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33)화 (233/340)

(233)

언젠가부터 수도에는 기묘한 소문 하나가 나돌았다.

‘늘 창문에 커튼을 치고 있는 커다란 사두마차가 하나 있는데, 특이하게도 수도 어디서든 목격된다.’

‘말도 아주 혈통이 좋은 대형 준마고, 마차 역시 최고 공방에서 만든 게 분명한 고급인데, 문장도 깃발도 없다.’

‘그 마차가 나타나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

가학적인 귀족 하나가 혼란을 틈타 다시금 인간 사냥을 즐기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망나니 발렌시아누스가 수도 각지의 애첩들에게 준 마차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흑마법사들이 제물을 납치하기 위한 마차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니까 위장 문장이라도 하나 다세요. 전하.”

코넬은 그 마차 안에서 발렌시아누스와 마주 보고 앉았다.

발렌시아누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문이 나돌 줄은 몰랐네.”

위장용으로 타고 다녔을 뿐인데, 최근 들어 또 출타가 잦아지다 보니 사방에서 나타나는 걸로 보일 만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소문이 아주 틀린 건 아닐지도.”

“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가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물론 순서가 반대기는 하지만, 원래 반대로 뒤집어도 성립되는 논리들이 있잖아.”

“이건…… 그것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듯한데요.”

코넬은 영악한 귀염상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텐티아는 팔꿈치로 발렌시아누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윽.”

“전하. 17살짜리 애 상대로 궤변 늘어놓으면 재미있으십니까? 빨리 정산 이야기나 끝내십시오.”

그녀는 오랜만에 마커스와 세레라지에의 기계 갑옷이 아니라, 백금기사단의 제식 갑옷을 입고 있었다.

외골격에 가까운 기계 갑옷은 너무 무거웠고, 말 네 마리로는 마차가 굴러가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코넬. 재단과 조합을 통해서 기부금을 넉넉하게 넣겠다. 당장 변제일 넘길 정도는 될 거야. 늦가을쯤에 이윤 난 거에서 원금만 돌려다오.”

코넬은 갈색 눈동자를 몇 번 깜빡였고,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거 해결됐어요.”

“응?”

“자한 상인들하고 수도 부르주아 어르신들한테 지분에 따라 배당금을 줘야 해서 재투자 금액이 간당간당했었죠. 그런데 황제 폐하와 어떤 고귀하신 황족 나리 덕에 자한 상인들이 싹 사라지고, 부르주아 어르신들도 배당 지급을 미루는 걸 이해해주셔서. 굳이 전하한테까지 손 벌릴 필요 없어졌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텐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며 근엄하니 읊조렸다.

“아무리 천하의 대악인이라도 본의 아닌 선행을 하기도 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본의로서 선행을 하러 가시지요.”

그녀가 마부를 불러 목적지를 대성당으로 바꿨고, 발렌시아누스는 난처하게 웃으면서도 텐티아를 말리지는 않았다.

코넬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전하. 죽었다 다시 깨어나셔도 순수한 기부를 하실 분은 아니실 듯한데, 어째서 텐티아 경을 말리지 않으시나요?”

발렌시아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교회가 황실의 선 밖에 있는 사람들을 챙겨주고 있는 건 나도 알아. 원래 우리 황족들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해주고 있으니, 돈으로라도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

코넬과 텐티아가 동시에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고,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게 기부를 많이 해 놓으면, 나중에 누가 다쳐서 교회 갔을 때 먼저 치료받을 수 있거든. 그래서 지난 늦여름에 그 사달 났을 때도 부르주아들이 제 가족 먼저 치료한 거고.”

텐티아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뒷목을 잡았고, 코넬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때 너무 많이 죽었어요. 아직도 지하수로에 뭐가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그 나이 또래의 소녀다운 목소리였다.

발렌시아누스는 비릿한 웃음을 거두고 코넬의 눈치를 보았고, 텐티아는 그를 쏘아보았다.

“전하.”

“그…… 미안하다.”

“누구나 강해질 수 있을 방법은 없을까요?”

“없지.”

발렌시아누스는 코넬의 중얼거림에 칼같이 답했다.

이번만은 텐티아 역시 발렌시아누스를 쏘아보지 않았다.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침식시키는 옛것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코넬 역시 자기가 뭐라고 한 지 알아차리고 손을 내저었다.

“아. 실례했습니다. 죄송해요. 이건 그 뜻이 아니라-.”

“가서 마테오스에게 한마디 해보지 뭐.”

“네?”

“광명신은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니까.”

* * *

내 기부를 빙자한 뇌물 액수는 적지 않았고, 마테오스가 제이릴리스의 머리에 신성 화관을 씌워준 뒤로 황실과 교회는 화해 분위기였다.

따라서 성기사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내 성자 알현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황금 망치를 내밀면 쇠망치로는 안 열리는 문도 열리는 법이었다.

“대공.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성자님을 뵈옵니다.”

화려한 알현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목례했고, 마테오스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가 텐티아 경에게 눈짓을 보내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내게 신성력을 뿜었다.

“이 사악한 악귀야! 네가 대공의 몸을 차지하고 무엇을 하려고 드느냐?”

하얀 불길이 쏘아져 나와 내 몸을 불태웠고, 나는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끄아아악!”

용찬 의식에 정령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라, 신성한 불길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성자님!”

텐티아 경이 한발 늦게 마테오스를 말렸고, 난 그제야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성자님. 이 아이가 말하기를…….”

“……평범한 사람들에게 광역 축복을 내리는 기도나 성물을 만들 수 없느냐는 말입니까?”

“비슷한 효과의 축복이나 기도, 성물은 이미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리 말하기는 불경스럽지만, 성수처럼 사실상 공방식으로 만들어낸 성물도 있고요. 두 체계를 결합하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성수도 엄연히 성물이었지만, 하급 성직자들을 쥐어짜 만들고 있었다.

수도 함락 당시에는 신학교 학생들이 성수를 암시장에 팔다 걸려 박살 나기도 했고, 마테오스를 큰 물통에 담갔다 빼며 물을 성수로 바꾸기도 했다.

“마법사들이 마도구를 만들 듯, 교회는 성물을 만드는 겁니다. 성직자들의 장인화나 교회의 공방화가 우려되신다면 철저히 성전 목적에만 사용하시면 되고요.”

마테오스는 의외로 내 말을 경청했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게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던 듯 했다.

“…….”

그의 시선이 잠시 코넬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녀는 외다리 고아 빈민 소녀이자, 황실 의회에서 빈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의원이었다.

마테오스가 선이 그윽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무리 봐도 분노보다는 자괴감에 가까워 보였다.

“미안합니다. 대공. 어떻게 해도 신성모독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아.”

코넬이 나지막이 탄식했고, 마테오스는 말을 이었다.

“우리도 정화병들을 강화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주로 아카데미 신학과에서 주도했지요. 더 쉬운 전투 기도를 연구하기도 했고, 발렌의 말처럼 광역 축복을 내리는 성물을 만들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은 본질적으로 믿음의 영역이고, 체계화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마테오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성력은 마법과 다르다.

그 원리를 명명백백히 밝히고 이용하려 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성자인 저도 이런 말을 꺼냈다가는 큰 반발을 살 겁니다. 늙은 주교들과 홍의주교들은 사석에서 신성모독 같다는 이야기를 할 지도 모르겠지요.”

“예. 이해합니다. 저도 대성당으로서는 무리일 듯하다고 생각하며 왔습니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코넬을 바라보았다.

코넬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님.”

* * *

발렌시아누스, 코넬, 텐티아가 돌아가고 몇 분 뒤.

알현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한 홍의주교가 들어섰다.

“성자님. 또 새로운 기도, 새로운 성물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그는 체격이 크고 눈이 부리부리했으며, 아무리 봐도 주교보다는 성기사에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마테오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우구스타 홍의주교. 나는 그들을 말렸습니다.”

“안 됩니다. 성자님!”

그가 성자에게 매달리듯 몰아붙였다.

워낙 거구인 아우구스타가 목소리를 높이니, 방 안이 꽉 찬 듯했다.

“아우구스타 홍의주교-.”

“새 기도, 성물 양산은 신성모독입니다. 과거 비슷한 발상을 했던 주교들은 모두 신성력을 잃거나 끝내 침식되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아우스타스는 눈을 까뒤집으며 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포효했다.

“성자님은 수십 년 만에 등장하신 교회의 기둥이며 신앙의 중심입니다! 저는 절대로 성자님을 잃을 수 없습니다!!”

거구의 홍의주교의 핏발 선 눈에 걱정과 근심이 그렁그렁했다.

마테오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들었다.

“아우구스타. 언제나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정말로 그들을 말렸습니다.”

“아.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우구스타의 얼굴에 다시 핏기가 돌았다.

마테오스는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말린다고 들을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 * *

마차는 옛 빈민가도 황궁도 아닌 배움의 거리로 향했다.

“전하. 왜 여기로 오신 겁니까?”

코넬의 선거구인 옛 빈민가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흑마법 학과가 있는 만큼 딱히 생도들의 평균적인 신앙심이 신실한 곳도 아니었다.

따라서 코넬은 여기서 자기가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했고.

발렌시아누스는 능글맞게 웃었다.

“아까 마테오스가 한 말 기억하지?”

“무슨 말 말씀이십니까?”

텐티아 역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과장된 손짓과 함께 말했다.

“자기들도 시도해본 적이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다른 홍의주교들의 반대로 실패했고.”

‘우리도 정화병들을 강화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주로 아카데미 신학과에서 주도했지요.’

‘늙은 주교들과 홍의주교들은 사석에서 신성모독 같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요.’

“바꿔 말하면 아카데미 교수로 있는 신학자들과 사제들은 그 계획에 호의적이란 이야기거든.”

“아.”

“그렇게 되는군요.”

텐티아가 눈을 부릅뜨고, 코넬이 손뼉을 쳤다.

발렌시아누스는 음흉하게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자. 좋은 일 하고 천벌 받을 각오를 해볼까?”

그가 찾아간 학생회장은 당연히 진이었다.

“전하.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신학과 연구를 조금 지원해줬으면 하는데.”

진은 아카데미 연합회의 연합회장이자 한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었고, 당연히 배움의 거리 안에서 신 같은 권세를 휘둘렀다.

아카데미 총장도 자취방 주인, 강의실 건물 주인과 드잡이질을 벌이는 판이다.

수십 개의 건물을 조율할 권한을 가진 학생회장은 배움의 거리 일대에서 의원 이상의 권력자였다.

아카데미 신학과 교수들을 대성당 늙은이들의 감시나 억압으로부터 지켜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새 기도나 성물을 이용한 광역 축복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어.”

진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교수님들은 당연히 부당한 외압에서 벗어나 본인의 수업을 자유롭게 진행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하물며 학생들과 함께한다면 더더욱요. 그 수업 계획을 외부인이 안다거나 개입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지. 또, 최근에 신학생들이 많이 편입된다고 하더군. 대부분 교회 정화병 출신이라는데?”

“작년 침식에 맞서 분투하신 분들이 더 많은 배움을 청하러 오시니, 어찌 광명신도로서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텐티아는 헛웃음을 투구 면갑 아래 감췄다.

오랜 시간 발렌시아누스를 따라온 결과, 사건의 전말이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교회도 새 기도 연구를 하고 싶지만, 내부적 반대로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독립성 강한 아카데미에 외주를 주고, 새 기도의 수혜자가 될 정화병들을 학생으로 위장해서 입학시킨다.

‘성자 마테오스가 이걸 몰랐을 리 없으니, 사실상 발렌 전하에게 이렇게 해 달라 부탁한 셈이야.’

텐티아는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발렌 전하가 성자님의 부탁을 들어준 모양새라면, 굳이 그렇게 많은 성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

텐티아는 발렌에게 뇌물을 수백 닢 받았으면 수십 닢은 기부하시라, 정도로 말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거의 수백 닢 모두를 기부했다.

‘부탁을 들어주는 쪽이시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가실 필요가 있었나? 물론 신실함은 미덕이지만, 이럴 분이 아니신데. 다른 뭔가를 성자님께서 청탁하신 건가?’

텐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붉은 눈이 발렌시아누스의 뒤통수에서 제 옆에 선 외다리 소녀에게 향했다.

텐티아는 코넬이 가진 걸 하나하나 꼽아 보았다.

의원.

건물주.

빈민가 재개발 조합장.

자경단장.

자경단장?

“……하.”

……아몬신도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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