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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이센은 서부의 강대국이었고, 강대국이란 주변 국가들에 깡패 짓을 하고도 멀쩡한 국가를 의미했다.
물론 도로이센의 수금은 솔레타라스와 달리 그나마 논리가 있었다.
“우리는 지난 수백 년간 솔레타라스의 서진을 막아냈다.”
“우리가 왜 너희 방패 역할까지 해 줘야 하지?”
“우리 신민들의 피가 너희 신민들의 곡식을 지켰으니, 그 값은 곡식으로 받겠다.”
서쪽으로 팽창해온 솔레타라스의 침공을 막아 온 게 자신들이니, 그 값을 받겠다.
거부한다면 도로이센이 서쪽으로 팽창하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도로이센은 엔시스 즉위 전부터 강대국이었다.
주변 군소국들은 어쩔 수 없이 방패세라는 이름의 성의 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깡패짓이라 보는 사람도 있었고, 정당한 방위비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건 솔레타라스의 서진을 막아주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도로이센이 무너지면 다음은 우리지.”
“저놈들은 빈말로도 착하지는 않지만, 그 용혈 황족들보다는 나아.”
그렇게 흘러가던 국제 정세에 파문이 일었다.
“검왕 엔시스가 죽고 왕태자 필리오스가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필리오스와 상호불가침 협약을 맺었다 합니다.”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가 친정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전문을 파악해라!”
검왕 엔시스의 친정, 수정질 결정 쿠이트 아즈, 운석에 숨겨진 오래된 음모, 망나니 발렌시아누스의 반격, 황제의 친정, 불평등 조약.
일련의 상황을 알게 된 군소국들은 생각했다.
‘그럼 이제 방패세를 안 내도 되는 거 아니야?’
“경제적으로 완전히 종속시키려 한다는 건,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 때려 부숴 버릴 생각이라면 진작 그렇게 했을 터였다.
“사실상 솔레타라스가 도로이센을 다시 침공할 확률은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방패세 납부를 거부했을 때, 저들이 우리를 침공할 확률은 없는가?”
“엔시스 사후 도로이센 국내도 혼란스럽습니다. 이 상황에 대규모 군사 활동을 벌일 여력은 없을 것입니다.”
“제국에서 이단심문관들이 오는 판입니다. 필리오스가 자리를 비울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 전령을 보내라.”
무수한 군소국들이 보낸 전령과 대사들이 도로이센 왕성에 도달했다.
“먼저 엔시스 선왕 전하의 죽음에 큰 애도를 표하는 바이며-.”
그렇게 시작한 알현은 언제나 비슷한 말로 끝났다.
“지금껏 솔레타라스의 서진을 막아준 도로이센에 큰 감사를 표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부담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십니다.”
“아니.”
“저희도 양심이 있습니다. 사악한 용혈 황족의 공격으로 선왕께서 서거하신 판국에, 도로이센을 계속 방패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 *
필리오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부왕의 죽음 이후 혼란에 찬 나라다.
여기서 조공국들이 죄다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왕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했다.
그는 영혼을 걸고 악마와 계약을 맺기로 했다.
‘쌍둥이 남매가이 우리 예상보다 친밀한 사이라면, 한쪽의 환심만 사도 양쪽을 모두 움직일 수 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에게 전갈을 보내라.”
“예. 전하.”
“내가 한동안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할 듯한데, 이단심문관 말고 성기사랑 행정 사제들도 보내달라고.”
필리오스는 수도 행정을 광명교회에 맡겼고, 기사와 검객들을 이끌고 국경을 순회했다.
이는 지방 영주들에게 충성 맹세를 받는 동시에, 타국에 강력한 무력 시위로 작용했다.
‘방패세를 계속 안 바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이 과정에서 필리오스의 애인으로 소문난 검객, 율리아가 큰 활약을 벌였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율을 원한다면, 죽어 뼈가 썩고도 남을 명성을 바란다면!”
도로이센의 검객들은 대부분 용병이나 모험가 패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용병과 모험가들은 애국심 없는 떠돌이지만, 도로이센의 검객들은 도장과 유파 단위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무장하고 국경을 넘어간 뒤, 타국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강력한 마수나 이물을 대낮에 가볍게 썰어버리고 돌아오는 식으로 주변국을 위협했다.
대외적으로는 모험가가 모험가 일을 했을 뿐이니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놈들이 언제든 내 목을 베려고 올 수도 있단 말이다!”
“어찌 된 게 그 아비 놈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소이다!”
그렇게.
필리오스는 자신이 엔시스의 아들임을 증명했다.
또한 율리아는 평민 출신인 그녀가 왕의 반려가 되기에 마땅한 기백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악마와 계약을 했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법이었다.
필리오스는 수도로 개선하자마자 기괴한 광경을 목격했다.
“전하께 광명의 은혜가 깃드시기를.”
수도에 성기사와 사제, 광신적인 이단심문관, 교회 정화병들이 바글거렸다.
“…….”
그들은 광장 한가운데에 화형대를 지어 놓았고, 도로이센 귀족들의 저택까지도 들쑤셨으며, 조금만 수상한 사람이 있어도 바로 신성력으로 지져버렸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수도가 광신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있었다.
필리오스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맹세했다.
“율리아. 나는 더 강해지겠네. 그렇게 아버지 같은 검왕이 되겠어.”
“그렇게 되어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언젠가 반드시 빌어먹을 솔레타라스 놈들을 도륙해 버리겠네.”
객관적으로 봐 상당한 전력 차이가 있었지만, 필리오스는 그날 본 둘의 웃음을 기억했다.
세상에 자기네 둘만 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분명 한쪽을 이용해 다른 한쪽을 끌어내는 등의 공작에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율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제가 그때 전하 곁에 있어도 좋겠지요?”
“내가 부탁하고 싶은 일일세.”
그렇게 연인이 칼을 갈기 시작했다.
광명교회에서 온 정화병 사이에 발렌시아누스와 진이 심어둔 첩자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은 모르는 채로.
* * *
“푹 쉬게! 아주 아주 푹 쉬어야 하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에게 세 달이라는 기나긴 휴가를 주었다.
“전하! 전 다 나았습니다! 포션도 여러 병 마셨고, 사제도 몇 번이나 만났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도록! 마나 로드가 다치면 본래 1년은 정양하는 게 기본이야.”
“하루라도 검을 안 잡으면 손에서 가시가 돋는다! 그렇게 오래 쉬다가는 제 손에서 가시가 돋을 겁니다!”
“정 그러면 50일만 쉬게. 대신 대성당에 가서 고위 사제들에게 치료받게. 이 패를 가져가면 될 거야. 일종의 기부금 적립 증서일세.”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에게 상아로 만들어 금으로 장식한 패를 쥐여 주었고, 텐티아는 끝내 그걸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수도 전경도 둘러볼 겸, 말도 마차도 타지 않고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오랜만의 사복이었다.
‘뭘 입고 가지?’
대성당에 가는 만큼 예절을 차려야 했다.
붉은 머리는 단정히 넘겨 이마를 드러냈고, 빳빳한 검은 바지와 검은 셔츠 위로 붉은 제복을 입었으며, 군화 풍의 부츠를 신고 화한을 찼다.
평복 기사의 정석과도 같은 옷차림이었다.
깊은 가을.
수도 가로수에도 단풍이 드는 가운데, 텐티아는 무상한 바람과 물드는 잎을 바라보여 여유를 즐겼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서 패가 만져진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다시 발렌시아누스로 가득 찼다.
‘걱정해 주는 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내가 곁에서 기사도를 가르쳐드리지 않는 동안 그분이 또 어떤 패악질을 부릴지 모르겠다.’
소소한 패악질을 벌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있었다.
‘이게 소소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본 발렌시아누스는 적어도 자격 없는 의원 후보에게 뇌물 받고서 후보자 등록 심사를 면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그는 매우 금욕적이었다.
‘물론 미식과 명주를 즐기고, 화려한 제복과 보석을 좋아하시기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춘희들을 잔뜩 불러 놓고 단체로 문란한 행위를 벌이거나, 술로 분수를 만들거나, 음식이 썩어나는 대연회를 벌이지는 않아.’
그때 텐티아의 옆으로 사내 셋이 지나갔다.
“자네 그 말 들었는가?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적기사를 시켜 제 사생아 셋을 죽였다고 하네.”
“적기사도 불쌍하군. 그런 짓이나 하려고 기사가 된 게 아닐 텐데.”
“흥. 불쌍하기는 뭐가 불쌍한가? 그 망나니에게 영지까지 하사받고 완전히 넘어간 모양이더군. 게다가 그 문란한 놈의 기사라니 지금쯤 당연히 그 망나니와-.”
빠직.
여러 번 들어본 소문이라 해서 기분이 더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기사보다 약한 주제에 기사의 기분을 더럽게 한 건 매우 큰 죄였다.
텐티아는 곧바로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네놈들이 감히 기사 앞에서 황족을 모욕하느냐!”
“!”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텐티아는 세 사내를 바라보았다.
세 사내의 얼굴이 노랗게 물들었다.
쇼트커트에 붉은 머리, 기사들이나 입을 듯한 제복, 최고급 혁대와 허가받은 사람만 찰 수 있는 장검, 늠름한 미인.
여기까지 보고도 상황을 이해 못 하면, 살아남을 자격이 없는 세상이었다.
“어, 어?”
“적기사 나리! 저희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높으신 분들의 이름을 잘못 말하고 다녔다가는 광장에서 매질을 당하고 성벽에 목이 매달릴 수도 있었다.
“네놈들이 황족 모욕죄를 가볍게 보는 모양이구나.”
법이 그랬다.
“게다가 헛소문을 입에 담아 내 명예까지 실추했으니, 이 역시 가볍게 볼 수 없다.”
사내들의 얼굴이 노랗다 못해 검게 물들었다.
기사 입에서 명예가 나왔다는 건, 누가 하나 죽어야 끝난다는 말이었다.
당장 텐티아가 화한을 뽑아 세 사내를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발렌시아누스에게 악명이 곧 방패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
텐티아는 가볍게 혀를 찬 뒤, 사내들의 따귀를 한 대씩 때리고, 이번 주일에 교회에 가서 입을 함부로 놀린 죄를 헌금으로 갚으라 지시했다.
“나리. 감사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 사내는 빠르게 사라졌고, 주변 사람들은 적기사 나리를 두려움과 경외감 어린 눈빛으로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텐티아는 그 시선을 기꺼이 받아내며 걸음을 옮겼다.
두려움과 경외감 섞인 그 시선이야말로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었다.
‘사실 방금 같은 소소한 패악질은 아무래도 좋아. 대공 전하다. 사치를 좀 부릴 수도 있고, 음탕한 유희 좀 즐길 수도 있다.’
궁정 귀족 도련님이나 아가씨 중에는 사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빈민가에서 인간 사냥을 즐기던 자들도 많았다.
하물며 텐티아는 기사였다.
많이 먹고 마시고, 무용을 떨치며, 매력을 발산해 가는 곳마다 애인을 사귄다.
이건 기사에게 있어 흠결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덕목이었다.
‘하지만 발렌 전하의 패악질은 더 큰 영역에서도 발휘된다. 이걸 패악질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
텐티아는 대성당에 들어서면서까지 상념을 이어 나갔다.
“적기사? 무슨 일로-.”
“이 패를 보여 주면 된다고 하더군.”
“들어오십시오!”
‘그레모리우스 주살, 수도 마경 사태 당시 깡패들과의 야합, 복구 과정에서 자한 동맹의 어음 구매를 유도한 후 주살, 이번에 맺은 불공정 조약. 모두 제국과 황실을 위한 일이다. 본인에게도 이익이 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한 일은 아니야.’
차라리 본인의 사적 이익만을 위한 일이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예전에는 규모의 문제일 뿐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라. 자신에게 큰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한다는 건,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 ‘옳음’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제이릴리스 폐하.’
“텐티아 경.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 예.”
텐티아의 상념은 한 사제의 부름으로 깨졌다.
대성당에는 언제나 헌금을 내고 치유를 받으려 하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사제는 텐티아를 이끌고 그들 모두를 지나쳤다.
“저. 사제님. 저도 치유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주 앞에서는 저도 한낱 종일 뿐인데, 이렇게 대놓고-.”
텐티아가 약간의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고,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 새치기가 아닙니다. 정당한 권리죠.”
사제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그녀를 줄 앞쪽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텐티아는 사제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고, 일반인들은 존재조차 모를 화려한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
천장 샹들리에와 황금 촛대를 보니 황궁 응접실보다 화려한 듯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제가 나가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발렌 대공. 또 왜…… 아.”
“성자님?”
텐티아는 황망한 기분으로 일어섰다.
‘고위 사제가 맞기는 합니다만.’
응접실에 들어온 건 성자 마테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