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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누스는 비싼 시약이라는 말을 들자마자 탐욕으로 눈을 빛내며 돌진했고, 텐티아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뒤 그를 따랐다.
세레라지에는 대지 마법으로 지면에 넓고 얕은 늪을 만들었다.
“가져와달라고 또 가져와 주는구나.”
새침한 웃음을 흘리면서.
질퍽.
발목까지 오는 늪은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거기 가만히 서 있으면 좋겠잖니.”
세레라지에가 그 늪을 다시 바위처럼 단단히 굳혀버리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
바닥에 달라붙은 침식자들은 도로이센 검객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우리도 간다!”
“솔레타라스의 기사에게 지지 마라.”
“2인 1조로 움직여!”
적잖은 수가 목이 베였고, 더 많은 수가 발렌시아누스의 불길에 타올라 푸른 수정질 결정체만 남기고 스러졌다.
도로이센의 마법사들이 다가와 물었다.
“마스터 세레라지에. 혹시 이 결정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실험 기재를 빌려드릴 테니 한 수 배울 수 있을까요?”
“저희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30년을 동문수학한 친구 둘이 오늘 발렌시아누스 대공과 그의 적기사에게 죽었지요. 하지만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레라지에는 잠시 고민했다.
‘정제 자체는 어렵지 않잖니. 보여주는 정도는 문제없단다. 중요한 건 회로를 그릴 때 응용하는 법이지.’
‘하지만 정제법도 상아탑이 권리를 가지고 있잖니. 이것도 유출이라면 유출이야.’
‘침식 부산물을 정화도 안 하고 가지고 다닐 수는 없어. 이 정도 양을 버릴 수도 없단다. 한 3kg 가져다주면 아주 좋아하실 거잖니. 정제법 유출 정도야 신경도 안 쓰실 거란다.’
그녀는 이내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발렌시아누스와 함께 마법사들의 천막으로 향했다.
“성수랑 황산이 필요하단다. 황산이 없으면 염산도 상관없잖니.”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검은 기름을 최대한 맑게 정제한 게 필요한데, 올리브유로도 대체할 수는 있잖니.”
“둘 다 있습니다.”
“소금은 당연히 있지? 혹시 후추 섞인 요리용 소금을 가져오면 코에 부을 거란다.”
마법사 하나가 흠칫했고, 세레라지에는 피식 웃은 뒤 수정 결정체를 기름에 담갔다.
“발렌. 잘 보렴. 이 누나가 멋진 걸 보여주려 하잖니.”
발렌시아누스는 오랜만에 세레라지에의 마술 같은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자잘한 흉터가 많은 하얀 손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새침한 얼굴에 진지한 미소를 지으며,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기재와 시약, 결정체에 한없이 집중했다.
탁, 척, 파삭, 화르륵, 사각사각.
녹이고, 태우고, 가열하고, 굳히고, 부수고, 다시 다른 시약으로 녹인 뒤 남는 걸 모아 가루로 만드는 과정이 이어졌다.
“오오오오.”
“세상에.”
“…….”
도로이센 마법사들은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깊은 밤, 마침내 정제된 결정 가루와 정제된 결정이 만들어졌다.
세레라지에는 그제야 피로를 느끼며 휘청였고, 발렌시아누스는 뒤에서 그녀를 안으며 부축했다.
“누나는 천상 마법사구나.”
세레라지에는 새침하니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어서 돌아가자꾸나. 보여줄 게 많단다.”
* * *
필리오스는 그들이 ‘돌아온’ 곳이 왜 그의 막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냥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일단 율리아랑 같이 살아남은 걸로 만족하는 게 현명하겠군. 기사들이 이미 움직였겠지만, 그래도 상세한 소식을 전해야 한다. 황형 발렌시아누스와 철혈당주 마커스가 여기 있고, 그들이 침식자에게서 기묘한 결정체를 얻었다고.’
그는 시중을 드는 시종에게 은밀히 말을 속삭였다.
“나가서 전하께 전서구를 보내라.”
끄덕.
그 시종은 천막 밖으로 나가는 길에 텐티아에게 붙잡혀 천막 안으로 나동그라졌다.
“왕태자. 어디서 수작을 부리십니까?”
필리오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장하겠구나.’
그의 눈은 멍해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텐티아와 필리오스가 눈치싸움을 벌이는 동안, 천막 한쪽에서는 발렌시아누스와 세레라지에, 마커스가 결정 기둥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레라지에가 흡음 결계를 치고, 목소리까지 내리깔며 말했다.
“발렌. 옛것이라도 모두 악신이 아닌 건 알잖니?”
“그렇지. 아몬이나 유스타티아처럼 신으로 숭배받았던 옛것도 있고, 몇몇 흑마법 학파나 사령술사들이 섬기는 죽음의 신처럼 공존할 수 있는 옛것도 있고.”
“이것도 비슷하단다. 물론 아몬이 선한 신에 가깝다면, 이쪽은 악한 신에 가깝잖니. 그래서 한번 정제해서 쓰는 거고.”
발렌시아누스가 눈을 빛냈다.
“효과는 뭔데?”
“크게 세 가지가 있단다. 첫 번째는 공명, 두 번째는 강화, 세 번째는 형태.”
“공명?”
세레라지에는 손가락만 한 크기로 만든 결정 기둥 세 개를 테이블 위에 연달아 세우고, 한 기둥에 전격을 튀겼다.
파직!
그러자 세 기둥 모두에서 불꽃이 튀었다.
파지지직!
“이런 거란다. 이 결정은 결국 다 한 덩어리야. 그놈들이 말하는 합일 같은 거지. 그러니까 구조를 이렇게 바꿔 주면-.”
세레라지에가 세 기둥을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한 번 더 불꽃을 튀겼다.
파지직, 파직, 파직!
푸른 결정 사이를 노란 전격이 쉴새 없이 돌아다니며 점점 증폭되었다.
세레라지에는 증폭된 전격을 빨아들여 천막 밖 하늘로 쏴버린 다음 말했다.
“이걸 마나로 하면 어떻게 될 것 같니?”
발렌시아누스가 흡족하니 웃었다.
“마음에 드는데? 그럼 형태는 뭐야?”
이번에 답한 건 마커스였다.
“이 지역의 몰락이 시작된 건 한두 해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까 그 침식자들은 적어도 수십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에요. 심지어 이 지역은 여름에 꽤 습합니다.”
“좀비가 스켈레톤이 되다 못해 썩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라는 말이군.”
“그런데도 아직 불탈 살점이 남아 있었습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회귀 전 보았던 몇몇 옛것들을 떠올렸다.
저세상의 힘을 많이 받아들이면 많이 받아드릴수록 강해지고 견고해지는 동시에 이성과 육신의 형태를 잃어 갔다.
‘수십 년간 침식되었는데도 그 정도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아주 안정적이다. 하물며 정제까지 했다면 독기도 빠졌을 테고, 적게나마 상아탑에 유통이 된다면 교회가 용인했을 정도로 안전하다는 거겠지.’
“그럼 약으로 만들어서 먹어도 되는 건가?”
세레라지에와 마커스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색이 다른 눈과 재질이 다른 눈 두 쌍이 그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려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왜, 왜?”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애니? 왜 다 입에 가져가려고 하니? 아무리 정제했어도 결국 다른 세상에서 온 거란다. 물론 방금 보여준 대로 강한 힘을 쓸 수는 있겠잖니. 하지만-.”
“하지만?”
마커스가 냉큼 말을 받았다.
“저도 옛 자료로만 본 내용이지만, 점점 더 많은 양을 먹어야 육체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아. 그럼 안 되지.”
발렌시아누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수정 기둥에서 빠르게 눈을 뗐다.
‘한두 해 살다 죽을 인생 아니다.’
그는 이미 57살까지 살아보았고,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행동의 문제점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망나니처럼 살았다가 온몸이 다 망가져 수십 년간 고생하지 않았던가?
‘이미 용찬에 정령 정수 이식에 별걸 다 했다. 여기서 부작용 있는 걸 더 먹을 수는 없어. 절대로!’
* * *
나는 정제한 결정을 섭취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했고, 한쪽에 선 텐티아의 백색 기계 갑옷을 향해 눈을 돌렸다.
아직 완전히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형태 자체는 복구되었다.
“마커스. 그럼 이 결정으로 저 기계 갑옷도 더 강화할 수 있나?”
마커스와 세레라지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잖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지시했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잘됐다.
“그럼 부탁하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능하면 내일 아침까지 해주면 좋겠군.”
“예?”
마커스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재질 다른 눈동자가 다른 방향으로 돌았다.
“왜 그런 눈빛인가?”
난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몰라 물었고, 마커스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 목덜미를 잡았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서 뭘 하라는 말씀입니까? 제 장비가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장인은-.”
“그 말 하지 마! ……장인은 도구를 가립니다. 화로도 없고 모루도 없고 망치도 없는 대장장이에게 철광석만 가져다준다고 보검과 갑옷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할 수 있다고 했잖나?!”
“저도 이걸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고요!”
그때 세레라지에가 헛기침했다.
나와 마커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 저쪽 마법사들에게 굵은 은 철사랑 세공용 철필은 있던데, 어찌어찌 할 수 있지 않겠니? 융합 마법은 내가 할 수 있잖니.”
마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레라지에 대공 전하. 지금 저보고 직접 회로도를 새기라는 말씀입니까? 심지어 조그마한 마도구 하나도 아니고 기계 기사 세 기에?”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쾌한 음성이 천막 안에 울렸다.
“당연하잖니.”
나는 마커스를 향해 근엄히 말했다.
“마커스 후작. 종합공방 예산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지?”
마커스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런 빌어 처먹을 망나니를 봤나!”
“꼬우면 그때 이기지 그랬나?”
나는 광소를 터트렸고, 세레라지에와 마커스는 철필과 은 철사, 결정 기둥을 들고 텐티아 경의 기계 갑옷 장갑판을 뜯기 시작했다.
“시X! X발!”
마커스가 육두문자를 퍼부어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필리오스는 율리아와 나란히 앉아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나는 두 기계 기사에게 둘의 감시를 맡기고, 백금 갑옷 차림의 텐티아 경을 이끌고 숙영지 바깥쪽으로 나갔다.
“경. 정신 바짝 차려야 하네. 자칫하면 여기서 다 죽을 수도 있을 듯하니.”
* * *
밤이 깊었고, 하늘에는 은하수가 찬란했으며, 덩굴 자욱한 숲속에서는 푸른 안광을 내는 결정 침식자들이 돌아다녔다.
텐티아 경이 주변을 경계했고, 나는 목소리를 착 낮췄다.
“도로이센 국왕이 왜 이 척박한 땅을 공격하려 하는지 알겠군. 운석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운석은 최근에 떨어진 게 아니야. 교묘한 거짓말이었군. 몇십 년 전, 몇백 년 전, 어쩌면 이종족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어.”
텐티아 경이 눈을 부릅떴다.
“……폐광.”
“옛것 부산물치곤 아주 안정적인 물질이니 한때 시약으로 유통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마법사나 기사들로서는 정제가 안 된 상태에서도 그리 큰 위협은 되지 않았을 테고 정제법을 알아낸 다음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광산 인부들에게는 치명적이었겠군요.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더욱요.”
“원래도 그리 살기 좋은 땅은 아니었으니, 다들 금방 떠나갔겠지. 영토 분쟁으로 혼란스러워진 다음에는 잊혔을 거고.”
그녀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까 왕태자가 시종을 통해 국왕에게 말을 전하려 했습니다. 피로와 충격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얄팍한 행동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시종을 잡기는 했지만, 이미 기사들은 저희의 눈을 피해 전서구를 띄웠을 겁니다. 오래지 않아 소드 마스터가 도착하겠지요.”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엔시스는 260년을 살아왔다.
어쩌면 이 운석이 떨어졌을 때도 왕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 결정과 효능에 대해 알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회귀 전 이맘때에는 충성맹세를 거부한 철혈당주 마커스가 기계 기사와 마총 부대를 이끌고 사방을 약탈하고 다녔다.
도로이센도 국경 방어에만 급급했겠지.
그러나 이번 역사에서 마커스는 1년 동안 수도에 처박혀 있었고, 상처 입은 검왕은 다시 제국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침식자 소드 마스터가 더 강해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회귀 전에도 정체를 단단히 숨기고서 제 왕국의 기사들과 대신들을 하나둘 오염시키던 놈이다.
놈을 잡기 위해서는 참수 작전이 아니라 강대국 도로이센과의 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그때 제이릴리스가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혀야 했는지 기억한다.
그녀가 이번 삶에서도 인간 도살자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었다.
“텐티아 경. 와이번들은 돌아왔나?”
“예. 전하. 다행히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었습니다.”
“도시로 가서 폐하께 도움을 청하는 전서구를 보내게. 난 결정체 운석의 본체를 찾겠어. 엔시스보다 먼저 가지든, 부수든 뭐라도 해야겠네.”
“위험합니다. 만에 하나 그와 싸우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텐티아 경이 이례적으로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난 모든 용기를 쥐어짜 턱을 쳐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경. 난 발렌시아누스야. 다 생각이 있어.”
소드 마스터와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충분한 결정 파편을 모은 뒤 일제히 공명시켜 몸 안쪽을 공격하거나, 본체를 부숴서 결정 파편으로 몸을 안정시키고 있을 엔시스에게 타격을 주는 방식은 가능할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럴 거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