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47)화 (247/340)

(247)

“하하.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필리오스는 고위 행정관, 경륜 있는 장교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이건 우리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성자가 제국에서 탄생한 게 너무 치명적입니다. 교회 쪽은 쌍수 들고 찬성할 수도 있으니, 더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저 망나니 새끼의 요구를 들어줬다는, 그의 대에 도로이센 왕국이 도로이센 공국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나라를 말아먹을 수는 없다. 아버지 전하가 물려준 거라도 지켜야 다시 뵐 낯짝이 있어.’

하지만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가는, 6천 정예병이 6백으로 줄어들지도 몰랐다.

‘이렇게 돼도 나라를 말아먹는 거다.’

물론 도로이센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전력을 다한다면 제아무리 발렌시아누스라도 죽일 수는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의 뒤에는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가 있었다.

“……”

홀로 반란을 일으켜 찬탈했다는 그 황제가 도로이센 왕궁에 운석을 떨구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여기서 회담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필리오스는 영원히 바라보기만 했던 옥좌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려 애썼다.

“우선 에즈라즈를 끌고 오게. 당장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줘야겠지. 나 역시 그에 대한 분노가 깊어.”

“예. 태자님.”

기사들은 머리를 숙였고, 일어서려 했다.

그때 필리오스가 떠보듯 물었다.

“난 아직도 태자인가?”

엔시스는 200년도 넘는 세월을 왕으로 군림했고, 도로이센 신민들에게 있어 왕국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장 필리오스 본인부터가 그가 왕좌에 앉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살 수 있던 나날은 끝났다.

이제 오로지 그가 스스로 고민하며 살아가야 했다.

기사들은 잠시 눈치를 보았고, 이내 단언했다.

초승달 같은 날이 달린 장창을 든 기사가 첫 번째였다.

“전하!”

“필리오스 전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에스터크, 롱소드, 클레이모어, 곡도…… 각양각색의 무기로 무장한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 * *

새 왕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이 달려 나갔다.

“왕명을 받들라!”

“반항하면 베겠다!”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따라 나와라!”

그들은 병사들과 함께 포진하고 있던 마법사들에게 들이닥쳤다.

흉흉한 기세를 마주한 병사들은 곧바로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텄고, 기사들은 곧바로 에즈라즈를 붙들었다.

“수석 마법사님.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는 그을린 갈색 얼굴에 남방인 특유의 총기 넘치는 보라색 눈을 가졌고, 검은 염소 수염을 길렀으며, 구불구불한 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매부리코와 주름, 사마귀가 많은 얼굴이었지만 웃는 인상이라 온화해 보였고, 외관상의 나이는 60대였으나, 언제나 생기 넘쳐 보였다.

노마법사는 순순히 지팡이를 내려놓고 양팔을 들며 기사들을 따랐다.

“스승님께 이 무슨 무례인가?”

마법사들은 반사적으로 반발했지만, 그들 역시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기사들이 뽑은 검 때문이 아니라, 썩어가던 엔시스의 몸 때문이었다.

‘푸른 수정은 쿠이트 아즈고, 검은 자국은 분명히 침식이었어.’

‘그걸 스승님이 모르셨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하물며 주치의까지 겸하셨으니까.’

‘정말로 침식자이신 건가? 하지만 왕국에도 사제가 넘쳐나는데? 심지어 악수도 여러 번 하셨어.’

에즈라즈는 오랫동안 도로이센 왕국에 머물렀고, 선왕 엔시스의 신뢰를 받아 왕궁 수석 마법사까지 올랐지만, 본래 남방에서 올라온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남방 대륙의 아미르 토후국은 대놓고 옛것을 모시는 나라였다.

마법사들이 시선에 불신이 어리고, 에즈라즈는 쓰게 웃으며 기사들을 따라나섰다.

“내가 미안하구나. 안심하거라. 곧 모두 설명해줄 수 있을 게다.”

그는 기사들을 따라 필리오스에게 향했다.

“궁정 수석 마법사 에즈라즈가 필리오스 태자님을 뵙습니다.”

기사 하나가 호통쳤다.

“필리오스 전하라 불러라!”

에즈라즈는 송구하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숙였고, 필리오스는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윽고 그는 더없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그대를 원하네.”

이는 만에 하나 에즈라즈가 결백했을 때, 마법사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 * *

발렌시아누스는 회담장 테이블에 홀로 앉아 필리오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도로이센 쪽 진영 뒤로 태양이 떨어지고, 슬슬 땅거미가 분지를 향해 기어왔다.

세레라지에와 텐티아, 마커스가 있을 바위산 위 하늘은 이미 캄캄했다.

깜빡, 깜빡.

아마도 세레라지에가 보냈을 빛 신호가 몇 번 점멸했다.

‘문제없음’이라는 뜻이었다.

하인 몇몇이 다가와 회담장 주변에 화로를 설치하고 횃불을 세웠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대공 전하.”

필리오스가 행정관들과 노마법사를 대동하고 돌아왔다.

“이분이 왕국의 궁정 수석 마법사 에즈라즈입니다.”

발렌시아누스는 흑발 자안의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가 에즈라즈입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이 몸을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에즈라즈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당연하지만 침식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중한 태도와 격식 차린 로브를 보고 있자면, 황립 마도 공방이나 상아탑의 광인들보다 훨씬 정상인처럼 보였다.

어쩌면 정말로 침식에 물들어가던 엔시스를 돕기 위해 아즈의 파편을 약재로 사용했을지도 몰랐다.

“…….”

발렌시아누스는 필리오스와 에즈라즈의 속내를 짐작했다.

‘이렇게 예의 있게 나오는 쪽이 더 골치 아프다. 그래. 필리오스 너도 그가 침식자가 아니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군. 궁정 수석 마법사 정도 되는 인재를 제국에 공짜로 보낼 수는 없지. 광명교회도 그를 무작정 신성력으로 지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약간 아플지도 모르네.”

‘그런데 난 할 수 있거든!’

발렌시아누스가 용찬과 정령의 힘을 끌어 올렸다.

사아아아-!

그의 황금빛 동공이 주황색으로 달아오르며 다시 세로로 찢어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에서 용의 뿔이 튀어나오는 가운데, 불의 정령들이 우우 일어나 회담장 일대를 둘러싸고 빙빙 돌며 화염 폭풍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꺄하하하!

폭풍의 지름은 반경 500m에 달했고, 발렌시아누스와 필리오스, 행정관들과 에즈라즈가 있는 테이블 일대만 멀쩡했다.

다시 한번 지면이 붉게 녹아내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초목이 불타올랐으며, 양측의 일행은 기겁하며 무기를 빼 들었다.

“전하!”

필리오스의 마법사들이 물의 거인을 불러내고, 기사들이 불길 속에 뛰어들려 했으며.

“발렌!”

세레라지에가 뇌운을 부르고 텐티아가 다시 바위산 아래로 달려가려 했다.

필리오스는 전율하며 그들을 둘러싼 불의 폭풍을 바라보았다.

높이는 성벽만큼 높았고, 반대편은 보이지도 않았다.

발렌시아누스는 그걸 즉시 시전하고도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에즈라즈.”

불길 비쳐 일렁이는 눈동자가 둘을 응시했다.

어마어마한 화기(火氣)가 그들의 정신을 압박했다.

“지금부터 한 마디라도 거짓을 뱉는다면 널 불태워 죽이겠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을 이렇게 겁박하시는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발렌시아누스는 말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봐봐. 거짓말했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라니. 아, 진실인가?”

그의 손짓에 따라 불길이 뱀처럼 날아들어 에즈라즈를 덮쳤다.

“내가 널 태워 죽여버릴 테니까!”

화르르륵!

로브가 불길에 휩싸이고, 검은 수염이 순식간에 타오르며 매캐한 연기를 뿜었으며, 고약한 냄새가 불의 벽 안에 번졌다.

“끄으으윽!”

노인은 비명을 참으며 움찔거렸지만, 끝내 반항하지는 않았다.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디는 모습은 숭고한 순교자를 떠올리게 하기까지 했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발렌시아누스의 불길은 살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노인의 몸을 불태웠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그을린 뼈와 한 줌의 재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필리오스가 경악하고, 발렌시아누스는 뻔뻔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으음. 일반적인 침식자는 아니었던 듯하군. 유감일세.”

* * *

필리오스는 그 뺨을 후려치려 손을 치켜들었다.

외교고 나발이고 남의 나라 궁정 마법사를 태워 죽인 상대였다.

아무리 상대가 제국이라고 해도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피식 웃으며 에즈라즈의 뼈를 짓밟았다.

“그런데 에즈라즈가 침식 교단의 하수인이었던 건 맞는 듯해.”

파삭.

깨진 뼈 안에는 푸른 결정이 가득했다.

쿠이트 아즈의 파편이었다.

필리오스는 입을 쩍 벌렸고, 발렌시아누스는 씩 웃으며 파편을 주워들었다.

“아즈의 파편에는 공유의 힘이 있지. 필요할 때는 이 파편을 이용해서 각종 마법과 침식의 힘을 빌려왔을 거야. 상아탑 출신도 아니면서 유난히 다재다능하지 않았나?”

궁정 수석 마법사가 된 다음에 납치 또는 협박당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발렌시아누스는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으니까.

필리오스는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발렌시아누스는 지배력을 끌어올려 파편을 공명시켰다.

그게 신호가 되었는지, 뼛조각 사이에서 검은 기운이 물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꺄악!”

“물러나게!”

일반인인 행정관들이 비명을 질렀고, 필리오스가 그들을 감쌌으며, 발렌시아누스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 잘난 낯짝 좀 보도록 하지.”

달각, 달그락.

에즈라즈의 뼈가 다시 달라붙고, 백골이 된 인영이 일어섰다.

그의 왜소한 뼈 위로 하얀 골격 갑옷이 자라나며 덩치가 부풀어 오르고, 검은 깃털이 돋아났다.

발렌시아누스는 알첸베르사 수도원에서 성물을 훔치려 했던 무리를 떠올렸다.

‘똑같은 옛것을 섬긴다. 같은 교단 소속일 확률이 높아. 역시 전 대륙에 걸친 조직이 존재하는 거였어.’

턱뼈가 일그러지고 부리가 돋아났으며, 검은 깃털이 예복처럼 둘러졌다.

어느새 키는 4m에 육박할 만큼 커진 뒤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씩 웃으며 불의 폭풍을 움직이려 했다.

‘굳이 이 앞에서 죽인 이유가 있거든.’

필리오스는 어떻게든 그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발악할 게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 등장한 침식자는 도로이센에 제국 출신 이단 심문관들을 파견할 좋은 근거가 되어 줄 터였다.

‘이제 적당히 고생하다가 태워 죽이면 된다. 나같이 강력한 용혈 황족도 고전할 만큼 강한 침식자라는 걸 알려주는 거야. 그리고…… 동쪽 하늘이 왜 벌써 밝아지지?’

그는 흘깃 뒤를 돌아보았고, 이내 밤하늘을 황금빛으로 밝히는 태양 같은 존재를 발견했다.

“발렌시아누스!”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가 유성 같은 궤적을 남기며 구름 위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음성 증폭 마법을 얼마나 강하게 사용했는지, 저 하늘 위에서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엔시스! 어디에 있는가!”

발렌시아누스는 그제야 엔시스가 침식자였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르고 있음을 알아챘다.

‘아.’

다음 순간 구름이 갈라지고 황금빛 원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세레라지에는 바위산 위에서 헛웃음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게 말이 되니? 역시 폐하는 사람이 아니잖니.’

마커스 역시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세레라지에 대공. 서클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심장 안에서 고리를 만들고, 그 고리끼리 충돌시키며 위력을 증폭하는 거지요. 즉, 반동을 얼마나 잘 제어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리를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 아닙니까?”

“그렇잖니.”

“그럼 저건 대체 몇 서클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용언을 이용해서 몸 밖에 고리를 만들어 버리니 저런 것도 되는군요.”

“따지는 게 의미가 있겠니? 원하시는 대로 늘릴 수 있을 텐데.”

거대한 황금빛 고리들이 마치 그물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수십, 수백, 어쩌면 수천 개는 되어 보였다.

“저 고리의 교점 하나마다 위력이 두 배로 증폭되는 거였지요?”

“맞잖니. 6서클이 4천 배가 조금 넘는데…….”

세레라지에는 차마 말을 잊지 못하고 동쪽 하늘부터 서쪽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서클들을 바라보았다.

“빨리 뭐라도 해야겠구나. 폐하가 이 땅을 호수로 만들어 버리시기 전에 말이잖니.”

막 일어서던 에즈라즈의 뼈가 다시금 무너져 내렸다.

발렌시아누스는 낄낄 웃으며 하늘을 향해 불의 창을 쏘아 올렸다.

제이릴리스가 붉은 궤적을 보고 방향을 틀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잘 오셨사옵니다. 폐하!”

필리오스는 불꽃 폭풍을 두른 발렌시아누스와 밤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착지하는 제이릴리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하, 하하.”

모든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쌍둥이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안도감이 떠올랐지만, 그가 보는 세상은 캄캄했다.

발렌시아누스가 필리오스에게 깃펜을 들이밀었다.

“자. 서명하시오.”

필리오스는 넋 나간 손짓으로 깃펜을 받았다.

‘신이시여. 왜 이 쌍둥이에게 이런 힘을 주셨습니까?’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한 가지 기묘한 사실을 알아챘다.

머릿속에 번뜩이는 상념이 스쳤다.

‘자기보다 계승 서열이 앞서는 오빠의 생존을 반가워한다고?’

그건.

‘망나니 대공과 신성 황제의 관계가 우리가 파악했던 사실보다 훨씬 친밀할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공작의 가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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