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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카지노는 ‘희망’ 시절보다 두 배는 화려해진 듯했다.
“부어라, 비워라.”
“4에 칩 다섯 개!”
“8에 칩 여덟 개.”
가면을 쓴 부잣집 도련님과 아가씨들이 좌우에 미남미녀 딜러를 끼고 술과 도박과 연초를 즐겼으며, 천장에는 보석 찬란한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저거 황궁에 샹들리에 납품한 그 장인 공방에서 만든 건데.
귀족 아니면 안 파는 걸 어떻게 구했데?
“VIP. 오셨습니까?”
나를 불러온 걸 사과라도 하듯, 적가면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머리를 숙였다.
“…….”
나에 대해 모르는 몇몇 신입 기도들이 당황하는 눈빛을 보냈다.
적가면은 2년째 홍등가의 왕으로 군림하는 중이었고, 그녀가 고개를 숙일 만한 대상은 많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일어나라 손짓하고 하얀 가면을 고쳐 쓴 다음, 그녀 곁으로 바싹 붙었다.
“안에서 이야기하지.”
화려한 방, 거대한 대리석 원탁, 값비싼 술과 안주, 미남미녀 기도들.
대접받는다는 기분을 확 느끼게 해주는 분위기였다.
옆에서 루디가 ‘별궁에도 저 원탁을 들여 볼까요?’라고 중얼거리는 게 얼핏 들렸다.
문이 닫히고, 적가면이 루디를 향해서도 가볍게 목례했다.
“각하.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시녀 사수가 백작이 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수도 사교계에 팽배했다.
“아. 감사해요.”
루디는 약간 부담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종이 가면도 불편한지 약간 숨을 몰아쉬는 소리도 들렸다.
일만 하고 빨리 나가는 게 좋을 듯했다.
놀 수도 없는 유흥가는 그저 시끄러울 뿐이다.
“적가면. 어째 업장이 더 화려해진 듯하군.”
“전하 덕입니다. 사람들이 연초를 많이들 찾더군요.”
“그 갑옷은 어찌 얻었나? 밖에 파는 물건이 아닌데?”
적가면이 요망한 웃음이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날 밤 높으신 분의 자제들을 상아탑 특구 쪽으로 보내 드렸지요. 약간의 보답을 받았습니다.”
“그 문은 상아탑 쪽에서 안 열었을 텐데?”
“지하수로를 이용한 통로를 관리 중이라는 걸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말했으니 봐달라는 말이었다.
나는 양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굽혀 주는 협력자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래. 그래서 첩자라니 뭔 소리야?”
* * *
적가면이 입을 열었다.
“이건 전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겨울철 유민들에 섞여서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수도로 기어들어 왔습니다.”
동방 칠왕국, 남방 아미르 토후국, 서북방 도로이센 왕국, 서방 랑소와 공화국, 서남방 자한 동맹.
제국에 직접적 위협이 될 만한 큰 세력만 다섯이었고, 군소왕국, 자치령, 공국을 합치면 셀 수도 없는 나라들이 있었다.
그 모든 나라가 제국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첩자와 세작을 보냈을 테니, 지금 수도는 첩보원들로 미어터지고 있을 거다.
자한 상인 귀족들을 그렇게 대로에서 쏴 죽인 건 그들에 대한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상한 수작 부릴 생각 말고, 우리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걸 본국에 알려라.
“그래. 여기만큼 정보 수집하기 좋은 곳도 없지.”
상인, 귀족, 모험가, 장인, 범죄자.
누가 와도 이상하지 않고, 누구나 와서 아무렇게나 떠들며, 가명과 가면이 자연스럽다.
“그래도 손님 사이에 끼어 있으면 어느 정도는 구별될 텐데? 적당히 잡아다 지하수로에 담그면 되지 않나?”
“말씀대로 너무 심각한 놈들은 제가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쫓아내고 싶습니다. 자기 발로 나가는 그림을 원합니다.”
나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당당하군. 좋아. 이유는?”
“……전 대외적으로 일개 홍등가 지배인입니다. 제 주도로 대규모 색출이 시작되면 소문이 될 테고, 손님들은 제가 어찌 이런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궁금해할 테지요.”
“그렇군.”
“그럼 제가 전하의 하수인이라는 게 공공연해질 테고, 제 가게는 망합니다. 거리도 큰 피해를 보겠지요.”
그럼 나 역시 큰 손해를 보았다.
“발렌 님?”
루디가 그냥 망하라 하는 게 맞지 않냐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적가면은 내게 금화 몇 닢 보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썩기 쉬운 홍등가에 진짜 막 나가는 조직이 기어들어 아동 인신매매, 맹독성 마약, 침식 연초를 팔지 못하도록 막는 관리자였고.
궁정 귀족, 수도 의원, 상단주, 공방장 등 제국 고위층의 치부와 비사를 속속들이 알려 주는 협력자였다.
“로사 의원의 아들이 연초 중독이라. 숨겨줄 테니 자경단법의 반대를 그만두라 전해야겠군.”
“팽 용병단장 부단장이 용병단 공금에 손을 댔었나? 치안 유지에 자발적 협조를 부탁해야겠어.”
“에실 상단주가 이런 취향이었을 줄이야. 끔찍하군.”
그러니 이곳의 손님들에게 들키지 않고 첩자들만 조용히 쳐낼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치안감이나 흑철 기사들에게 그런 은밀한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나는 루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나가 있을래? 밖에서 지원 부탁해.”
“…….”
가면 너머로도 마음에 안 든다는 게 드러났다.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매달렸다.
“여기서는 술도 안 먹고, 도박도 안 할게. 연초는 원래 안 피우잖아.”
그제야 그녀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적가면이 놀랍다는 듯 눈을 부릅뜨는 게 가면 너머로도 보였다.
루디가 방을 나가고, 적가면이 말했다.
“VIP께서 누군가를 그렇게 대하는 모습은 처음 뵙습니다. 혹시 소문이 맞는 겁니까?”
“소문?”
“첩자들에게서 흘러나온 소문 중 하나인데, VIP께서 시녀를 백작에 봉한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말해보게.”
“별궁 시녀장 루디 콘세크라투스가 어린 시절부터 황형 발렌시아누스를 각종 약물과 체벌로 세뇌해 왔다는 소문입니다. 이에 전하께서는 완전히 그녀의 포로가 되어 발도 핥으라면 핥는 발 받침대가-.”
“그만 말해도 되겠군.”
나는 적가면의 말을 끊으며 일어섰다.
기도에게 명단을 건네받아 확인한 다음, 문고리를 잡고 물었다.
“적가면.”
“예.”
“내게 의욕을 불어 넣어주고 싶었나?”
“……예.”
“성공했다네.”
* * *
“내가 분명히 뜨거운 아이스 커피를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여명 카지노 직원이자, 도로이센 왕국의 첩자, 산드르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V, VIP. 뜨거운 아이스 커피 같은 건 없습니다. 제가 벌써 다섯 번이나 다시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어디서 튀어나온 VIP가 살면서 들어보지도 못한 주문을 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날 무시하는 거냐? 이깟 구정물 같은 건 네놈이나 먹어라. 당장! 내 앞에서!”
“예, 예.”
‘다 봤으면서도 기도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분명히 최상위급 VIP야. 자칫하면 잘릴 수도 있어. 그럴 수는 없다.’
산드르는 벌써 다섯 번째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VIP는 멈추라는 듯 손짓했고, 말 같지도 않은 지시를 내렸다.
“누가 입으로 마셔도 된대?”
“예?”
커피를 입으로 마시지 않으면 어디로 마신단 말인가?
산드르는 당황하며 반문했고.
“그럼 커피를 어디로 마시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원하는 말은 한마디도 못 하는 입이 무슨 쓸모냐? 코로 마시도록 해라.”
직후 황당함에 차 절망했다.
“이런 미친…….”
새벽 1시, 산드르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코로 흘러나오는 커피를 보며 생각했다.
‘그만둔다. 무조건 그만둘 거야. 정보를 알아내기에 더 좋은 카지노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정체 모를 VIP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홍등가를 배회했다.
“포도주가 왜 이렇게 쓰지?”
“저, 주문하신 포도주는 목 넘김이 제일 강한 포도주입니다. 분명히 설명해드렸을 텐데요?”
“아니.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
깽그랑!
“악!”
그는 술병을 휘둘러 위장 첩자의 머리를 깨고, 그의 입 안에 술병을 밀어 넣었다.
‘이런 새끼가 있다니. 죽인다. 무조건 죽일 거야.’
첩자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상대는 VIP였다.
“침대가 왜 이리 딱딱하지? 요를 더 가져오도록.”
“VIP. 이미 시트가 천장에 닿을 정도입니다.”
“내 예민한 감각을 무시하는 건가? 당장 더 가져오도록 해라. 아니면 네놈이 누워서 이 불편함을 느껴 보던가.”
“예?”
첩자 직원은 조심스럽게 올라가 누웠고, 그 직후 창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저놈을 창밖으로 밀어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더러운 등이 닿았군. 이제 그 요는 빼고 새 요를 가져와라. 나보고 네놈이 누운 요에서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
“?!”
발렌시아누스는 회귀 전 망나니 시절에 주변인들에게 보고 들은 수많은 패악질을 저질렀다.
각국의 첩자들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 새끼 완전히 미친 새끼 아니야!”
야밤, 비밀 정기 회의의 끝자락에서 고변이 터져 나왔다.
“독한 술을 코로 마시게 하고, 안주로 살아있는 뱀을 시킨 다음 그 뱀을 내 바지 속에 쑤셔 넣었어.”
“최고급 연초를 주문한 다음 연기가 맛없다며 재떨이를 던지잖아. 내 머리가 깨졌다니까.”
“돈 안 내고 도망치는 거야. VIP라며! 쫓아가니까 내 다리 걸어서 넘어트리고, 제 발목이 다쳤다면서 치료비를 내라네?”
“스파게티에 고추랑 후추 왕창 넣어서 시킨 다음에, 맵다면서 나보고 다 먹으래. 울면서 다 먹었더니 똑같은 걸 한 접시 더 시키더라? 그날 내가 먹은 게 일곱 접시라고!”
“호텔에서 목욕 시중을 드는데, 물이 너무 축축하다면서 내 뺨을 치더라고. 아니,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들어주지. 내가 어째야 하는 거였냐?”
“뜨거운 아이스 커피 만들어 본 적 있어? 그거 세 잔쯤 코로 마시니까 꽤 잘 들어가더라?”
“이상한 걸로 트집 잡더니 맷값 준다면서 그냥 두들겨 패더라고. 한 대에 은화 한 닢이라는데, 내 설정이 은화 서른 닢에 팔려 온 애라서 ‘감사합니다.’ 하면서 받았지. 그리고 마지막에 빵 사 먹으라고 금화 한 닢 주면서 낄낄거리더라. 훈련 안 받았으면 후유증 남을 뻔했다.”
“우리 딴 가게로 이적할까?”
“조금만 더 버티자. 정기 보고는 올려야지.”
“매일 재무부 관료들이 바에 와서 술을 먹고 가잖아. 자한 상인들 죽고 제국 경제가 회복되는 건 제대로 보고해야지.”
도로이센 왕국에서 온 그들은 이를 갈았고, 그 VIP란 자를 언젠가 찢어 죽이겠다 맹세했다.
이미 많은 정보를 보고 들었고, 수도 방위의 약점도 파악할 만큼 파악했으며, 여러 의원과 귀족들에게 줄을 댄 상황이었다.
‘그래. 곧 네놈이 떵떵거리는 나라는 흔적도 남지 않고 불탈 거다.’
‘그 쌍둥이하고 같이 목을 매달아 주마.’
‘회복하신 우리 왕께서 너희 황제를 참수하실 거다.’
그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옛 빈민가와 홍등가 사이, 철거를 앞둔 인적 드문 건물을 나섰다.
철걱!
아니, 나서려 했다.
“뭐야? 왜 문이 안 열려?”
“왜 이걸 못 열고…… 어, 어?”
“콜록! 콜록! 야. 어디서 탄내 나는 거 같은데?”
* * *
불길이 3층 집 한 채를 휘감고 타올랐다.
“나가!”
새빨간 혓바닥이 기둥과 벽을 핥을 때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똥이 튀었다.
“창문, 창문 깨!”
그렇게 튄 불똥이 다시 이글이글 타오르고 번지며 새빨간 혓바닥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연기가 왜 이렇게 지독해?”
기이하게도 그 불길은 결코 옆집으로 번지지 않았다.
쨍그랑!
한 첩자가 의자로 2층 창문을 깨고 얼굴을 내밀었다.
“빨리 나가!”
“이쪽!”
머리는 산발에 옷은 검댕으로 얼룩졌고, 입에서는 연기가 켈룩켈룩 새어 나왔다.
그가 상반신을 창문 밖으로 내민 순간.
퍼어엉!
마탄 한 발이 그의 머리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고, 머리 잃은 상반신이 다시 건물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뭐, 뭐야?”
“저기!”
2층으로 올라온 첩자들은 길 건너편 건물 옥상에 두 인영이 서 있는 걸 알아챘다.
“시녀?”
시녀복을 입은 여인이 긴 막대 같은 걸 이쪽에 겨누고 있었고, 그 뒤로는 하얀 가면을 쓴 긴 검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VIP?”
지난 며칠간 그들을 괴롭혀 온 그 VIP였다.
별 총총한 밤하늘 아래서 검은 머리의 남자가 망토를 벗었고, 금장 장식 화려한 하얀 정장이 드러났다.
첩자들은 그가 검은 가발을 끌러 위로 넘긴 백발을 드러내고, 하얀 가면까지도 벗어 품 안에 넣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
이 거리에서도 황금빛 눈동자가 선명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며칠만 더 있으면 제국 전쟁 비용 계획 다 알아내는 거였는데…… 그것도 함정이었나?”
“하. 제대로 걸렸네.”
첩자들이 탄식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불길이 더더욱 거세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