로, 난 알게 모르게 헬레나를 주시해 왔다.

제이릴리스가 돌아오기 전, 헬레나가 중부 기사들을 이끌고 반역을 시도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짐이 바빠도 대여섯 정도의 침식은 직접 처리해줄 수 있고, 황족으로서의 야욕은 그녀 스스로 다스릴 줄 알게 된 듯하니, 짐이 그녀 같은 인재를 등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음이야.”

병사들을 훈련하고 자신을 단련하는 걸 진심으로 즐기는 지휘관은 확실히 흔치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이릴리스가 헬레나를 등용할 만도 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일부터 텐티아 경과 함께 징집을 시작해야겠다 생각했다.

“또. 그런 믿음도 있어. 오빠가 와서 추천했는데, 어지간히 잘 준비해 왔겠지. 봐봐. 지금도 바싹 긴장해서 할 말만 생각하고 있고.”

그때 낭랑하고 높은 미성이 귓가에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헬레나는 여전히 희희낙락하고 있었고, 제이릴리스는 왜 그러냐는 듯 의뭉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새 그녀는 또 다른 서류를 붙들고 있었다.

제국 서쪽의 정세를 담은 보고서였다.

“그대여. 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런 강렬한 시선은 부담스럽구나.”

“예. 폐하. ……실례했사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여전히 희희낙락하고 있는 헬레나를 끌고 집무실을 나섰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지만, 굳이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 * *

발렌시아누스는 그 길로 텐티아와 함께 배움의 거리로 향했다.

“도망쳐!”

“망나니 대공이 우리를 잡으러 왔다!”

“적기사다! 적기사도 왔다!”

그는 패싸움 현장을 원형의 불길로 둘러싸 생도들을 완전히 가둔 뒤, 근처 건물로 올라가 40년 경력의 행정관료이자 야전 원수의 눈으로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소드 유저는 합격. 파괴술사도 합격. 신학생은 교회에서 뭐라고 할 수도 있겠군. 아쉽지만 불합격. 저 창술사는 무조건 합격. 이번 패싸움에서는 약 200명 중 15명 정도인가?’

그렇게 골라온 인재를 루디에게 말하면.

“루디. 저 긴 칼 든 애, 저 방패 벽 뒤에 숨은 애, 저 짧은 창 두 개 든 애는 꼭 맞춰줘.”

루디는 요란한 형광 물감이 든 말랑한 구슬을 새총에 걸고 쏴 인재에게 표식을 남겼다.

그럼 텐티아가 불길을 헤치고 들어가 인재를 잡아다가 헬레나에게 넘겼다.

“황제 폐하의 군인이 된 걸 몹시 환영하는 바이다!”

“아니, 제가 언제?”

“지금부터 집단 전투 훈련을 시작하겠다!”

헬레나와 황동 기사들은 교도대 업무도 겸했고, 상시 유지되는 정예병단은 황동기사단의 오랜 목표였다.

따라서.

황동 기사들은 자기 휴일도 반납하고 나와 헬레나의 부대 조련을 도와주었다.

“헬레나! 독도법 강의는 내가 하겠다.”

“마법 폭격 대응 훈련은 내가 맡지!”

“혹시 기승 궁술 훈련은 필요 없나?”

헬레나의 부대가 성과를 내야 제이릴리스가 상시 유지 정예병단을 늘려줄 거고, 그건 예산과 권한을 더 받는다는 말이었다.

물론 배움의 거리에서 골목대장으로 살다 끌려와 병사가 된 생도들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여기 식사가 너무 좋은데?”

“월급 봤냐? 학자금 대출 석 달이면 갚겠더라.”

“우리 장비로 마도구 받더라.”

그들은 그냥 소모품이 아니라 정예병이었다.

그렇게 주동자급 생도들이 사라진 배움의 거리에서 패싸움은 한결 잦아들었다.

“살겠습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전하.”

“무탈 하십시오. 전하.”

진과 카탈린, 학생회원들은 발렌시아누스의 그림자만 봐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한번 몸을 움직인 이상 뼛속까지 빨아 먹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었다.

“진. 그래 봐야 결국 미봉책이다. 앞으로도 패싸움은 계속 일어날 거고, 그때마다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야.”

“맞습니다. 전하.”

“결국 공간 자체를 늘려야 해.”

“하지만 배움의 거리는 이제 확장 한계에 달했습니다. 대형 공방들이나 상가 거리에 둘러싸여 있고, 그곳 땅값은 아카데미 수준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위로 높이면 된다. 아직도 건설, 토목 길드 애들은 자재가 썩어나. 죄다 염가로 구해서 공사를 맡길 테니, 여름 방학 안에 끝내 보자.”

진은 파란 눈을 부릅떴고, 발렌시아누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나 발렌시아누스다.”

배움의 거리 쪽 건물 주인들은 이물 사태 당시 너무 많이 죽어 나간 탓에 상속이 꼬였고, 땅 주인은 황가 또는 황가와 아주 가까운 궁정 귀족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을 빙 돌며 하루 만에 공사 허가 서명을 쭉 받아 왔고, 진은 입찰 공고를 냈다.

“이게, 이게 대체.”

그리고 진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은 입찰서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내가 뭐라고 했냐?”

“아니.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고작 이 정도 예산으로도 8층 석조 건물이 나오는 겁니까?”

“거의 원가 아니면 적자일 거다.”

“1층에 생도들을 위한 회의실을 조성하겠다. 궁정 귀족 어르신을 통해 창문세를 면세받고 생도들이 쾌청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 규모를 두 배로 늘리면 아예 강의실까지 건물 안에 지어서 교수님을 바로 초빙해올 수 있게 하겠다…… 는군요.”

아카데미도 사실상 서류상으로만 존재하고, 대부분 학생이 각 교수의 자취방을 돌아가며 이곳저곳 공터에서 강의를 듣는 세상이었다.

몇몇 공용 강의실을 확보하기 위한 교수들의 싸움도 치열했다.

진은 회색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이렇게 해줄 수 있으면서 지금껏 이 상태를 유지해 왔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절박해야 손을 내미는 거지 뭐. 선의의 경쟁인 거야.”

“그럼…… 악의의 경쟁도 있습니까?”

* * *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와 진이 머무는 연합 학생회실로 들어갔다.

“전하. 건설 길드 안에서 장인들끼리 칼부림 나서 셋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차마 말을 잊지 못했는데, 연합 학생회가 긴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아 은화와 금화를 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화로 세 자루 나왔네요.”

“93, 94, 95. 네. 여기까지 금화 95닢입니다. 총 595닢 맞습니다.”

“금괴에 문제없습니다. 감정값으로 은화 세 닢 나갔습니다. 영수증 여기 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자자. 길드 명단 줘 봐. 철명에서 200닢, 목왕에서 300닢.”

텐티아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빠르게 파악했다.

“전하!”

그녀의 주군,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학생회원들에게 뇌물 잘 받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십니까?”

기사의 포효에 학생회원들이 벌벌 떨며 눈치를 보았다.

발렌시아누스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답했다.

“탈 안 나고 주머니 채우는 법, 보복받지 않고 거절하는 법, 들켰을 때 둘러대는 법, 불량한 장인에게 뇌물만 받고 튀는 법, 좋은 장인에게 적당량의 뇌물과 접대받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네.”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니 설득력이 있게 들렸다.

“전하. 아주…… 좋은 거 가르치십니다?”

텐티아는 버벅거렸고, 발렌시아누스는 요망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학생들 돕겠다고 다들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약간의 특권은 누리게 해줘야 하지 않겠나?”

텐티아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이내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

학생회원들은 죄다 상처투성이였다.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생도는 패싸움을 말리던 도중 너무 심하게 다쳐서, 교회에서 치유 기도를 받았는데도 한 번에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워낙 집안 사정이 안 좋은지라, 진이 발렌시아누스에게 받은 활동비가 아니었다면 그 기도조차 못 받을 뻔했다.

“적당히 드십쇼. 적당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장인들이 싸우다 셋이 죽었다는 이야기, 날품 일을 두고 빈민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 상속이 꼬인 배움의 거리 건물들을 먹기 위해 부르주아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루디 백작이 알아 왔습니다.”

“그래. 나중에 고마움을 표해야겠군. 그래도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이미 해결했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말없이 진을 돌아보았고, 진은 일련의 명단 서류를 텐티아에게 내밀었다.

깔끔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머리를 넘긴 소년의 몸짓은 썩 정중했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텐티아는 그 내용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 짓는 건물을 죄다 전하 명의로 하시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첫째로, 그래야 세금을 안 내네. 난 황족이거든. 둘째로, 명의만 내 것이네. 실제 운영은 아카데미 연합회에서 맡아 할 거야.”

텐티아는 잠시 이해가 늦었고, 진은 정중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아직도 연합회에 가입하지 않은 아카데미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건물이 연합회의 재산으로서 조율되기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들어오겠지요. 그럼 모든 아카데미의 회장들이 모여 기숙사, 자취방, 강의실, 그 외 많은 것들을 조율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지겠지요.”

텐티아는 진의 파란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연합회는 졸업 후에도 네가 주도하고.”

“맞습니다.”

“넌 발렌 전하의 충실한 하수인이지.”

“그렇습니다.”

“하.”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는지, 어떤 학생회원도 놀라지 않았다.

텐티아는 옅게 웃으며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았다.

“전하. 참으로 현명하십니다.”

“내 주머니를 채우는 게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럼 오늘 전하가 받은 뇌물은 제 보속을 겸해 교회에 기부 좀 하십시오.”

“아…… 알겠네. 하지만 많이는 못 할 듯해.”

발렌시아누스는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이십니까? 이미 자한 상인들에게 비싼 술 많이 챙기셨잖습니까?”

텐티아는 그가 또 뭘 사려 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옛 빈민가 쪽이 휘청했다고 하는군. 코넬에게 지원이 필요할 듯해. 며칠만 버티면 환수 가능하니 그다음에 기부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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