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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누스는 설렘과 두려움으로 심장이 고동치는 걸 느끼며 저 앞에 늘어선 군대를 바라보았다.
“흐으으으.”
같은 실력이라 해도 마법 회로 새겨진 갑옷을 입는 기사와 검 한 자루 든 검객의 격차는 컸다.
‘엔시스가 내 불길 속에서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던 것도 같은 이유야. 그놈도 엄청난 신체 능력과 마법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갑옷에 있던 내화 마법 회로, 방어 마법 회로의 도움도 크게 받았다고.’
그는 텐티아를 부축하고, 천천히 한 걸음씩 물러섰다.
‘자칫하면 등 뒤에서 칼 맞고 죽는다. 싸운다면 끊임없이 이동하며 치고 빠지는 전략을 써야 하겠지. 차라리 텐티아 경을 어떻게든 세레라지에나 기계 기사에게 맡긴 다음에 내가 먼저 들어갈까?’
그는 혈관 속을 흐르는 힘을 선명하게 느끼며 희열했다.
본래도 가지고 있던 힘이었지만, 이제 몸이 무너지는 걸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빨간 약이랑 파란 약은 더 이상 필요 없겠네. 그건 그것대로 부작용이 심했는데.’
저 앞에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희번덕거리며 씩 웃었다.
사아아아!
불씨가 흩날리고, 불씨가 불꽃이, 불꽃은 불길이, 불길은 불의 벽이 되었다.
소년 대공의 등 뒤로 거대한 불의 파도가 넘실거렸다.
검객과 병사들의 돌격을 쓸어버린 그 이상의 높이였다.
하얀 머리가 붉은빛을 받아 노을빛으로 달아올랐고, 제복의 금장 장식에도 너울거리는 붉은 무늬가 아른거렸다.
‘물 마법으로 상쇄한 다음에 기사들을 돌격시키려는 건가? 좋아. 덤벼 봐. 대신 너희 병사들은 전멸이다. 그다음에는 마법사들이야. 불길 속에서 튀어나와서 흑루로 칼침을 놔주마.’
그때 군대에서 한 기수가 달려 나왔다.
백기와 왕실 깃발을 단 기수였다.
“솔레타라스 제국의 전권대사, 발렌시아누스 솔레타라온 솔레타라스 대공은 들으시오!”
전령은 입술을 깨물며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미쳤다, 미쳤어. 저 정도 마법을 즉석에서 펼친다고?’
저 불그죽죽한 눈매와 빨간 입술이, 거대한 용의 뿔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전령이었고.
그가 말을 잘 전해야 저 불의 파도가 그의 친구들을 덮치지 않을 터였다.
“도로이센 왕국의 왕태자이자 차기 국왕이신 필리오스가 그대에게 회담을 청하오!”
발렌시아누스는 귀를 의심했다.
‘이제 와서?’
군대를 끌고 제국 땅을 밟기 전에 하던가, 화염 파도를 일으키기 전에 하던가, 제 아비가 죽기 전에 하던가.
파국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려 놓고, 낭떠러지가 보이자 필사적으로 멈추려 하는 꼴이 썩 우스웠다.
하지만.
‘또 나만 절박한 건 아니네.’
발렌시아누스는 필사적으로 멈추려 하는, 지키려 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었다.
‘늘 악착같이 빼앗으려고 덤비는 놈들 머리 깨는 일만 했는데.’
어떻게든 왕태자로서 의무를 다하려 하는 모습이 썩 기껍기도 했다.
‘그래. 기회를 줄게. 들어나 보자.’
발렌시아누스는 전령을 보며 소리쳤다.
“하나. 교전을 중단한다. 둘. 기사들을 700 걸음 바깥까지 물려라. 셋. 부상자들의 치료를 개시하되, 전장을 떠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이상의 조건을 받아들이겠느냐고 전하라!”
‘부상자들 사이에 섞여서 후방으로 빠진 다음에 빙 돌아서 세레라지에를 노릴 수도 있으니까.’
전령은 빙 돌아 제 진영으로 돌아갔다.
‘저 망나니가 이걸 받아준다고? 진짜로?’
기사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필리오스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무조건 함정입니다.”
“전하를 구워버리고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하려는 속셈입니다.”
“절대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필리오스는 잠시 저 멀리 넘실거리는 불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저 파도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고, 불의 정령도 벨 수 있으니 도망치는 데에는 문제 없겠지.”
“예. 그러니…….”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조련한 병사들과 아버지 전하께서 데려온 병사들은 다 타죽을 거야. 정예병 6천은 어디서 쉽게 떨어지는 전력이 아니네.”
“태자님!”
그 아래 선 백발의 대공도 바라보았다.
“망나니라기에는 합리적이고, 대공이라기에는 비열하니, 합쳐서 망나니 대공인가?”
필리오스는 위엄 있게 명령했다.
“모든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전해라.”
기사들은 눈을 질끈 감고 명령에 복종했다.
* * *
난 회담 요청을 받아주었고, 필리오스는 텐티아 경을 위한 치유 사제를 보내 주었다.
텐티아 경은 치유 물약과 신성력으로 회복하고, 그 자리에서 기계 기사가 가져온 백금 갑옷으로 갈아입었으며, 날 따라나서려 했다.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아니. 경은 올라가서 세레라지에 누나를 지키게.”
텐티아 경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전하!”
난 목소리를 착 낮췄고, 그녀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사들을 700 걸음 바깥까지 물리라 요구한 게 나일세. ……그리고 저들이 다른 생각을 한다면 날 노리지는 않겠지.”
“율리아를 되찾고 도망치거나, 세레라지에 전하를 납치해서 협상하려 하거나 둘 중 하나겠군요. 알겠습니다. 전하. 이 텐티아, 전하의 협상에 방해가 생기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막겠습니다.”
신성력과 포션으로 치유했다 해도 한 번 터진 마나 로드가 바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겉으로는 여전히 강인해 보여도, 적잖은 휴식을 취해야 할 터다.
제발 무리하지 말라고 읍소하고 싶었다.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잡풀이 다 타버린 평야를 향해 걸어 나섰다.
“다시 이렇게 마주 앉게 될 줄은 몰랐군.”
“저도 그렇습니다. 전하.”
필리오스의 시종들이 벽 없는 천막을 치고 테이블과 차를 가져왔으며, 행정관들이 고급 양피지와 마법 잉크를 들고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게 크든 작든 분쟁이 더럽고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지점이었다.
서로 죽도록 싸울 때는 언제고, 격식 지켜 가며 얼굴 맞대고 이야기해야 한다.
표정을 보아하니 필리오스 역시 적잖이 겸연쩍어하고 있는 듯했다.
강인한 인상에 거친 수염까지 난 얼굴로, 회귀 전 삶을 포함해도 20살은 어린 내게, 반존대하며 억지웃음까지 지어 보이는 꼴이 참 우스웠다.
그러나 난 그를 비웃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겸연쩍고 창피하고 더럽고 낯간지러워도 협상이 전쟁보다야 나았다.
그러니까.
겸연쩍고 창피하고 더럽고 낯간지러운 꼴 좀 보라지.
“왕위를 물려받게 된 걸 축하하오. 그럼 일단 이번 사태에 대한 제국의 공식적인 입장부터 전하겠소.”
앞 문장을 들은 필리오스의 얼굴에 일순 ‘이런 개자식을 봤나?’ 하는 문장이 떠올랐다.
그가 애써 침음성을 갈무리하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우선. 즉각적인 퇴거를 요구하오. 적어도 회담이 종료된 시점부터 10일 안에 도로이센 군이 제국령 안에 없어야 하오.”
필리오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화색이 돌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건 달리 말하자면 살려서 보내 주겠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금,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역시 원하오.”
“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 대책이라고 하심은,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원하십니까?”
나는 씩 웃으며 혀를 놀렸다.
“그야 당연히 양국에 우호를 다지고, 관계를 회복해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들이지.”
국익을 위해 양심을 접어둘 순간이었다.
이는 분명 매우 비통한 일이었다.
하지만 난 도로이센이 아니라 제국의 대공이고, 이 세상은 강자가 약자 말을 들어주는 세상이 아니며, 도로이센은 충분히 제국의 뒤통수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저력을 가진 나라니, 비통함을 겪느니 비통함을 겪게 하는 게 나았다.
나 하나의 패악질로 제국 신민들이 배를 불릴 수 있다면 꽤 괜찮은 게 아닐까?
물론 광명교회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난 성자 납치범이었다.
“제국과 도로이센이 더욱 가까워져서, 전쟁해도 서로 잃는 게 더 커진다면, 다시는 전쟁을 안 하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고, 나는 목소리를 더더욱 멋들어지게 가다듬었다.
“첫 번째는 사람이오. 필리페 공이 좋겠군. 마침 딱 아카데미에 들어갈 나이 아니오?”
필리오스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필리페는 그가 제일 아끼는 막냇동생의 이름이었다.
당연히 인질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그가 솔레타라온의 아카데미에 와서 제국의 검술을 배운다면, 양국 간 깊은 신뢰를 보여줄 수 있을 듯하오. 폐하께서 만드신 기사단 제식 검술과 필리페 공이 이미 알고 있는 도로이센의 검술이 더해진다면, 완전히 새로운 검술이 탄생할 수도 있겠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외교적 수사로 말을 일단락했다.
“두 번째는 황금이오. 제국과 왕국 간 관세를 조율합시다. 왕국의 뛰어난 야금술로 만들어진 검과 갑옷이 들어오고, 제국의 마도구와 마법 물약이 왕국에 들어가면 분명 서로 간 이득을 보는 거래가 가능할 거요.”
필리오스의 얼굴에 다시 경련이 일었다.
“저희 도로이센이 시작한 전쟁을 마무리하는데, 제국이 너무 많은 걸 내어주시는 게 아닌가 황망합니다.”
수십 년 동안 통치자 교육을 받아 온 인재답게, 내 말의 핵심을 완전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할 거 없소. 우리 역시 왕국의 검과 갑옷을 탐내고 있으니.”
이건 앞으로 제국이 도로이센 왕국의 부를 쪽쪽 빨아먹겠다는 말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솔레타라스는 마도 제국이었다.
천하의 상아탑을 수도 옆에 끼고 있었고, 황립 마도 공방은 그런 상아탑과 경쟁하며 미친 듯 실력을 키워나갔으며, 아카데미마다 마법 학과가 있어 매년 빼어난 실력의 졸업생들을 내보냈다.
지하수로의 슬라임이나 연초, 장작에 불붙이는 ‘라이터’, 각종 마법약처럼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는 마도구도 많았다.
상식적으로 제국이 도로이센에서 검과 갑옷을 수입해 오면 얼마나 수입하겠는가?
어차피 회로 작업은 제국에서 해야 하는데 말이다.
반대로 제국의 각종 민수용 마도구는 문자 그대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게 뻔했다.
제국에서는 그리 대단한 마도구도 아닌 만큼 기술 유출 걱정도 없었다.
포화 상태인 시장에 미친 듯 부가 쏟아질 테고, 그 부는 황실의 세입으로, 세입은 국력 증강으로 이어질 거다.
따라서 정상적인 나라들은 대부분 관세 장벽을 통해 국부 유출을 막고 있었고.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소.”
난 그 장벽을 때려 부수겠노라고 선언했다.
필리오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내 요구는 이제 시작이었다.
* * *
발렌시아누스는 문제 그대로 개망나니 같은 요구를 이어 나갔다.
이는 제국과 황실에 많은 부를 안겨줄 요구들이었고, 도로이센의 미래에 장기적으로 크나큰 해가 될 요구들이었다.
“양국 간 국경 요새를 철거하는 게 어떻소? 앞으로 많은 상인이 오갈 텐데, 아무래도 흉흉한 그림이 그려질 거 같아서 말이오.”
필리오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국경 요새가 없어지면, 만약에 전쟁이 터져도 와이번 기사들을 여럿 굴리는 제국이 훨씬 유리했다.
“이 빌어먹을 산들 때문에 교류가 안 되고 있지. 우리 가도를 닦읍시다. 제국에 뛰어난 대지 마법사들이 많으니, 공사는 제국이 맡겠소. 공사비를 받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대신 통행료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겠소?”
발렌시아누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아카데미 마법학부 졸업생들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할 기회였다.
다시 전쟁이 터졌을 때 강력한 군대를 투입할 길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의 영지를 부흥시킬 속셈도 있었다.
‘앞으로 돈 나갈 일 많이 생길 텐데, 몇 닢은 챙겨야지.’
인스트루멘툼 3분의 1은 그의 영지였다.
물류가 늘어나면 돈이 들어오고, 돈이 들어오면 인구가 늘고 도시가 발전했으며, 도시가 발전하면 세입이 늘어났다.
그렇게 유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인스트루멘툼에 잔존하는 마커스의 영향력은 약해질 터였다.
‘한 번에 고깃덩이 세 개 정도는 물고 나가야 하고.’
물론 필리오스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발렌시아누스.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느냐!’
그는 망나니라는 악명이 어떻게 기인했는지 알아챘다.
단순히 유흥을 즐겨서도 아니고, 손속이 잔혹해서도 아니며, 탐욕스러워서도 아니다.
“세 번째는 동맹이오. 우리는 언제나 전쟁 중이요. 지난 천 년간 전쟁 중이었지. 저 하늘 너머 옛것들과 말이오. 이번 분쟁도 사실상 그 옛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려 희열감에 찬 미소를 짓는 저 소년 대공은, 젊음의 패기와 경력자의 연륜을 한 몸에 가지고 있었다.
“선왕의 시신은 옛것의 기운에 심히 오염되었으니, 성자 마테오스께서 친히 정화해 돌려주실 것이오.”
물론 진짜로 엔시스의 유골이 돌아갈지, 아무 재나 한 움큼 돌려줄지는 아무도 몰랐다.
“또한 고위급 침식자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왕궁 수석 마법사 에즈라즈를 심문하는 일 역시 성자 마테오스께서 맡아주실 것이며.”
“대공 전하. 왕국의 일은 왕국에서-.”
“광명교회 최고의 이단심문관들을 파견해 왕국 안에 있는 침식자들을 토벌하는 걸 도와줄 것이오.”
발렌시아누스가 하얗게 웃었다.
붉은 입술 안 약간 길쭉한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왔다.
“이를 간섭으로 받아들일지, 도움으로 받아들일지는 왕국의 자유요.”
황금빛 눈동자는 세로로 찢어져 있지 않았으나, 그때보다도 탐욕스럽게 요동쳤다.
“그러나 제국은 침식자들을 몰아내고 양국 간 우호를 되찾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매우 단호할 것이오.”
필리오스는 저 뺨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