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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누스가 텐티아 곁으로 다가왔다.
“경. 괜찮은가?”
텐티아는 자꾸 아득해지는 시야를 놓지 않으려 애쓰며, 그를 바라보았다.
“……예. 전하.”
그는 평소와 같이 백발을 뒤로 넘기고, 노란 눈동자를 빛내며, 핼쑥한 뺨을 가지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기운만큼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먼저, 당장 깨지고 망가질 듯 위태롭던 기운이 한결 안정되었다.
적어도 충성맹세 당시에 보았던, 어떻게든 버티는 듯한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본래 맹렬하게 터지던 불꽃에는 진득하게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더해졌다.
지금도 주변에 ‘불의 창’이 폭발하며 피어올랐던 불길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뭔가…… 오한 같은 느낌이 더해졌다.
그의 불꽃은 여전히 붉게 타올랐으나, 불꽃 가장자리에 청록색 광채가 은은하게 맴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텐티아는 이를 악물었고,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를 지나치며 나아가 엔시스와 마주했다.
망나니 대공의 목소리에 화산 같은 열기가 어려 있었다.
“내 기사를 이 꼴로 만들다니……. 널 당장이라도 터뜨려버리고 싶지만, 대사직을 받아 엄연한 외교관으로서 왔으니 일단 제안부터 하지. 지금 당장이라도 군대를 물려라.”
“물리면?”
엔시스가 서늘하게 비웃었고. 발렌시아누스는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살려는 주겠어.”
엔시스는 비릿한 비웃음을 흘렀다.
“누가 누구를 살려 주고 있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사아아아-.
분지에 바람이 불고, 검왕의 긴 검은 머리가 비단처럼 흔들렸다.
발렌시아누스가 고개를 저었고, 천천히 장갑을 벗어 보였다.
하얀 손등이 금이 간 도자기처럼 갈라지고, 그 틈에서 주황빛으로 달아오른 기이한 결정이 번뜩였다.
그의 손을 본 엔시스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하던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너……!”
텐티아 역시 검왕 못지않은 의문을 품고 당황에 차 눈만 깜빡였다.
‘확실히 기운은 안정되었지만……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텐티아는 발렌시아누스의 손이 정령 정수 이식의 영향과 용찬의 부작용으로 아주 맛이 간 상태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원래는 일단 사람 몸뚱이 같기는 했다. 적어도 피는 흘렸어.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선을 넘으신 듯하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한없이 비슷한 분위기를 두른 이름이 떠올랐다.
‘……제이릴리스.’
발렌시아누스가 엔시스를 바라보며 가학적으로 웃었다.
“이제 조금 눈빛이 공손해졌네.”
칼로 깎아 만든 칼처럼, 위험하고 섬세하며 어딘가 동떨어진 분위기를 온몸에 두르고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네가 하려고 했던 걸, 너보다 먼저 했을 뿐이지.”
엔시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다.”
수정체 운석.
옛것으로서의 이름은 쿠이트 아즈, 통칭 아즈.
침식으로 무너져가는 몸을 떠받치기 위해 꼭 필요한 약재의 핵심 재료였다.
정말로 발렌시아누스가 아즈를 얻었다면, 그의 목숨줄은 발렌시아누스의, 제국에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감히 어설픈 속임수로 이 엔시스를 협박하려 들어!”
“거짓말 같아? 그럼-.”
엔시스의 검에서 푸르른 오러 블레이드가 타올랐고, 발렌시아누스의 등 뒤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이 피어올라 공작의 꼬리처럼 펼쳐졌다.
“확인해 볼까?”
화르르륵, 그리고 츠카아악!
불길이 터져 나가고, 푸른 섬광이 작렬했다.
* * *
전투마법사와 기사가 정면에서 맞붙으면 기사가 승리할 확률을 9할 이상으로 보았다.
반사 신경과 근력, 체력 등 신체 능력적인 면이 기사가 압도적이었고, 기사는 전투마법사와 달리 주술 회로 새긴 육중한 전신 갑옷을 입었으며, 검을 든 이상 ‘상대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공격’을 하기가 더 쉬웠다.
그리고 난 이 자리에서 그 상식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크아아악!”
엔시스의 얼굴을 새빨간 화염이 뒤덮었다.
천하의 소드 마스터가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했다.
크고 작은 불꽃의 뱀 수백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소드 마스터의 몸을 불태웠다.
몇 마리는 귓구멍을, 몇 마리는 눈구멍을, 몇 마리는 코와 입으로 파고들었고, 흉갑 안으로 들어가 몸과 땀구멍 하나하나를 직접 노리기도 했다.
썩 웅장한 모양새의 공격은 아니었지만, 시야부터 차단하지 않으면 일격에 목이 날아갔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엔시스 역시 순순히 당해 주지는 않았다.
우우우우웅!
그는 몸이 불타오르는 와중에도 검을 휘둘렀다.
츠카아악!
밋밋한 장검에서 새파란 오러 블레스트가 쏘아져 나갈 때마다, 문자 그대로 땅이 뒤흔들리고, 저 하늘에 구름이 갈라졌다.
쿠르르르!
몇 방 얻어맞은 바위산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려, 숙영지에 머물던 필리오스의 병사들이 급하게 대피해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난 검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텐티아 경, 왼쪽 위! 피하게!.”
엔시스의 검을 막지는 못해도, 최소한 오러 블레스트가 어디로 날아갈지는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건 사람 잡는 기술이 아니라, 대형 마수나 성문, 완전 변이급 침식자를 베는 기술이고, 궤도 예측 자체는 쉬웠다.
난 결코 열 걸음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서 중, 원거리 공격만 가했다.
거대 이물을 증발시켜버렸던 그때 그 불길 이상의 열기를 밀어 넣고 있는데도, 놈의 몸은 쉽게 불타지 않았다.
기계 갑옷 입은 텐티아 경을 박살 내버린 괴물이다.
근접전을 벌였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거다.
그러니 거리를 두고 착실하게 압박해야 했다.
딱!
내 손짓에 따라 불길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화살처럼 날아간 불길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엔시스의 눈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엔시스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난 제이릴리스의 망나니였고, 많은 강자와 싸워 보았으며,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는’ 방면에서의 최고 권위자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눈꺼풀 속 수분이 끓어오르고 있는 판에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쾅, 쾅!
푸른 오러가 번뜩일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토사가 튀었다.
나는 능숙한 스텝을 밟으며 피했고, 혓바닥을 놀려 심리전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로 시작했겠지. 내부는 부패하고, 제국은 쳐들어오고, 이물과 침식자는 늘어만 가고. 어떻게든 살아서 버티는 게 우선이었을 거야.”
“끄으윽!”
“그래도 어느 순간 분명히 알아챌 수 있어.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이제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네놈이 뭘 안다는 거냐!”
나는 치열한 공방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리는 걸 느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꽤 흔한 이야기 아닌가.
검, 마법, 행정, 외교, 망나니짓, 무엇이 되었든 본인의 특출함으로 나라를 멋지게 이끌었으나.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아집에 빠진 끝에 수단과 목적을 헷갈려 본인의 영원한 군림을, 영생을 바라고.
결국 침식과 손을 잡은 군주들의 이야기.
나 역시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책임과 의무감을 큰 원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으니, 언제나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엔시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베릭과 같은 소드 마스터로서 완벽히 균형 잡힌 20대의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그가 짓는 근엄한 표정은 어딘가 어색했다.
내가 그와 달리 마지막 선을 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내가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엇나가는 순간 목을 쳐줄 쌍둥이의 존재 덕분이겠지.
그러니 그런 쌍둥이를 가지지 못한 그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담아 읊조렸다.
“그때 물러났으면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거야. 이해해. 영원할 젊음과 영원할 권력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겠지. 나만이 이 왕국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그렇게 말해 준 사람들이 있었겠지.”
“!”
아주아주 잠시 엔시스의 발악이 멈췄다.
그도 분명 내심 침식자로 의심하던 마법사나 조언가들이 있었을 거다.
난 두 자루 불의 창을 동시에 허공에 띄우며 단언했다.
“넌 속은 거야.”
콰앙!
불의 창이 작렬하는 동시에, 난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콰직!
내 손아귀에서 이글이글 불타는 석탄 같은 광채가 번뜩이고, 일순 텐티아 경의 기계 갑옷과 엔시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큭!”
엔시스가 비명을 토하고, 난 마나를 끌어올리는 듯한 감각으로 지배력을 발휘했다.
난 쿠이트 아즈를 완전히 집어삼켰고, 모든 파편은 이제 내 의지 아래 있었다.
“터져라.”
엔시스의 판금 갑옷 안쪽에서 폭발이 일었다.
거품 터지는 듯한 감각이 내 손끝에서 간질간질하게 울렸다.
펑!
유일하게 압력이 나갈 수 있던 목 위쪽으로 불길이 치솟았고, 엔시스가 처음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
팅, 핑, 티딩!
다음 순간 판금 갑옷의 가죽끈과 금속 걸쇠가 죄다 부러지고 튕겨 나갔다.
엔시스의 마른 근육질 상반신이 태양 아래 드러났다.
판금 갑옷 안에 입는 누비 갑옷은 이미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역광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가운데, 그의 등을 모든 병사가 보았다.
“왕이시여!”
“아버지 전하!”
“대체 저게 무엇이란 말인가?”
기사나 귀족 간 일기토에 끼어드는 건 대부분의 상류 사회에서 실례되는 일이었고, 검의 나라 도로이센에서는 실례를 넘어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엔시스의 몸을 보자마자 필리오스와 기사들이 뛰쳐나가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광경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지 증명했다.
“…….”
모두가 영원하리라 믿었던 검왕, 최장수 소드 마스터 엔시스.
그의 몸은 여기저기 얼룩덜룩 검게 물들어 썩어가고 있었고,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처럼 금이 쩍쩍 가 있었으며, 그 금 사이에는 청록색 결정이 가득 자라고 있었다.
“이 결정을 몸에 직접 심으면 강력한 힘과 육체의 안정을 얻을 수 있지만, 점점 더 많은 결정을 섭취해야 하고, 그렇게 쿠이트 아즈의 종복이 되지.”
난 쓴웃음을 지으며 연극적으로 팔을 벌렸다.
“아, 이 얼마나 추한 일인가? 왕국을 위해 침식으로부터 시간을 끌려 한 고결한 왕이, 제 안위만을 위해 제국과 전쟁을 벌여 땅을 빼앗으려 하다니.”
엔시스가 제 팔뚝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썩어 문드러진 팔에 푸른 결정이 자라 있었다.
그 역시 제 몸을 정확히 보지 않은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던 모양이다.
난 거절할 수 없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넌 나라를 위해 산 게 아니라, 네가 살기 위해 나라를 이용했어. 처음 이걸 네 몸에 심으라고 말해준 게 누구였지? 기억하고 있을 텐데? 내가 복수 정도는 대신해줄 수 있어.”
엔시스가 재차 검을 쥐며 답했다.
“궁정 수석 마법사. 에즈라즈.”
난 고개를 흘깃 돌려 텐티아 경을 바라보았다.
“들었지. 경. 기억해두게.”
“예, 예. 전하.”
이제 내게 약속된 승리를 가져갈 차례였다.
“공명해 무너져라.”
치이이잉!
아즈의 파편이 일제히 울고, 엔시스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그의 몸에 들어찬 모든 결정이 끓어오르듯 폭발했다.
파바바박!
청록색 결정이 주황색으로 달아오르고, 소드 마스터의 몸이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쿨럭!”
엔시스가 피를 왈칵 토하며 비틀거렸고, 그의 손에서 장검이 떨어졌으며, 난 처음으로 열 걸음 간격 안에 들어섰다.
타앗.
상처 입은 맹수를 사냥하는 사냥꾼처럼 주요 면밀하게.
“여기서 검왕으로 죽어. 더 망가지고 떨어지기 전에.”
난 그에게서 전의를 빼앗고, 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할 말을 신중하게 골라 내뱉으며, 그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
퍽!
내 발길질이 엔시스의 가슴 정중앙에 정통으로 꽂혔다.
엔시스의 몸이 바닥을 향해 천천히 기울었다.
난 흑루를 역수로 쥐고 힘껏 하늘로 치켜올렸고, 정확히 엔시스의 심장을 노렸다.
햇살에 비친 검은 칼날이 번뜩이고, 그 직후 주황색으로 달아오른 마나 블레이드가 검신을 감싸고 타올랐다.
사악!
그때 푸른 섬광이 내 몸을 세로로 그었다.
도저히 대응할 수 없는 속도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는 게 한 박자 늦었다.
……아무래도 엔시스가 쓰러지는 동시에 손날을 베어 올린 듯하다.
“그게 뭐가 되었든, 내가 살아서 하도록 하지.”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 * *
발렌시아누스가 그대로 지면을 향해 쓰러졌다.
아콰테그를 먹여둔 제복과 암적색 비늘이 일격에 갈라졌다.
수정체의 힘으로 육체를 강화하지 않았다면 내장이 쏟아지고도 남았을 일격이었다.
앞니가 깨지고, 목젖이 베였으며, 코와 이마에 붉은 선이 내달렸다.
타악!
엔시스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일어났다.
발렌시아누스가 떨어트린 흑루가 바닥에 닿기도 전이었다.
엔시스는 허공에서 그 검을 낚아채 올려 베기 자세를 취했다.
츠카아악-!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가 검은 칼날을 감싸고, 망나니 대공의 애병이 그 주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침식되어 썩고, 찢어지고, 불타고, 누덕누덕해졌을지언정, 그는 소드 마스터였다.
발렌시아누스의 행보를 끝내버리기 충분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캉!
발렌시아누스가 쌓아 올린 것들은 그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으아아아!”
텐티아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어 전력을 다해 특대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
그녀는 서 있기도 버거운 상태였지만, 철혈당주 마커스의 기계 갑옷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몸을 지탱했다.
붉은색 바다가 다시금 일어나 푸른 섬광을 덮었다.
물론 하늘과 땅이 뒤집혀도 마나 블레이드가 오러 블레이드를 이길 수는 없는 게 세상의 법칙이었다.
사아아악!
푸른 섬광 앞에서 붉은색 바다가 그대로 갈라지고, 끝끝내 그 바다를 일으킨 특대검까지도 잘려 나갔다.
단 한 합을 막아낸 대가였다.
“끝까지!”
엔시스가 텐티아를 걷어차며 외쳤다.
특대검의 거울 같은 단면에 발렌시아누스가 쓰러지는 모습, 텐티아가 피를 토하면서도 웃어 젖히는 모습, 그리고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드는 모습이 비쳤다.
우르르릉!
“왕이 싸운다고 다 기다리고 있는 거니? 멋진 기사들이로구나.”
발렌시아누스가 텐티아에게 달려갔을 때부터, 세레라지에는 바위산 위에 서서 뇌운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난 기사도 같은 거 모르잖니.”
번쩍!
새까만 먹구름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눈 부신 번개 기둥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언 듯 보면 신성해 보이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쾅!
“끄으으윽!”
엔시스가 휘청이며 검을 늘어트렸고, 일순 발렌시아누스에게 등을 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이를 악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 끝을 볼 순간이었다.
츠츠츠츠.
그의 오른팔이 반투명한 암적색 비늘에 감싸이고, 요사스러운 불길이 타올랐다.
그는 왼손으로 엔시스의 가슴팍을 단단히 붙드는 동시에, 오른손을 등에 찔러 넣었다.
“그 정도 살았으면, 이제 슬슬 선위하시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치면서.
용의 비늘을 두르고 정령의 불길로 벼려진 손아귀가 썩어가는 몸뚱이를 파고들었다.
으지지직!
하얀 제복 소매가 검붉은 피에 물들고, 엔시스의 파란 눈이 일순 한껏 커졌으며, 결국 그의 가슴팍에서 발렌시아누스의 손끝과 불길이 튀어나왔다.
퍽!
심장이 터지고.
“커억…….”
엔시스의 눈에서 지난 260년간 꺼지지 않았던 빛이 천천히 사라졌다.
* * *
“하아, 하아.”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3천의 군대와 고강한 기사들이 저 앞에 있었고, 필리오스는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아버지?”
난 실소하며 엔시스의 시신에서 팔을 뽑았다.
세상.
다 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