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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36)화 (236/340)

(236)

수도를 달구던 여름도 끝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이 찾아왔다.

하늘은 확연히 높고 푸르렀고, 하얀 구름은 유유히 흘러갔으며, 황궁 안 나무들은 천천히 잎을 흔들었다.

그리고 제이릴리스는 보고하려 찾아온 나를 끌고 다짜고짜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대소신료들이 모두 폐하를 찾으며 울부짖을 것이옵니다.”

나는 당황하며 누가 그녀를 말릴 수 있을지 고민했고, 곧이어 그런 사람 없다는 걸 알아챘다.

“그대여. 이런 날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세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라. 짐의 하늘이 이리도 화창한데, 어찌 짐이 기꺼이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폐하의 대소신료들이 가져온 서류도 즐겨 주시는 게 어떠하시옵니까, 라고 말하려 했지만, 순순히 그녀를 따라 인조 수림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

회귀 전과 겉모습이 같아서 자꾸 헷갈리는데, 제이릴리스는 지금 열아홉이었다.

하루 정도 놀 수도 있었다.

아니, 황제도 쉴 때는 쉬어야지!

제이릴리스는 참나무와 떡갈나무가 뒤섞인 숲을 지나고, 갈대와 부들이 한껏 자라난 연못가를 거닐고, 억새밭 사이를 걸으며 한 손가락을 들어 잠자리가 그 위에 앉게끔 했다.

“……오지 않는구나.”

묘하게 시무룩해진 목소리에, 나는 옆 억새 꽃대기에 앉은 잠자리를 잽싸게 낚아채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쥐여 주었다.

“날개를 이렇게 위로 접어서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시면 되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노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오오. 이런 건 언제 배웠는가?”

나는 내심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을 느끼며 말했다.

“폐하가…… 예전에 가르쳐주셨사옵니다. 아주, 아주 예전에 말이옵니다.”

“짐은 그때도 똑똑했던 모양이로구나. 하하하하.”

제이릴리스가 낭랑히 웃고는, 잠자리를 놓아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둥 떠내려갔다.

“그대가 옳다. 오지 않는다면 잡으러 가야겠지.”

“…….”

“이제 짐은 이 제국의 진정한 황제이니라. 적어도 대영주들이 짐의 뜻에 정면으로 반할 일은 없을 것이야.”

“마땅한 일이옵니다.”

“나오기 전 다섯 백작 가문과 두 후작 가문이 얽힌 영지전을 끝내라 명하는 서류에 서명했고, 프로이하이트를 공작으로 승격시켰노라.”

“현명하신 선택이시옵니다.”

“또한 교회와 각 가문이 연계해 전 제국적 침식 교리 탄압을 벌이기로 했노라. 우선 폐관문, 폐수도원 등 거점이 될 만한 시설을 불태우고 무너트리고, 증명패 없는 마법사들을 잡아들이며, 상단들에게 위조가 힘든 통행 패를 발급할 것이다.”

하나같이 놈들의 세를 크게 줄일 수 있을 만한 정책들이었다.

거점을 없애면 대규모 연구가 힘들어진다.

증명 패 없는 마법사들을 잡아들이면 스스로 침식 교리에 빠져드는 자들이 줄어들 테다.

통행 패를 발급하면 놈들이 지금처럼 상단을 이용해 암약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제이릴리스가 하늘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제국 밖으로 눈을 돌릴 때이니…… 수도는 안정되었는가?”

그녀의 몸은 이곳에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다시 황제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예. 폐하.”

“상세히 고하라.”

* * *

“……배움의 거리를 완전히 정리했사옵니다. 넘치는 고학력자들과 소드 유저들을 황동기사단 휘하 정예병단에 흡수시켰고, 건물을 증축해 공간 문제를 해결했으며, 연합 학생회를 만들어 배움의 거리 수많은 아카데미를 영원토록 통제할 수 있도록 했사옵니다. 수상한 자를 잡아들일 수 있고, 능력 있는 자를 후원해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사옵니다.”

제이릴리스는 흡족하니 웃더니,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묵묵히 그 뒤를 따르며 계속 고했다.

“새로운 기도와 성물 사용법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왔사옵니다. 이제 교회 정화병도 침식자, 이물과 싸우는 분야에 한한다면 뛰어난 전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옛 빈민가의 자경단 전력이 증원, 옛 빈민가의 재범람도 해결되었사옵니다.”

“그 어린 의원이 잘하고 있는가 보군. 기껍구나.”

“홍등가를 자정시켰고, 밀수 연초 시장을 통제 아래 넣었사옵니다. 밀수를 통해 수도에 위험이 닥쳐올 가능성은 최소화했사옵니다.”

“잘해주었군. 그럼.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잠시 수도에 남은 위험 요소들을 고민했다.

“……상아탑이 언제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 모르옵니다. 세레라지에 대공을 통해 개입하고 있으나 한계가 있사옵니다. 개정된 교회법도 자치구 안에서는 통하지 않사옵니다.”

“그리고.”

“세력 있는 침식 교단이 황족 사생아를 시약 삼아서 마경 여는 마법을 개발한 듯하옵니다. 언제 어디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이 생겼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우뚝 멈춰 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나를 응시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녀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인간 세상 따위야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노라.”

“예. 폐하.”

“그러나 짐의 적들은 바람처럼 왔다 구름처럼 사라지는, 저 파란 하늘 그 너머의 존재들이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두 세상을 모두 다스리는 건, 아무리 짐이라도 못 해 먹을 짓이로구나.”

“소신은 폐하의 짐을 함께 지고 싶사옵니다. 나누어 주시겠사옵니까?”

제이릴리스가 일순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강해져도.”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은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짐은 수도에서 상아탑, 황립 마도 공방과 함께 마경에 대해 연구하고 있겠노라. 강제로 열어젖히는 법을 알았으니, 강제로 닫거나 우리가 열 수도 있겠지. 연구 방향에 따라 일정 범위 안의 모든 침식자를 옛것에게로 추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때의 자신감이 돌아온 어조였다.

“짐은 다섯 종족의 지배자이자 만물의 주인으로 천세의 일을 하겠노라. 그러니 그대는 인세의 일을 도와야겠어.”

깊은 신뢰감이 어려 있는 어조기도 했다.

나는 소리 없이 환희하며 경청했다.

“서쪽 국경으로 가 도로이센 왕국의 국왕과 왕태자를 상대하라. 전권대사로 봉하겠다. 국경 쪽에 운석이 떨어져 피해 조사를 위해 왔다 지껄이는데…… 이렇게 성의가 없는 거짓을 고하다니, 참담하구나.”

그리고 고개 숙여 복종했다.

“명령 받들겠사옵니다.”

자신이 있었다.

회귀 전 내 악명은 대부분 회담장에서 기인했다.

* * *

나는 우선 종합공방으로 향했다.

오늘도 제자들과 조수들이 커피를 쭉쭉 빨며 죽은 눈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두 광기 어린 천재는 복잡한 수식을 두루마리에 줄줄 써 내려갔다.

“파괴술 주문 회로는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이렇게 삼각형으로 배치하면 충분한 돌파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구조적으로 조금 더 불안정해야 쉽게 붕괴하면서 마경에 균열을 일으키잖니.”

“어렵군요. 그럼 일단 자료는 정리만 해서 황궁 마도 공방 쪽으로 넘기겠습니다. 폐하가 알아서 하시겠지요.”

“그런 말을 하다니.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막 세레라지에와 마커스가 무언가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누나. 마커스.”

나는 둘에게 내가 받은 명령을 설명했다.

“……그래서 같이 가봐야 할 거 같아. 마커스는 길잡이, 누나는 마법사로서. 일단 운석 어쩌고 하는 건 속임수라는 게 거의 확실한데, 혹시 모르잖아.”

“귀찮지만…… 운석이라면 어쩔 수 없잖니.”

세레라지에가 솔깃한 듯 색이 다른 눈을 빛냈다.

운석은 그 자체만으로 희귀한 시약이었다.

만에 하나 진짜로 운석이 떨어졌다면, 그 가치를 감정해줄 뛰어난 마법사가 있어야 했다.

나는 마커스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탈출하고 영지로 돌아가 농성하리라는 걱정은 하지 앉으십니까?”

의안과 진짜 눈이 뱀처럼 나를 꿰뚫어 보았고, 황동 단추로 장식한 가죽 제복은 어디서도 못 본 기묘한 분위기였다.

서부에서 제일 위엄한 대영주라 불린 사내다운 기세였다.

“……나도 불안해. 하지만 텐티아 경도 없는 수도에 너 하나만 남겨두는 것보다는 나아. 그 근처 지리를 아는 길잡이도 필요하고, 만약에 텐티아 경 기계 갑옷에 문제가 생기면 손봐 줄 사람도 필요해.”

마커스가 씩 웃었다.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겠군요.”

일행은 단출하게 꾸렸다.

나, 세레라지에, 텐티아 경, 마커스, 기계 기사 둘까지 해서 6명이었다.

저들이 정말 조사만 하려고 왔다면 많이 데려갈 필요가 없었고, 침공을 위해 왔다면 어중간하게 데려가 봐야 짐이 될 뿐이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걸 바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무슨 일이 터졌다는 뜻이었다.

* * *

와이번 여섯 마리가 가을 하늘을 가로질렀다.

가을은 날기에 제일 좋은 계절이었다.

“하!”

텐티아 경이 붉은 쇼트커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세 바퀴 연속 회전 비행을 선보였다.

“아직일세! 경!”

나는 내 와이번과 함께 네 바퀴를 연속으로 돌았고, 수직 상승과 하강을 보여주었다.

원래 이러면 성자 마테오스가 비명을 질러댔는데, 손뼉 소리만 들려오는 게 약간 어색했다.

낮에는 종일 날고, 밤에는 백작령마다 있는 와이번 착륙장에서 자기를 반복했다.

“며칠이나 더 가야 하니?”

열흘째 되던 날.

세레라지에가 약간 피로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슬슬 힘드시겠군요. 그러니 운동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텐티아 경의 말이 맞습니다.”

텐티아 경이 위로해주는 척하다 잔소리했고, 마커스가 추임새를 넣었다.

“……활력의 마법약 챙겨 왔잖니.”

세레라지에는 새침하게 반박하며 약을 깠고, 나는 한 모금 빼앗아 마시려다 목덜미를 지져졌다.

마커스가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슬슬 인스트루멘툼에 가까워지지 않았니?”

“우리는 서쪽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영지가 왜 이리 옆으로 긴 거니?”

세레라지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쪽으로 갈수록 점점 발아래 보이는 풍경이 거칠어졌다.

비옥한 농토 대신 깎아지는 절벽과 골짜기가 내려다보였고, 파릇한 녹음 대신 이끼와 억센 가시덩굴이 울창했으며, 마을과 소도시는 점점 적어졌다.

“당연한 일입니다. 애초에 이쪽이 국경이 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니?”

“기름진 평야 한가운데 국경선을 그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같이 전쟁을 벌여 결국 어느 한쪽이 빼앗을 겁니다.”

마커스가 웃었고, 나는 세레라지에에게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애초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좌우가 나뉘는 곳이라서 국경이 된 거지.”

즉, 마커스는 이 바위산과 골짜기를 넘어서 옆 왕국을 침공할 생각을 했다는 뜻이었다.

……니벨룽겐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나?

“마커스. 대체 여길 넘어온 생각을 한 약탈자들은 뭐 하는 놈들이냐?”

“대공. 사람이 굶으면 뭘 못하겠습니까?”

“저쪽에 황폐해진 마을이 몇 개 보이는데, 네 증세 때문은 아니겠지? 아까 보니까 꽤 큰 도시도 몇 개 망했더만.”

“……사실 이쪽 국경은 행정력이 안 닿아서 와보지도 못했습니다. 제 기반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알지 않습니까?”

비행은 2주가 조금 넘게 이어졌다.

우리는 한 바위산 중턱에 와이번을 착륙시켰고, 저 아래 분지에 휘날리는 깃발을 발견했다.

“……도로이센.”

방패 뒤로 교차하는 두 자루의 검 깃발.

소드 마스터인 국왕이 수백 년 동안 통치하고 있는, 검객의 나라.

그런 주제에 첩자를 즐겨 쓰는 비겁한 놈들.

그게 도로이센에 대한 내 상식이었다.

“전하. 아무리 봐도 순수한 조사를 위해 오지는 않은 듯합니다.”

텐티아 경이 마커스의 도움을 받아 기계 갑옷을 입으며 말했다.

그녀 말대로, 저 아래 보이는 천막만 수백 개도 넘었다.

기사들의 문장과 용병단 깃발, 검객 도장들의 간판 깃발도 여럿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 솟은 깃발에는 은색 방패에 한 자루의 검이 대각선으로 누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하는 국기보다 높게 솟은 시점에서, 저 깃발의 주인이 대단한 권력자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왕태자가 왔군.”

텐티아 경이 호승심으로 눈을 빛냈다.

“강합니까?”

“빼어난 소드 엑스퍼트라고 알려졌지.”

하지만, 하고 운을 떼며 난 말을 이었다.

“싸우지 않고도 이길 방법을 알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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