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불길이 순식간에 숙영지를 삼켰다.
타닥, 타닥.
병사들의 천막이 불타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파도처럼 일어나 먼지처럼 흩날릴 불씨가 또 다음 천막을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물 가져와!”
“병사들이 너무 적습니다!”
“마법사님은 어디 계시나?”
발렌시아누스는 불길 한가운데 서서 이곳저곳을 무심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일련의 병사들이 닿고, 불길 속 검은 그림자가 섬뜩하게 흔들렸다.
펑!
불덩이가 튀고, 막 물 양동이를 가지고 달려오던 병사 무리에 꽂혔다.
“끄아아악!”
병사들은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했고, 발렌시아누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불의 파도를 밀고 나갔다.
분지 전체를 불태워 버릴 듯한 기세였다.
물론 그 기세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강의 신이여. 당신께 바라여.”
“파랑과 하양, 오랜 나의 벗이여.”
“그대가, 불러온, 구름이.”
도로이센이 아무리 검의 나라라지만, 왕태자 정도 되면 빼어난 마법사들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촤아아악!
저 아래 강에서부터 물줄기가 거슬러 올라오고, 한 사내의 등 뒤에 물로 만들어진 여섯 개의 거대한 팔이 달라붙고, 맑은 하늘이 비구름이 모여들었다.
쏴아아아!
산을 거슬러 온 강이 불의 파도를 휩쓸었고, 물로 만들어진 거인의 팔이 불타는 막사를 두드렸으며, 비구름이 물방울 하나하나가 어린아이 머리보다 커다란 비를 내렸다.
치이이익!
분지 전체를 불태울 듯하던 불길도 한결 기세가 죽고, 하얀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불길은 끝내 사그라지지 않았고, 불사의 뱀처럼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세 마법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나를 끌어 모았다.
‘예상보다 강하다.’
‘역시 솔레타라스 황족이라는 건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될 것 같은데.’
그들은 특별한 마도구 덕에 봉마 결계의 영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고, 반면 발렌시아누스는 그 부담을 온전히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용언의 힘도 정령의 힘도 사용하지 않고 있던 만큼, 정면 대결에서는 턱없이 불리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는 뿔과 비늘을 불러내지 않고 버텨나갔다.
이는 그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오판이 아니라, 철저하게 작전대로인 행동이었다.
“텐티아 경. 이제 가게나.”
쿵, 쿵, 쿵.
강이 거꾸로 흐르고,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며, 불길이 뱀처럼 울부짖는 판이다.
텐티아의 기계 갑옷이 아무리 육중하다 해도 연기와 수증기, 불길 속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타앗!
특중갑을 입고 특대검을 든 기사가 불길 속에서 뛰쳐나갔다.
“윽!”
“어엇!”
“막아라!”
세 마법사가 기겁하며 병사들을 불렀다.
마법사의 주변에는 당연하게도 빼어난 병사와 검객들이 모여 있었다.
“대열, 맞춰!”
“기대되는군.”
중장보병들은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로 방패 벽을 세운 다음 창을 겨누었다.
이름 높은 유파의 검객들은 방패 벽 밖으로 재빠르게 달려 나간 다음, 각자 자세를 잡으며 절기를 준비했다.
“후, 하.”
그러나 텐티아는 초인 중의 초인이었고, 텐티아의 갑옷과 검은 기물 중의 기물이었다.
텐티아는 제 심장 소리가 제 발소리보다 크게 울리는 걸 느꼈다.
투구에 새겨진 시야 확장의 주문 덕에 투구를 안 쓴 듯 훤히 보였고, 인체 골격과 근육 구조를 이용해 힘을 증폭한다는 기계 갑옷 덕에 온몸에 힘이 넘쳤다.
사아아아-.
텐티아가 몸에 힘을 주며 마나를 끌어 올리자, 기계 갑옷도 그녀에게 맞춰 증기를 뿜고 체인을 돌리며 강철 섬유를 긴장시켰다.
치이이익!
다음 순간 길이가 3m에 달하는 마나 블레이드가 대검을 감싸고 붉게 타올랐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텐티아는 보통 사람은 양손으로도 못들 검을 회초리처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이름 높은 검객들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온몸이 굳어 움직이지는 못하는 압도감을 맛보았다.
“이런 젠장!”
“어, 어?”
츠카아아악!
일 검이 붉은 반원을 그리고, 그사이에 들어있던 모든 게 위아래로 잘려 나갔다.
명성 높은 검객도, 훈련을 거듭한 정예병도, 텐티아의 검 앞에서 바닥을 굴렀다.
세 마법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 * *
텐티아가 마법사 셋 중 하나의 목을 치고, 두 번째 마법사의 허리를 반으로 자르기 직전이었다.
투, 캉!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투창이 기계 갑옷의 어깨를 거세게 두드렸다.
텐티아가 일순 몸의 균형을 잃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목표들이 스스로 기어나왔음을 알아챘다.
“필리오스!”
숙영지 중심부에서 완전 무장을 갖춘 기사들이 달려 나왔다.
송곳 같은 에스토크를 든 기사, 날이 초승달 같은 창을 든 기사, 두 자루 장검을 든 기사, 한 자루 직도를 든 기사…….
그 중심에 선 건 은색 카이트실드와 한 자루 장검을 쥔 왕태자였다.
필리오스는 텐티아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포위망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망나니 대공을 찾아라. 검객들은 알아서 움직이라고 해. 그리고 율리아는…… 아니, 아니다.”
그는 사자가 새겨진 투구를 눌러썼고, 도로이센의 기사들은 텐티아를 포위하는 동시에 숙영지 곳곳으로 달려 나갔다.
텐티아는 불길을 뒤로 하고 거인처럼 위풍당당하게 서서 왕태자를 기다렸다.
‘발렌 전하는 작전이 있으니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하지 않아도 되지요. 제가 왕태자를 이겨버리면 그 작전도 필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제가 그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필리오스 역시 그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적기사.’
세작들이 말하길, 성기사 수십 명을 상대로 제 주군 망나니 대공을 지켜 냈고, 수천의 침식자와 언데드를 뚫고 이물 앞까지 길을 텄다고 한다.
“도로이센의 왕태자, 필리오스다. 위명 높은 적기사가 이런 비겁한 기습을 해올 줄은 몰랐군.”
“경전에서 이르되, 땅을 빼앗아 가려는 무뢰한에게는 그에 맞는 대접을 베풀어 줘야 한다고 했소.”
“경이 내뱉은 말에 책임질 실력이 있으면 좋겠군.”
필리오스의 검과 방패에 푸른색 마나 블레이드가 덧씌워져 달아올랐다.
“자신이 없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거요.”
텐티아의 대검에서도 핏빛 마나 블레이드가 남실거렸다.
“하!”
다음 순간 두 기사가 맹렬하게 부딪혔다.
쾅!
텐티아의 검이 거인 왕의 철퇴처럼 떨어졌고, 필리오스는 은색 방패를 들어 그 일격을 흘려냈다.
“크윽!”
마나 블레이드를 덧댔는데도 방패가 반으로 찌그러질 정도의 위력이었으나, 필리오스는 잠시 텐티아의 몸을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텐티아의 대검을 왼발로 짓밟아 손에서 떨어트리는 동시에, 그의 검을 내질러 기게 갑옷 판금 장갑 틈을 꿰뚫었다.
카드드득!
그는 맹렬하게 튀는 불꽃을 보며 내심 경악했다.
‘마커스, 대체 강화 주문을 얼마나 새겨 놓은 거냐?’
어지간한 성벽도 일도양단하는 그의 검이, 고작 수 mm짜리 판금 한 장도 제대로 뚫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필리오스는 제 몸이 휘청이는 걸 느꼈다.
‘어마어마하군.’
텐티아가 그가 찍어누르는 다리 힘을 이겨내고 그대로 대검을 들어 올려버린 것이었다.
“으아아아!”
츠카아악!
붉은 대검이 허공을 대각선으로 베어 올렸다.
필리오스는 왼발을 빙그르르 돌리는 동시에 몸을 뒤로 젖히며 텐티아의 상단 참격을 피했다.
그는 곧바로 땅을 박찼고, 푸르게 타오르는 검을 내질러 텐티아의 어깨를 내리쳤다.
쩡!
카드드득!
맹렬한 반발음과 함께 불꽃이 튀고, 판금 장갑이 비명을 질렀다.
텐티아는 검을 거두는 대신, 왼손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고 필리오스의 흉갑을 후려쳤다.
쾅!
충격을 밀어 넣는 붕권의 묘리가 담긴 일 권에, 왕태자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수 미터를 날았다.
타앗, 텐티아는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땅을 박차며 가속했다.
제국 검술 1단계, 일체개고.
제국 검술 2단계, 불망.
제국 검술 5단계, 아사.
세 가지 극의를 동시에 펼치자, 그녀의 근육이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며 긴장했다.
마나가 근섬유를 감싸고 팽창하며 힘을 끌어낼 준비를 했고, 용수철처럼 꼬이며 호위 기사들의 공격을 반사적으로 받아칠 준비를 했으며, 머리와 눈으로 피와 마나가 쏠리며 온 세상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아.’
텐티아는 초승달 같은 날이 달린 창을 든 기사의 일격을 피했고, 에스터크 든 기사의 찌르기를 건틀릿으로 쳐냈으며, 왕태자의 흉갑과 견갑 사이를 정확히 노리고 검을 쳐들었다.
그때, 한없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 왕태자가 일어섰다.
우우우웅-!
왕태자의 검이 한없이 푸르게 달아올랐다.
텐티아는 한없이 많은 마나가 그 검에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쩍, 쩌적.
금속의 수용 한계를 넘은 마나가 몰려들자, 검 날에 금이 가고 조각이 떨어졌다.
텐티아는 가속하는 와중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도로이센에는 그쪽 검객들의 비기가 있다.’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원래 순수한 마나를 직접 방출해서 공격하는 건 오러의 경지에서만 가능하다. 마나 블레이드를 방출하려고 하면 그냥 흩어져 버려.’
‘도로이센은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쪽 애들은 나름의 비전 기술이 있어서, 갑옷 너머로 충격을 밀어 넣는 마나 블레스트를 쓸 수 있는 모양이다.’
아카데미 시절 들었던 수업 내용이 떠올랐다.
생물로서의 본능은 패배를 직감하고 몸을 굳혔지만, 기사로서의 이성은 호승심으로 뇌리를 불태우며 용감히 나아가자 외쳤다.
그리고 텐티아는 언제나 생물로서의 본능을 묵살해 온 기사였다.
‘명성 높은 기사 중에 침대에 누워 죽은 자는 없습니다.’
전장에서 죽는 게 기사의 숙원이자 낭만.
“하하하하!”
투구 안에서 광소를 토하며, 텐티아는 대검을 내리쳤다.
사아아악-!
동시에 푸른 마나 블레스트가 치솟아 올랐다.
* * *
분지 풀밭에 거대한 기계 갑옷이 드러누웠다.
하얀 판금 장갑은 멀쩡했으나, 그 안쪽 근육처럼 단단히 꼬인 강철 섬유가 연기를 뿜었다.
“참으로 용맹하구나. 적기사. 발렌 대공이 부러워질 지경이야.”
도로이센의 왕태자, 필리오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갑옷 밖으로 끌려 나온 텐티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한 채였다.
“가둬라.”
필리오스는 기사들에게 명령했고, 기사들은 종자에게 명령해 마도구 수갑을 가져오게 했다.
‘슬슬 진화도 끝나 가는군.’
그는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언제쯤 잡혀 올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불타는 막사 사이에서 두 인영이 걸어 나왔다.
난장판이 된 숙영지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제복 차림이었다.
“아직 텐티아 경을 죽이지는 않았네. 그래. 다행이야. 너랑 나에게 모두.”
그 목소리는 약간 떨렸으나,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서늘하고 비열했다.
“발렌시아누스?”
“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아슬아슬했어. 얼굴을 기억은 하고 있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너희 관계가 어떤지 정확히는 몰랐거든. 그런데 표정 보니까 대충 정답인 모양이야.”
경박하니 넘긴 백발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노란 눈동자는 그 눈을 주었다는 고룡처럼 번들거렸다.
“항복해. 안 그러면 천천히 죽게 내버려 둘 거야.”
발렌시아누스의 품속에는 기절한 율리아가 안겨 있었다.
검은 머리에 청초한 인상의 검객은 극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고,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다.
기절한 상태로도 옅은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필리오스는 진노하며 한 걸음 나서려 했고, 기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고작 검객 하나입니다!”
“침착하십시오.”
“안 됩니다.”
제국이든 왕국이든 기사가 입을 놀리면 안 좋은 결과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그 말은 모두 역효과만 불러왔다.
필리오스는 하늘을 우러러 포효했다.
“내 이름과 검과 광명신께 맹세한다.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댄다면, 네 기사도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그때 발렌시아누스조차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난 고통스럽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데, 저 검객은 어쩐지 모르겠군.”
텐티아가 천천히 눈을 떴고,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되리라 철저히 믿어야만 가능한, 여유만만한 목소리였다.
“날 죽여보시오. 태자. 이왕이면 백 년간 소문이 날 정도로 잘 죽여보시오. 하지만 기억하시오. 내 주군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가학적이며 잔혹한 분이시지. 2년 넘게 옆에서 충언을 올려도 도무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아.”
발렌시아누스가 검은 날을 가진 검을 뽑아 율리아의 발등 위에서 치켜들었다.
“아직도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나? 그럼 내가 약간의 도움 정도는 줄 수 있을 듯하군.”
당장이라도 검객으로서의 생명을 끝내버릴 듯한 기세였다.
텐티아는 필리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