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37)화 (237/340)

(237)

율리아는 도로이센 왕국 수도에서 13년 동안 검을 수련한 검객이었다.

그녀는 왕국에서 일곱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한 유파, 투르 류의 검술을 익혔고, 그 유파의 명성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도록 끌어올렸다.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왕국을 떠돌았고, 많은 도장을 격파해서 명성을 쌓았으며, 그 과장에서 네 유파의 기술을 추가로 익혔다.

귀족 가문에 들어가 1천도 넘는 병사들을 조련하기도 했고, 귀족 가문 간 영지전에 초빙받아 하루 만에 일곱 개의 백인대를 부수기도 했다.

그런 율리아의 명성은 오늘날 정점에 달했다.

“그대의 명령을 들었네. 투르 류의 검객들이 나를 지켜 주면 든든하겠군.”

왕태자가 운석 조사를 위해 솔레타라스의 국경을 넘을 때, 같이 갈 동반자로 선택받은 것이다.

“도로이센의 검호로서, 태자 전하의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도로이센은 검의 나라, 대륙에서 제일 많은 검객을 보유한 나라였다.

검술 도장, 검술 학파가 셀 수도 없었고, 젊은이라면 검을 익히는 게 당연했다.

그게 무자비한 용혈 황족 솔레타라스의 확장마저 저지해낸 원동력이었다.

율리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인원과 이 전력이 운석 조사나 할 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멕베르 경!”

“하하. 이렌스 공. 오랜만이오.”

“유카 성백도 저쪽에서 뵈었는데, 인사는 하셨소?”

명령에 죽고 사는 왕국의 기사가 40명이었고, 작위도 마다하고 홀로 세상을 떠돌며 이름을 날리는 검객이 150명이었으며, 소드 유저급 정예병이 700명이었다.

거기에 잘 조련된 병사와 공병대가 2천이니, 누가 봐도 인스트루멘툼 가문과의 전쟁을 준비한 선발대였다.

물론 율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싸움이 있으면 좋지. 난 검객이니.’

그녀는 명성에 죽고 사는 검객이었고, 치열한 싸움은 언제나 그녀의 명성을 올려 주었다.

그러니.

“나리. 저, 저기 누가 내려옵니다.”

“셋, 아니. 두 명! 단 두 명입니다.”

율리아는 지금 내려오는 둘의 정체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비켜라.”

그녀는 호들갑 떠는 병사들 사이로 끼어들어 둘의 정체를 확인했다.

때마침 해가 높게 떠오르고 아침 안개를 걷어냈다.

무대 막이 걷히듯, 안개 속에서 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에 선 사내는 백발 금안에 오만한 인상의 미남이었고, 뒤를 따르는 기사는 저걸 갑옷이라도 해도 될지 의심될 정도로 육중한 특중갑을 두르고 있었다.

마치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속 골렘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 갑옷 안에서 느껴지는 기도는 분명 범상치 않았다.

“저 정도 기사를 호위로 쓴다면…… 황족인가?”

율리아 역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솔레타라스의 용혈 황족들은 하얀 머리카락과 노란 눈을 가진다고.

역사에 악명을 떨친 역대 솔레타라스 모두가 그러했다.

대륙 최고의 정복왕인 초대 솔레타라스가 그러했고, 200년 전 도로이센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섬멸제’ 역시 그러했으며, 2여 년 전 선황을 비롯한 수백의 친족을 도륙하고 즉위한 ‘제이릴리스’ 역시 그랬다.

그 잔혹한 제이릴리스에게는 사악한 쌍둥이 오빠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최근에 정당한 빚을 받으러 온 자한 동맹의 상인 귀족들을 죄다 도륙해버린 사악한 대공.

‘이마가 보이게 넘긴 백발, 노란 눈동자, 화려한 하얀 제복. 역시 그 유명한 망나니인가?’

율리아는 소문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왕국을 떠돌며 검을 겨루던 중 실력이 부풀려지거나 축소된 상대도 여럿 만나본 탓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유 없이 소문이 나는 경우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고작 둘이서 여기까지 내려왔다면…… 자신감이나 실력 하나는 확실한 인물이겠군.’

대공이 시종에게 말했다.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신성불가침하신 제이릴리스 폐하의 이름하에, 제국의 전권대사로 임명받았다. 지금 당장 왕태자를 만나겠다.”

율리아는 병사들 사이를 빠져나가 황태자의 막사로 향했다.

그가 아는 왕태자는 이런 도발적인 만남을 거절할 사람이 아니었다.

* * *

저택만큼 크고 화려한 천막 안에 존귀한 피를 타고난 자들과 스스로 존귀해진 자들이 모여들었다.

한 사내가 화려한 직사각형 테이블에 앉아 천막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이가 장년과 중년 사이 정도 되어 보였고, 키가 크고 몸이 단단했으며, 거친 검은 수염과 검은 머리를 모두 짧게 정리했다.

굳은살이 박힌 손은 검객의 손이었으며, 번들거리는 눈은 절박한 야심가의 눈이었다.

필리오스 폰 도로이센.

장장 80년간 왕태자의 자리를 지켜 온 사내였다.

“들라 하라.”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천막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직사각형 문은 쏟아지는 햇볕으로 환하게 달아올랐고, 그 문으로 들어오는 두 인영은 마치 빛 속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필리오스는 발렌시아누스의 하얀 장갑 안이 텅텅 비어있는 걸 알아챘지만, 얼굴에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고, 텐티아의 거대한 기계 갑옷이 그 저주받을 마커스의 작품임을 알아챘지만, 그 역시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저 곱상하고 오만한 황형의 첫 마디에는, 어지간한 그조차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황형 발렌시아누스의 이름으로 제국으로의 단체 망명을 환영하는 바이오!”

간사한 혀가 뱀 같은 속삭임을 내뱉고, 노란 눈동자가 가학적인 웃음을 지었다.

필리오스는 저 핼쑥한 뺨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대공. 우리는 망명이 아니라 국경지대에 떨어진 운석을 조사하려고 왔소.”

“여기는 국경지대가 아니라 제국의 영토요. 태자의 입술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기 바라오.”

율리아는 그 시점에서 발렌시아누스가 광인이라는 걸 눈치챘고, 슬쩍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예의를 지키시오!”

“대공! 이게 무슨 무례요.”

“아무리 제국이라도 이럴 수는 없소이다!”

왕태자의 기사들과 다른 검객들 역시 눈살을 찌푸리거나 검 자루로 손을 가져갔고, 행정관들은 자기가 뭐라고 들었는지 믿지 못해 손을 우뚝 멈췄다.

“지금 제가 똑바로 들은 게 맞습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유일하게 의례적인 웃음을 잊지 않은 건 왕태자 필리오스와 황형 발렌시아누스 뿐이었다.

물론 둘 역시 웃는 게 진짜로 웃는 건 아니었다.

‘침착하자.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 않은가? 성자를 와이번에 태워 납치한 놈이다. 뭐든지 할 수 있어.’

필리오스는 발렌시아누스가 미치광이거나, 미치광이 전략을 사용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발렌시아누스의 호흡에 말려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대공도 알다시피, 운석은 옛것들의 세상에서 넘어온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을 확률이 높고, 이는 막대한 침식자와 이물을 양산할 수 있다는 뜻이오.”

“그랬군. 몰랐소.”

‘저걸 말이라고.’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목덜미가 당겨왔지만, 필리오스는 왕태자의 품위를 지켰다.

‘미치광이 전략을 쓴다는 건, 정공법으로는 날 이기지 못하거나, 이겨도 손해가 크다는 뜻이다. 결국 약자가 강자를 괴롭히기 위한 전략이야. 우직하게 몰아붙인다.’

“교회의 선언에 따라 속세의 군주는 침식자와 이물을 토벌할 의무가 있고, 인스트루멘툼의 영주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었지. 따라서 제일 가까이 있는 군주인 우리가 그 신성한 과업을 준수하기로 했소.”

“그럴 리가?”

발렌시아누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앉은 자세를 보다 바르게 고쳤고, 왕태자의 시녀가 내민 차를 망설임 없이 받아 홀짝였다.

후광을 받은 백발은 금빛으로 달아올랐고, 음영 진 얼굴은 위태롭고도 위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찻물에 젖은 입술은 윤기가 흘렀다.

달각, 하며 찻잔을 내려놓는 동작까지도 고고했다.

차 한 모금을 마신 것만으로도, 한 사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천막 안의 모든 사람이 그의 입에 집중했다.

* * *

발렌시아누스가 금빛 눈을 반짝이며 한쪽 벽에 걸린 지도를 가리켰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는 도로이센이 아니라 움보로지.”

움보로는 제국과 도로이센 사이의 소국으로, 마지막 전쟁 후 일종의 완충지대로 만들어놓은 국가였다.

그 규모는 제국의 남작령을 두셋 정도 합쳐 놓은 수준이었다.

따라서 필리오스는 당당히 고개를 저었다.

‘계산대로다. 명분은 이미 내 손에 있다.’

“방금 말했듯, 중요한 건 침식자와 이물을 토벌할 능력이오. 그런 소국에 그런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 우리 도로이센의 기사와 검객 같은 강자들만이 교회가 내려 준 신성한 책무를 다할 수 있었소.”

“…….”

“제국에 알리지 않았다? 우리는 몇 차례나 사절을 보냈소이다. 그러나 당시 제국은 수도가 반파되고 황제가 실종되는 등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 사절을 매질해 내쫓고, 누군가 황제의 명령을 빙자해 어음을 발행해도 아무도 그걸 막지 못할 정도로 말이오.”

발렌시아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두 그의 이야기였다.

필리오스는 씨익 웃으며 당당하게 말을 맺었다.

“우리는 강자의 책무와 권리를 다할 수 있고, 다하려 하오. 충분한 조사에도 운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돌아갈 것이오.”

승리자의 미소였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의 궤변은 이제 시작이었다.

뱀 같은 혀가 다시 한번 움직였다.

“고상하고, 고귀하며, 고결한 의사 잘 들었소. 역시 여기 오기 잘했구려.”

이번에는 필리오스가 눈을 가늘게 뜰 차례였다.

율리안 역시 재차 긴장하며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발렌시아누스가 차를 다시 한번 기울였다.

“그럼 이제 본론을 전하지. 내가 여기 온 건 전쟁을 막기 위해서요.”

“전쟁?”

필리오스는 미간을 찌푸렸고, 텐티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으며, 발렌시아누스는 유유히 말을 이었다.

“인스트루멘툼의 주인, 철혈당주 마커스는 최근 충성맹세에서 황실에 기계 갑옷 제작 기술을 공유하는 대가로, 영토를 확장할 권리를 부여받았소. 지금 내 뒤에 있는 백금 기사가 뭘 입고 있는지 보이겠지?”

율리안은 텐티아의 거대한 기계 갑옷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발, 높아지는 시야, 대검, 인체 골격 같은 뼈대, ‘입다’와 ‘타다’의 경계선에 있는 구조.’

분명 마커스의 발명품이었다.

마커스는 기계 기사들을 휘몰아 움보로와 도로이센의 국경을 꾸준히 약탈했고, 도로이센의 기사와 검객들은 그 기이한 기술력에 진절머리 쳤다.

“그대들이 여기 계속 머문다면 그 미친 자에게는 아주 좋은 전쟁 명분이 되어 주겠지. 놈은 비공정을 타고 날아올 테고, 도로이센은 또다시 그 기이한 기술을 마주해야 할 거요.”

필리오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태연한 태도와 달리, 그의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계산이 돌아갔다.

‘마커스가 정말로 돌아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영지를 잃었어. 설령 사령관으로서 부임한다고 해도 예전 같은 미친 전략을 사용하지는 못할 거다.’

“……우리는 검객의 나라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소.”

“황제 폐하를 두려워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 거요. 그분께서는 침식자와의 싸움에 집중하고 싶어 하시고, 그분의 신경을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끝이군.’

필리오스는 발렌시아누스가 드디어 밑천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대범했지만, 결국 어린놈이었다.

“결국 마지막 수는 쌍둥이 여동생의 이름을 빌려서 협박이나 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쩔 테지?”

“여기서 걸어 나갈 생각 마라.”

“처음부터 그럴 생각 없었어.”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의 태도는 도저히 밑천을 드러난 자 같지 않았다.

“협박이라. 그래. 협박이지. 그런데 공갈 협박은 아니야. 내 협박이 현실이 되었을 때, 감당할 자신은 있나?”

되려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동정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필리오스는 더 이상 참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꿇려라.”

* * *

스르르릉!

율리아는 필리오스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검을 뽑아 들었다.

텐티아가 발렌시아누스의 허리를 껴안고 막사 밖으로 몸을 날렸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율리아는 막사를 나서는 동시에 텐티아와 발렌시아누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우르르릉!

그때 하늘에서 번갯불이 떨어져 텐티아와 발렌시아누스를 쳤다.

번쩍!

화창한 가을 하늘에 난데없는 벼락이었다.

“큭!”

그 섬광이 가시고 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

율리아는 잠시 당황했고.

“벼락이 저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산중턱을 가리키는 병사의 손끝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마법사다. 그것도 빗자루나 양탄자 없이 비행이 가능한 수준의 최상위급 마법사. 아마 이 근처를 조사하고 있었겠지. 정말로 운석이 떨어진 게 맞는지 확인하려고. 양동작전이었어. 완전히 당했다. 저 망나니 황형 놈은 그냥 계속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던 거야.’

그걸 알아챈 건 율리아뿐은 아니었다.

필리오스는 분노에 차 외쳤다.

“당장 놈을 내 앞에 끌고 와라!”

‘형님들처럼 될 수는 없다.’

지독한 절박함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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