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42)화 (242/340)

(242)

텐티아는 그날 밤새도록 와이번을 몰아 인스트루멘툼의 중견급 도시로 향했고, 제이릴리스에게 전서구를 보내고 돌아왔다.

“한번 날면 일주일간 계속 바람을 탄다는 맹금에게 맡겼습니다. 황궁에 무사히 도착할 겁니다.”

발렌시아누스는 율리아를 인질로 잡은 채 폐광 입구를 찾아 산을 헤맸다.

폐광은 수십 개의 입구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무너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하께서는 정말 망나니라는 호칭답게 명예 따위는 모르는 분이시군요. 왕국의 검객과 왕태자를 이렇게 대하시다니요.”

“명예를 모르는 자에게 명예롭지 못하다고 욕해 봐야 아무런 감상도 들려줄 수 없다네. 슬슬 입이 움직일 정도로 회복되었으면 기계 기사 팔에서 내리는 건 어떤가?”

“……다리는 아직 잘 안 움직입니다. 설마 제 힘줄을 끊어 버린 건 아니시겠지요?”

“그랬다가는 눈이 돌아간 왕태자가 달려들었겠지. 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그래서 인질을 잡은 거기도 하고. 얌전히 있으면 죽일 생각은 없네. 돌아가서 포션이나 잘 발라 주면 바로 나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얌전히 있게.”

텐티아, 세레라지에, 두 기계 기사, 마커스까지 온종일 산을 헤맸다.

“찾았나?”

“오늘도 허탕입니다.”

“밤에 놈들이 몰려나오는 곳을 찾으면 되지 않겠니?”

“위험한 것도 위험한 건데, 걔들은 광산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땅속에 묻혀 있다가 기어 나오는 거더라고. 땅에 묻어둔 채소 같은 느낌이야.”

“무슨 비유가 그러니?”

“아, 저 오늘 산양 마수 잡았습니다. 굴 속에서 자고 있는데 제가 들어오니 들이받으려 하더군요.”

“괜찮은가?”

“이마를 한 대 때리니 죽었습니다.”

애꿎은 마수만 떼로 죽어 나가고, 필리오스는 며칠 사이에 20년쯤 늙었으며, 마커스는 밤마다 욕지거리를 해대며 텐티아의 기계 갑옷에 결정 파편을 이식했다.

“손톱이 세 개나 빠졌습니다!”

그렇게 5일째 되던 날, 텐티아가 산이 울리도록 고함을 쳤다.

“발렌 전하!”

“위?”

그녀의 목소리는 폐광이 있는 골짜기가 아니라, 바위산 중턱에서 들려왔다.

발렌시아누스는 가시덩굴을 헤치고, 드러누운 세레라지에를 부축하며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흥분한 텐티아의 뒤로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입구가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녹슬지 않는 철로 만든 기둥이 갱도를 바치고 있었고, 푸른 결정이 곳곳에 솟아 있었다.

마커스 입구 근처에 있는 거대한 비석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산사태에서 살아남은 건 여기뿐인가 보군요. 전하. 이게 지도입니다. 광산에서는 언제나 이런 걸 만들어놓지요. 전하가 찾으시는 정수는 아마 제일 깊은 곳에 있을 겁니다.”

그는 비석 위로 쌓인 먼지를 털어냈고, 바위에 새겨진 개미굴 같은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렌시아누스는 갱도의 깊이를 어림짐작해본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 운석 본체를 발견한 모양이다. 그리 깊이 묻히지 않아서 깊이가 얕은 대신 가지 굴이 많아. 교전이 없다면 수 시간 안에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을 듯하군.’

그는 곧바로 돌입을 결정했다.

“누나, 경. 지금 바로-.”

뿌우우우-!

그때 폭력적인 나팔 소리가 골짜기 전체를 뒤흔들었다.

발렌시아누스는 경험으로 그것이 도로이센 왕국의 진군나팔임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젠장! 왜 하필 지금!”

그는 발작하듯 주먹을 말아 쥐며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척, 척, 척, 척.

적어도 3천은 되어 보이는 군대가 발맞춰 분지 안으로 행군해왔다.

직선거리로는 의외로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건 다 기사들 문장이고…… 결국 납시셨군.’

방패 뒤로 교차 된 두 자루 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건 도로이센의 검왕 엔시스의 행차를 의미했다.

발렌시아누스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이미 제 상태는 아니겠지만,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깊은 떨림이 심장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계획과 달리 아직 충분한 수정 결정을 모으지도, 본체를 찾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지시했다.

“마커스, 세레라지에 누나. 내려가서 운석 본체를 파괴해. 엔시스 손에 넘어가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하고 운을 떼며 그는 말을 이었다.

텐티아 없이는 버틸 수 없었지만, 텐티아는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경은…… 와이번을 준비시켜 놓게. 언제든 이탈할 수 있게-.”

텐티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그럴 줄 알았기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

그 한숨에 오만 가지 모순된 감정이 어려 있었다.

텐티아는 투구를 눌러쓰며 말했다.

“여기는 제게 맡기고, 먼저 가십시오.”

“못 이길 거네.”

발렌시아누스는 끝까지 텐티아를 만류했고, 텐티아는 호승심 넘치게 웃었다.

“제가 죽기 전에 전하가 나오시면, 저희가 이긴 겁니다. 자신 없으십니까?”

* * *

비단결같이 윤기 나고 까마귀처럼 검은 긴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었고, 호수처럼 푸르고 맑은 눈동자는 쉴새 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일대의 지형지물을 파악했으며, 마르고 탄탄한 장신은 20대의 그것이었다.

그는 소드 마스터가 되어 영원한 젊음과 완벽한 육체를 얻었고, 세상 사람들에게 검왕이라 불렸다.

강대국 도로이센의 국왕, 엔시스는 전신 판금 갑옷으로 그 장신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많은 검객이 검만으로 끝을 보고자 갑옷조차 입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검왕이라 불리는 사내치고는 매우 사려 깊은 행동이었다.

척, 척, 척, 척.

그는 기사들, 검객들과 함께 왕태자 필리오스의 숙영지로 발을 들였다.

“…….”

그는 발렌시아누스의 불길에 반파된 숙영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전서구의 내용을 떠올렸으며, 곧바로 왕태자의 기사들을 불러 꾸짖었다.

“경들은 태자가 태자답지 못한 짓을 하게 내버려 두었군. 짐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할 자가 여색에 빠져 임무를 소홀히 하다니.”

“송구합니다. 전하.”

“저희들의 잘못입니다. 전하.”

그 기사들은 엔시스가 아니라 필리오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고, 봉건제에서 봉신의 봉신, 즉 배신(陪臣)은 내 사람이 아니었으나, 260년간 왕국을 통치한 왕은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자리를 물려받아?’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거기 앉아 계실 분이 아니십니까?’

필리오스의 기사 중에는 내심 그런 삐뚜름한 감상을 표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기사들도 반기를 든다는 생각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엔시스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도, 그들의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도 도로이센의 왕이었다.

4, 5대에 거처 섬긴 왕을 배반한다는 건 기사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필리오스가 아버지 전하를 뵈옵니다.”

짧은 수염과 짧은 머리카락, 검은 눈을 가진 거친 인상의 사내는 지난 며칠간 20년은 늙어버린 듯했다.

그는 제 기사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은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필리오스가 10살 때도 80살 때도 엔시스는 같은 모습이었다.

불변의 검왕.

엔시스는 그런 존재였다.

엔시스가 말 위에서 필리오스를 내려다보았다.

“필리오스. 내가 뭐라 했느냐? 왕 될 자는 사적 감정을 접어놓고 나라와 신민을 위해서 몸 바칠 줄 알아야 한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전하.”

20대로 보이는 사내가 40대로 보이는 사내를 꾸짖는 건 꽤 기묘한 광경이었다.

“네 나이도 이제 여든에 가까워지지 않았느냐? 나는 네 나이 때 소드 마스터가 되어 제국과 싸웠다.”

“소자가 부덕했사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경험에서 비롯된 완벽한 정론이었기에, 누구 하나 반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엔시스가 재차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저 분지 반대편에서 누군가 혈혈단신으로 걸어 나왔다.

“도로이센의 국왕 엔시스는 솔레타라스 제국의 신성 황제께서 보낸 전권대사, 발렌시아누스 전하의 전언을 받드시오!”

그녀는 철혈당주 마커스의 기계 갑옷에 백금색 판금 장갑을 덧씌운 듯한 특중갑을 입고 있었다.

유려한 유백색 바탕에 햇살이 부서지고, 기하학적인 붉은 무늬는 보는 자를 위압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며, 투구 뒤로 흘러내린 붉은 비단 끈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빼앗았다.

“이곳은 역사적, 행정적으로 제국의 영토며, 제국은 그대들의 행동을 침공으로 정의하였소. 당장 퇴거하지 않을 시, 무력 행사에 나설 수 있음을 알리는 바요.”

목소리마저도 늠름했으며, 당당한 걸음걸이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엔시스와 필리오스는 각자 다른 이유로 신음성을 흘렸다.

“솔레타라스에도 저런 기사가 있었군.”

엔시스의 신음성은 그녀의 기사다운 태도에 흡족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솔레타라스의 한낱 기사보다도 못해 보이는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었고.

‘혼자서 아버지 전하를 막아선다고? 결국 나도 못 이겼으면서? 자결하려는 건가?’

필리오스의 신음성은 텐티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당황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왕의 창끝’이라 불리는 도로이센의 이름 높은 기사가 외쳤다.

“그럼 무력 행사에 나서 보아라!”

도로이센의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그래. 설마 진짜겠어?”

“살려줄 테니 돌아가 그대의 주군에게 말을 전하라! 도전은 언제나 환영이라고!”

그들은 만약 텐티아가 두고 보자, 따위의 말을 하고 도망쳐도 진지하게 추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3천 군대와 수백 검객, 백 명도 넘는 기사 앞에 홀로 선 것만 해도 용기 있는 일이었고, 도로이센은 언제나 용기 있는 자들을 칭송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면.

“발렌시아누스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텐티아는 그들보다도 기사도에 깊게 젖어 사는 기사였다.

탁, 타악!

그녀의 발걸음은 육중한 특중갑을 두르고 있는데도 가벼웠고, 땅을 접어 달려오듯 민첩했으며, 두려움이나 오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투구 뒤로 늘어진 붉은 비단 리본 끈이 너울너울 휘날리는 가운데, 엔시스는 세작의 보고에서 나왔던 이름을 떠올렸다.

‘망나니 황형, 그리고 그의 적기사.’

그는 한 손을 들어 쇠뇌를 겨누던 사수들을 물렸고, 검은 머리를 한데 모아 묶었으며, 군청색 투구를 썼다.

“도로이센의 왕, 엔시스라 한다!”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돌격창 랜스 대신 장검을 쥐었다.

‘내게 도전하는 자가 얼마 만인가?’

사아아아-.

검왕의 검에서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가 일렁였고, 적기사의 검에서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타올랐다.

둘은 가까워지는 동시에 마주 검을 쳐들었고.

사악-!

한 차례 교차했으며.

쾅!

다음 순간 적색 충격파가 분지에 넘쳐흘렀다.

* * *

단 일격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특중갑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이고, 피바다같이 일렁이던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텐티아는 한참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뒤 다시 마나 블레이드를 뽑아냈다.

사아아아-!

그 기세는 여전히 강렬했으나, 한 차례 억지로 깨진 직후에 뽑아낸 터라 약간의 균열과 흔들림이 있었다.

검왕이 무심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사람의 기사이자 왕으로서, 그대 같은 기사를 죽이고 싶지는 않군.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살려 주고 싶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기사는 없다.”

“대단하군. 내게 충성을 바치지 않겠나?”

진심으로 혹한 듯한 어조였다.

그러나 텐티아는 비릿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귀하께서는 목숨이 아깝고 죽음이 두려워 주군을 바꾸는 기사가 필요한가?”

“허.”

엔시스가 탄성을 토하고, 텐티아는 말을 이었다.

“또한, 난 내 주군에게 그대의 실체를 들었다. 내 주군은 온 세상에게 망나니라 불리나, 적어도 세상을 향해 위선을 떨며 사람들을 기만하지는 않는다. 죽는 한이 있어도 그대 같은 자를 섬기지는 않겠다.”

“……기만?”

엔시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노기가 섞였다.

텐티아는 유쾌하니 웃으며 분지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내 말이 틀렸다면, 당장 그 갑옷을 벗어 광명신의 햇살 아래 몸을 드러내 봐라. 그대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투구 아래, 엔시스의 푸른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짐의 자비를 거절하겠다면, 안식을 주겠다.”

다음 순간 오러 블레이드가 예리하게 춤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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