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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칼로 이뤄지지만, 팬으로 끝났다.
필리오스는 곧바로 서명을 마쳤다.
“여기 있습니다. 대공.”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아들처럼 키운 동생 필리페의 솔레타라온 유학, 관세 저하, 국경 요새 철거, 가도 공사, 제국 이단심문관 파견 용인, 배상금 등 무수한 조건이 달린 굴욕스러운 서약서였다.
그러나 상황은 일변했고, 이 역시 감지덕지였다.
지금까지는 필리오스와 기사, 마법사들이 힘을 합치면 발렌시아누스를 죽일 수 있었고, 따라서 협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가 친히 강림한 이상, 이제 남은 건 복종 또는 반역뿐이었다.
자칫했다가는 이 자리에서 충성맹세가 이뤄지고, 도로이센 왕에서 도로이센 공작이 될 수도 있었다.
“즉각 퇴거하겠습니다.”
필리오스는 전군을 휘몰아 야간 행군을 개시했고, 제이릴리스는 그 등을 보며 나른하니 조소했다.
“도로이센 국왕답지 않게 현명한 자로구나.”
발렌시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이뤄낸 성과와 그 과정을 설명하려 했다.
“폐하-.”
제이릴리스는 설명을 기다리는 대신, 관절 반지 낀 손을 뻗어 발렌시아누스의 뿔을 쓰다듬었다.
“차차 듣겠노라. 우선 돌아가자꾸나.”
기쁜 듯 슬픈 듯, 시원한 밤공기 속에서 낭랑하게 울리는, 묘한 목소리였다.
발렌시아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제이릴리스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 왔다.
발렌시아누스는 정중히 하얀 장갑을 벗었고, 그 손은 반투명하지 않았다.
일순 황제가 반색했다.
달처럼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어울리지 않는 안도감이 그녀의 얼굴에 어렸다.
“강해졌구나.”
대공은 자부심을 느끼며 답했다.
“예. 폐하.”
* * *
검왕 엔시스의 죽음은 빠르게 알려졌다.
총합 6천에 달하는 군대가 기동했던 만큼, 아무리 도로이센과 솔레타라스가 침묵을 지켜도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자네 그 소식 들었는가?”
“알지. 서쪽의 검이 결국 꺾였다고.”
“영생을 원해 침식의 힘을 사용했다지. 쯧쯧. 뛰어난 검객이라 해서 좋은 사람은 아니군.”
소문이 다 그렇듯 퍼져나가며 살이 붙고 또 붙었다.
“그런데 왜 솔레타라스를 침공했는지 아는가? 아무리 도로이센의 서방의 강국이라 해도, 솔레타라스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닌데.”
“내가 듣기로는, 검왕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고 하네. 자기 명성에 취해서 객관적인 전력 차이를 보지 못한 거지.”
“솔레타라온이 이물 사태로 큰 피해를 본 만큼 지금이 영토를 확장할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신성 황제가 친정할 줄은 몰랐을 거야.”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즈의 파편 부분은 입과 입을 거치며 축소되었다.
엔시스는 침식자였고, 영토 확장의 야욕을 품고 무리하게 솔레타라스를 침공했으며, 망나니 대공 발렌시아누스와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의 손에 토벌되었다, 는 알기 쉬운 사실만이 남았다.
“솔레타라스의 황제가 정말 강하기는 강하다는군. 그 엔시스를 가볍게 짓눌러 죽여버렸다고 하네.”
“내가 듣기로는 하늘 전체를 뒤엎는 마법을 사용했다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서클이라는 건 결국 9서클이 한계 아닌가? 6서클만 되어도 대마법사로 불리는데.”
“아니야. 아니야. 그분은 용혈 황족이시잖은가? 용언을 이용해서 마나를 직접 다룰 수 있으시다는군.”
입과 입을 오가며 점점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의 공이 커졌다.
“역시 폐하시다!”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 만세!”
“47번째 솔레타라스에 영광을! 그분의 정의 앞에서 어떤 침식자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 소문 속에서 망나니 대공 발렌시아누스가 한 일은, 제 쌍둥이의 힘을 믿고 도로이센의 새 왕 필리오스를 협박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것뿐이었다.
“이번에도 발렌시아누스가 발렌시아누스 했군.”
“아무리 우리 제국에 이익이 나는 상황이지만, 너무 추잡한 조약이 아닌가 싶어.”
“왕태자의 애인까지도 인질로 잡았다니 말 다 했지.”
이를 대대적으로 퍼트린 건 빈민가 아몬 신도들과 배움의 거리 연합 학생회, 홍등가 여명 카지노 휘하 가게들이었다.
* * *
“말씀대로 건설 조합을 설립했습니다. 아카데미 출신 대지 마법사를 여럿 들였고요, 유민들도 대폭 받아서 인력도 확충했어요.”
“그래. 코넬. 내 가도를 잘 부탁한다. 넓고 단단하게 닦아다오.”
소문을 퍼트리고 여론을 조성하는 것도 일이다.
난 그 대가로 코넬에게 양국 간 도로 공사 일부를 맡겼고.
“전하. 필리페 왕세제가 입학할 아카데미가 정해졌습니다. 밤낮으로 학생회원들이 감시하고 호위할 테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고생했다. 진. 초상화를 보니 그도 꽤 잘생겼더군. 혹시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영애가 있으면 걱정하지 말고 붙여다오. 무도회도 자주 열어서 남녀가 눈맞을 자리도 늘리고. 아끼는 동생이 제국 귀족과 결혼하면 필리오스는 미치고 환장하려 하겠지.”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가능하면 도로이센의 절기들을 빼돌리도록 힘써 보도록. 억지로 알아낼 필요는 없어. 재능 있고 성격 좋은 검술학부 생도들을 가까이 붙여 놓으면 저절로 친해지게 될 테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참. 정화병 사이에 세작 잘 심었지? 도로이센으로 파병 갔을 때 필리오스를 감시해야 해.”
진에게 강대국 왕세제의 비밀스러운 검술을 알아낼 기회를 주었으며.
“정말로 연초 재배 허가를 내주시는 겁니까?”
“입 다물게. 이거 밀무역이야. 교회 귀에 안 들어가게 조심하라고. 이쪽 보게. 여기가 내 영지고, 이쪽에 세 마을이 최근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어. 그 작물이란 게 연초일세. 그런데 이쪽은 한동안 황무지였던지라 마을 사제고 뭐고 관리가 하나도 안 되고 있다네.”
“싹 다 연초 밭으로 만들어서 도로이센에 팔아먹겠습니다.”
“도로이센뿐이겠는가? 도로이센을 통해서 그 너머에 있는 소왕국들에게도 팔 수 있지.”
“!”
“곧 전쟁이 터질 테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걸세. 나와 폐하가 최선을 다하겠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늘 수밖에 없어. 그 상태에서 뭔가에 빠져야 한다면, 침식에 빠지기보다야 연초에 빠지는 게 낫겠지. 나도 가능한 한 자네를 양지로 올리려 노력할 테니, 준비하고 있게나.”
“감사합니다. VIP.”
“자금을 융통해 줄 테니 양조장도 몇 개 매입해놓도록.”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홍등가 적가면에게 사업을 늘릴 기회를 주었다.
물론 나는 언제나 그랬듯, 그들과 나의 어떠한 연관 의혹도 철저히 부정할 것이다.
* * *
“그러니 폐하. 저는 역시 전쟁보다도 뒷수습을 잘하는 듯하옵니다. 이단심문관 파견이라는 말을 들은 마테오스와 아르고스가 소신에게 사랑한다고 외치는데, 아주 들을 만했사옵니다.”
나는 별궁에서 제이릴리스와 마주 보고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대는 예전부터 팔방미인이었다. 어떤 일을 잘하는 건 시간 낭비일 때가 많다고도 하지만, 짐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 여러 가지 일을 잘한다는 건 사람 한 명 한 명을 가치 있게 만들지.”
챙.
큼지막한 유리잔은 불룩한 배와 잘록한 다리를 가졌고, 유려한 곡선을 그렸으며, 어김없이 맑은소리로 울었다.
오늘의 술은 증류한 포도주를 더해 도수를 높인 ‘포트 와인’.
향이 풍성하고 단맛이 진한 식후 포도주였다.
제이릴리스가 나른하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달큰한 웃음이 붉은 입술에 어리고, 황제의 강렬한 시선에 부드러움이 섞였다.
“세속의 지식인이란 자들은, 톱니바퀴처럼 한 가지 일만 잘하고 다른 방면에는 무지한 전문가들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
“썩 다스릴 맛이 나는 나라는 아닐 듯합니다.”
제이릴리스가 듣고 싶던 말을 들었다는 듯 손뼉을 쳤다.
“짐의 말이 그 말이다. 짐은 제국이란 거대한 짐승의 고삐를 잡고 있지. 이 짐승은 너무나 거대해서 제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몰라. 모든 부분에 대해 조금씩 알고 있는 그대 같은 인재가 각 방면의 전문가들을 부려야 하거늘.”
“역시 폐하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전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는 놈들이 지식인이랍시고 떠들고 있다면 죄다 와이번핏으로 보내버렸을 것이옵니다.”
나는 과장된 손동작으로 주먹을 휘둘러 보였고, 제이릴리스는 흡족하니 웃으며 유리잔을 다시금 독한 포도주로 채웠다.
“자비라. 짐과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 하지만 이번 아부는 마음에 들었다.”
“아부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옵…….”
일순 그녀의 입가가 굳었다 펴졌다.
“짐이 엔시스를 죽이고 전쟁을 막았다는 소문을 퍼트린 게 그대겠지?”
어쩐지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주아주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평소였다면 곧바로 그렇다고 답했을 텐데, 왜 망설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제이릴리스가 말없이 유리잔을 가리켰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잔을 완전히 비웠다.
내가 조금 더 빨리 마셨기에, 나는 그녀의 하얀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뒤로 젖혀졌던 황제의 시선이, 조금씩 앞으로 기울어 끝내 내게 맞춰졌다.
그 시선은 정오의 태양처럼 강렬하고 파도에 비친 달빛처럼 예리했다.
수 병의 독주도 그녀의 번뜩임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을 칭송하는 목소리를 듣는 건 언제나 흡족하도다. 사실이 그래. 짐은 혈통과 능력으로 제위를 손에 넣었고, 대귀족들의 충성으로 완전해졌지. 하늘 위 하늘 아래, 땅 위 땅 아래 있는 모든 게 짐의 것이야.”
“그렇사옵니다. 어떠한 반론의 여지도 없는 지극한 사실이옵니다.”
“그래서 짐은 지금껏 황제로서 누리고 즐기는 데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 짐이 기사들에게 좋은 갑옷을 입혀주는 일에 마음과 황금을 쓰는 건, 그게 짐이 좋은 드레스를 입는 일보다 즐거워서야. 만약 짐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초상화를 그리는 걸 즐거워했다면, 짐은 거리낌 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고 운을 떼며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하여, 이번만큼은 무언가 꺼림직하구나. 받아서는 안 될 걸 받은 기분이야. 짐이 해서 안 될 일 같은 건 없는데, 어째서인지……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해. 짐의 시녀는 그것이 죄책감이라 하더구나.”
나는 세상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폐하께서는 무죄 무치한 몸. 폐하께서도 폐하께 죄를 묻고 심판하지는 못하시옵니다.”
“…….”
“저를 보내신 것도 폐하이시니, 사람을 잘 쓰신 폐하의 공이 맞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한가?”
나른하면서도 아주아주 약간 서글픈 듯한 웃음이었다.
나는 침착하고 사려 깊게 단어를 골랐다.
“이 이야기도 한두 번 드렸사옵니다. 제가 사고를 치면 폐하께서 지켜주시면 되옵니다. 하니 폐하께서 태양처럼 빛나시고, 저는 폐하께서 드리우신 그림자인 쪽이, 제게도 훨씬 낫사옵니다.”
“그대는 그걸로 만족하는가? 짐도 가끔 그대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어. 그대가 바라는 건 다른 자들과 바라는 것과 너무나도 다르구나.”
“저는 신민들이 제가 퍼트린 소문에 속아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사악한 악당이요, 술과 보석과 제복, 사치와 향락에 집착하는 세상 둘도 없는 망나니 대공이옵니다. 그러니 제가 바라는 건-.”
열변을 토했더니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일순 시야가 점멸하고, 바닥이 머리를 향해 치솟았다.
나는 테이블 가장자리를 잡고 버텼고, 제이릴리스는 혀를 찼다.
“짐의 주량이 그대와도 다름을 잊었구나. 미안할 뿐이노라.”
난 루디가 가져다준 차가운 레몬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깜빡였다.
“예예. 그건 조금 미안해하셔도 되시옵니다.”
제이릴리스가 피식 웃었고, 어깨를 편안하게 늘어트렸다.
시선만으로도 상대를 짓누르는 신성 황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있을 뿐인 19살 소녀가 된 듯했다.
“그래. 천천히 즐기자꾸나. 술과 보석과 좋은 제복을, 극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주겠도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말이야.”
노란 눈이 다시 나른한 웃음을 짓고, 그녀가 얼음 넣은 위스키 잔에 포도주를 따라 흔들었다.
얼음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쉴 만큼 쉬어라. 그 후 무엇을 몸에 넣었고, 그리하여 몸이 어찌 변모했으며, 그 기술로 무엇을 만들지 보고하거라. 세레라지에 대공이 벌써 눈독 들이고 있는 듯하니, 내일 바로 그대의 종합공방으로 가도 되겠지.”
“예. 폐하. 실은 이미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사옵니다. 공유라는 특성과 육체의 안정이라는 특성 모두 아주 매력적이옵니다.”
“육체의 안정이라. 참 좋구나. 혹시 약을 만들게 되면 짐도 한 병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