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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텐티아는 필리오스의 천막에 자리를 잡았고, 오래지 않아 세레라지에와 마커스, 두 기계 기사가 내려왔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마커스는 텐티아의 기계 갑옷을 보자마자 한쪽 눈에서 눈물을, 반대쪽 의안에서 소금을 약간 녹인 성수로 만든 인공 눈물을 흘리며 수리를 시작했다.
세레라지에는 필리오스가 가지고 있던 회복 포션을 통해 율리아가 싸우지 못할 정도로만 치료했다.
텐티아 경은 따로 챙겨온 백금 갑옷으로 갈아입고, 필리오스를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전하. 기사답지 않게 추악한 인질극 따위를 벌인 걸 굳이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따진 것 같네만, 고맙네.”
“그는 이미 장성한 지 오래고, 휘하 기사들에 대한 지배력도 충분하며, 책임감 역시 강해 보입니다.”
“그렇지. 기사들이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으니 말이네.”
필리오스는 마도구 수갑을 차고 천막 한쪽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기계 기사가 그를 감시했고, 본래 그를 모시던 시종과 하인들이 그대로 그를 모셨다.
“그런데 왜 애인 하나를 버리지 못한 것입니까?”
“경. 그것을 우습게 보지 말게.”
“광명교에서는 그것이 가장 강한 힘이라고 하지요. 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호승심과 출세욕, 명예욕이 너무 강해서일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아주 잘 알지는 못하네.”
제이릴리스를 향한 내 마음이 보통 남녀 간의 정욕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 짧고 잔인하며, 더없이 이기적인 주제에 의심까지 많고, 밀짚에 붙인 불처럼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꺼지기도 하지.”
“음.”
“예의범절이란 찾아볼 수 없고, 그것이라면 모든 이상한 일을 당연하게 믿게 할 정도로 오만해.”
“완전히 망나니로군요. 흠. 그렇게 보면 강한 듯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잃지. 그래서 왕이 그것에 빠지면 나라가 기울고, 대귀족들은 언제나 그것과 결혼을 따로 두지. 그래. 좋은 예는 아닌 듯하나, 폐하가 마경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어떤 꼴이었나?”
텐티아 경이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를 버릴 생각까지 하셨지요.”
“그것은 원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고, 원하지 않는다고 찾아오지 않는 게 아니니. 그것이 머물고 있을 때는 그것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듯하나-.”
나는 필리오스에게 조소를 보내며 말했다.
용맹하던 얼굴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그것이 떠나고 난 다음에야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거대했는지 알아차리지.”
“전하께 어울리는 건 아닌 듯합니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폐하께 그리도 깊은 충정을 바치는 것일세. 그분은 절대로 인질 따위가 되지는 않으실 테니.”
텐티아 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내게 보고를 올렸다.
“밖에 왕태자의 행정관들이 와 있습니다. 만나보겠습니까?”
“여기 천년만년 있을 수는 없지. 바로 들여보내 주게.”
* * *
나는 본래 필리오스의 자리였던 곳에 앉아 필리오스의 행정관들을 기다렸다.
곧바로 천막 문이 열리고, 행정관 하나와 필리오스의 부관으로 보이는 기사가 들어섰다.
행정관은 검과는 담을 쌓고 지난 듯했고, 기사 역시 텐티아 경이나 바르바토스 경보다는, 르세나 경에 더 가까운 인상이었다.
얼핏 보였는데, 도로이센의 기사 수십과 검객 백여 명이 막사를 포위하고 있었다.
나는 승리감에 도취 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점잖게 늙은 행정관과 마주 앉았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몹시 반갑군.”
내 밝은 인사에, 행정관과 기사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예. 전하.”
“…….”
행정관이 애써 인사했고, 기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고자 했는가?”
사실 밖의 기사들과 검객들이 죄다 들이치면 아무리 나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수십 정도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겠지만, 나는 두 번이나 죽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언제나 하나도 겁먹지 않은 듯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주 잘 먹혀들었는지, 행정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외교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설마 도로이센의 검왕 엔시스 전하께서 가만히 있으시리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나는 풍선에 바늘을 찌르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위신 때문에라도 나서시겠지. 하지만 엔시스가 나서면 제이릴리스 폐하라고 안 나서시겠는가?”
“엔시스 전하는 지척에 계시고, 제이릴리스 황제는 저 멀리 솔레타라스에 있으십니다.”
터지기 직전의 긴장감을 즐기듯, 상대를 여기저기 구석구석 쿡쿡 찌르며 웃어댔다.
“제이릴리스 폐하는 벼락을 타고 하늘을 나시며, 수도에는 비공정 니벨룽겐이 있지. 도로이센 왕국이 도로이센 공국이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야.”
“엔시스 전하는 소드 마스터이십니다. 대공 전하와 기사가 아무리 용맹하다 한들, 목숨을 아까워하시는 게 현명하실 겁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늘하게 웃었다.
“그렇지. 그라면 반드시 올 거야.”
일순 행정관과 부관 기사의 얼굴이 굳고, 필리오스가 고개를 들었다.
“대공. 설마 처음부터 아버지 전하를 노렸느냐?!”
* * *
엔서스 폰 도로이센.
도로이센 왕국의 국왕이자 역대 최장수 소드 마스터.
검왕, 기사왕 등으로 불리며, 솔레타라스 제국의 침범을 물리친 전쟁 영웅.
그리고 침식에 물들어 천천히 썩어가는 괴물.
회귀 전에는 완전히 침식되어 무시무시한 침식자가 되었고, 왕국의 기사들까지 침식시켜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트렸다.
강력한 권력자이자 검객이 침식자로 활동하니 그 위세는 어마어마했고, 주변 소국은 삽시간에 전화에 휩싸였다.
이미 시기상 마테오스조차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을 거다.
물론 이걸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소드 유저만 되어도 어지간한 정신 파동을 버텨낼 수 있다.
하물며 소드 마스터가 침식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제국 말고 다른 나라에 소드 마스터가 있는 걸 내가 용납할 것 같았어?”
나는 다리를 꼬며 오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행정관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고, 부관 기사가 검 손잡이로 손을 내렸다.
“거기까지.”
텐티아 경이 부관 기사의 어깨를 잡았다.
필리오스가 나를 쏘아보았다.
“네놈이 아버지 전하를 이길 수 있을 듯하더냐?”
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없이 장갑을 벗고 소매를 걷었다.
정령화된 내 손은 팔꿈치까지 반투명했고, 그 반투명한 살에 군데군데 밝은 암적색 비늘이 돋아 있었다.
“!”
행정관, 부관 기사, 필리오스가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이긴다고는 못하겠는데,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은 있어.”
거짓말이다.
양심이 깊게 찔리는 감각이 들었다.
난 다시 장갑을 끼며 단조롭게 읊조렸다.
“생각해 보니까 웃겨. 땅 빼앗겠다고 쳐들어온 놈들 상대로 싸우고 있는데, 왜 내가 악당이 된 기분이 드는 거지?”
텐티아 경과 세레라지에가 눈빛을 보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나 역시 눈빛으로 답했다.
‘분위기 잡고 있으니까 입 다물라.’
“마커스. 율리아를 부축해. 전서구가 있는 도시까지 가서 솔레타라온에 편지를 보낼 거다. 엔시스가 움직일 거라고. 이제 왕태자는 걱정하지 마. 그 여자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마커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나는 만족감에 젖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행정관과 부관 기사가 치를 떨었고, 나는 그들에게 조소를 흘렸다.
“슬슬 나가 볼까?”
해가 지고 있고, 아무리 인질이 있다지만 뻘쭘하게 적진 한가운데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엔시스가 오는 게 확실해졌으니, 이제 나는 제이릴리스에게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었다.
이 무너져가는 몸뚱이를 이끌고 소드 마스터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필리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쳤다.
“안 된다. 밖에 이물과 침식자, 마수가 돌아다닌단 말이다.”
그의 눈에 새빨간 핏발이 돋아 있었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네 애인에게는 손끝 하나 안 댈 거야. 억지 부리지 마.”
“밤에만 느껴진다.”
“세레라지에 누나도 못 느꼈다는데 뭔 소리야?”
“이 지역의 마나 흐름은 원래 부자연스러웠단 말이다!”
“그럼 너도 같이 가자. 뭐가 있는지 구경이나 하게.”
나는 그를 잡아끌고 일행과 함께 막사를 나섰다.
“……!”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와 검객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그들을 유유히 헤치고 숙영지 바깥쪽으로 향했다.
삐이이이-.
텐티아 경이 호각을 불어 와이번을 불렀다.
“조금 오래 걸리는군.”
“뭘 사냥하고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해가 완전히 진 다음에도 와이번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발렌시아누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커스. 이 일대에 와이번과 싸워 이길 만한 마수나 맹수가 있나?”
마커스는 고개를 저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재차 물었다.
“와이번 정도면 최상위 마수지요. 이 척박한 땅에는 산양이나 뛰어다닐 겁니다.”
“그럼 진짜로 침식자나 이물이 있을 가능성은?”
마커스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침식은 결국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오면서 보셨듯 이 일대에는 있던 도시도 망하고 있지요. 이물의 기운 역시 아직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삐이이익-.
발렌시아누스는 다시금 호각을 불고 말했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
필리오스는 그 말에 거의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럼 나와 율리아, 아니. 율리아라도 안으로 들여다오. 내가 사람도 없는 땅을 정복하자고 이 많은 군대를 데려온 줄 아느냐?”
“말이 짧다.”
“율리아만 좀 안으로 들여주게나, 아니. 들여주시오, 아니. 들여주십시오.”
“시끄러워.”
발렌시아누스는 너무나 망나니다운 반응을 보였고, 그러면서도 숲속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상 뭐라도 있을 확률이 있다. 실체가 없는 고스트나 레이스 계열의 이물일 수도 있어. ……푸른 빛?’
어둠 속에서 파란빛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폐광 쪽에서 내려오는 듯했다.
숙영지의 검객들과 병사들이 분주하게 내달렸다.
“저쪽이다!”
“발리스타 준비!”
“아까 망나니 대공이 다 태워 먹었습니다.”
“그럼 아바레스트 중쇠뇌라도 준비해! 원거리에서 잡아야 한다.”
한두 번 습격당한 게 아닌 듯, 낮에 큰 교전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말하게.”
“뭔가 있어서는 안 될 게 있는 건 확실해졌으니, 지금껏 있던 일과 별개로 도의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희는 다 같은 인류 아닙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커스.”
“예.”
“율리아와 왕태자 잘 감시하고 있게.”
다음 순간 그의 동공이 세로로 변했고.
화르르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발사!”
쐐애액! 쐐애액! 쐐애액!
마법 회로 새겨진 중쇠뇌 아바레스트가 허공을 갈랐다.
파삭!
거대한 촉에 맞은 인영들이 깨지며 바닥을 굴렀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위력이 부족합니다.”
“발리스타가 필요합니다!”
그때 밤하늘을 거대한 불의 창들이 수놓았다.
쐐애애애-!
긴 파공성을 울리며 나아간 불의 창은 푸르게 발광하는 인영을 꿰뚫고 폭발했고, 반경 수십 미터에 화염 파도를 일으키며 번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죽이고 확인해 봐도 늦지 않겠지.”
백발 금안의 소년 대공이 어둠 속에서 자신만만한 웃음을 흘리며 걸어 나왔다.
하사관은 그 위력에 경탄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대공 전하. 저놈들 불에 안 탑니다.”
“뭐?”
“저놈들 수정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화염 면역입니다!”
“나왔다! 소드 유저 이하는 엎드리고 귀 막아!”
푸른 인영들이 숲 밖으로 나왔다.
“끼에에에에엑!”
유난히 날카로운 정신 파동이 울리고, 병사들이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발렌시아누스와 세레라지에, 텐티아는 그제야 그들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마른 몸과 푸르게 빛나는 눈과 입, 군데군데 난 크고 상처에서 자라난 푸른 결정.
마치 좀비와 미라 사이의 언데드에 거대한 푸른 수정을 잔뜩 박아둔 듯한 모습이었다.
발렌시아누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불길을 일으켰다.
치이이익!
살점 부분은 확실히 타들어 갔지만, 수정 부분은 달아오르기만 할 뿐 거의 녹거나 타지 않았다.
그때 세레라지에는 과거 상아탑에서 보았던 진귀한 시약을 떠올렸다.
‘정신에 영향, 화염 내성, 창백한 청록광.’
“발렌!”
“뭐 아는 거 있어? 기록에 있는 거야?”
“저 수정 결정을 정제하면 엄청나게 비싼 시약이 된단다! 충격에는 그리 강하지 않으니 텐티아 경이랑 검 들고 가서 다 뽑아 오렴!”
“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