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50)화 (250/340)

(250)

라 마테오스 투모르.

칠흑같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윽한 눈빛의 사내.

수십 년 만에 등장한 광명교의 성자.

본래 죽었어야 할 사람조차 살려낸 기적의 화신.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켜 세속 군주들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대폭 강화한 자.

수십 명의 성기사를 보내 발렌시아누스를 납치 감금하려 한 우두머리이자, 수도 마경 사태 당시 몸을 아끼지 않고 천막촌을 순회하며 수십만 신민을 정화한 헌신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 대한 텐티아의 감상은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

당장 텐티아에게 적기사라는 별명이 붙는 계기를 만든 게 그였다.

동시에 신실한 신도인 텐티아에게 있어서, 떠받들어 마땅한 신의 대리자이기도 했다.

그녀의 주군 발렌시아누스와 마테오스는 정치적, 현실적 필요에 따라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손을 잡는 사이였으니, 그녀와 마테오스 역시 비슷한 사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다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제일 중요한 건, 그가 성자라는 사실이었다.

마테오스의 손에서 눈부신 하얀빛이 한 번 번뜩이자, 텐티아는 몸속 가장 깊고 넓은 마나 로드까지도 완전히 회복된 걸 느꼈다.

방금까지만 해도 뻐근하던 몸에 생기가 넘쳤다.

당장이라도 다시 전장에 설 수 있을 듯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텐티아는 어색함을 이겨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닙니다. 텐티아 경.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기사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데,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요.”

마테오스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밝게 웃으며 답했다.

텐티아는 약간의 의아함과 풀리지 않는 상념을 담아 물었다.

“이 패가 대체 뭐길래 성자님께서 저 같은 일개 기사를 만나러 오십니까?”

마테오스가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발렌 대공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기부금 적립 증서입니다. 지금까지 해당 패를 들고 온 사람의 헌금액을 기록해 놓고, 그 순위에 따라서 보다 고위 성직자에게 다양한 은총을 우선해서 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그럼 전하는…… 성자님께서 이렇게 나오실 만큼 기부를 했다는 뜻입니까?”

텐티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발렌시아누스는 뇌물과 협잡으로 거래를 했으면 했지, 기부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 다섯 달 동안 기부한 게 많았지요. 물론 그건 사실 기부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 배급과 민심 안정을 시도한 거지만요. 하지만 그전에도 나름 꾸준히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기부를 해 왔답니다.”

“몰랐습니다.”

마테오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경도 알 겁니다. 당장 이번에 도로이센에 저희 사제들과 기사들, 행정관들이 갈 수 있게 해준 것도 기부라고 할 수 있지요. 교회에 직, 간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었으니까요.”

텐티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고귀한 성자님의 뒤에 망나니 발렌시아누스의 그림자가 보였던 탓이다.

“……황공하오나, 이단심문관들이 도로이센의 수도에서 난리를 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테오스는 여유만만하게 답했다.

“국왕조차 침식자였던 나라입니다. 누구든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지요. 고위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에, 초기에 바로바로 검사해야 합니다.”

“아.”

텐티아는 곧바로 납득한 자신을 보고 놀랐다.

‘확실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렇군. 그 역시 양면적인 것이었나.’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몇 마디만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마테오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가져와 달라 부탁해야겠군요.”

* * *

텐티아는 황실에 극심한 치부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조심스럽게 피해 가며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했다.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라, 다른 지방이나 타국에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고 약간 당혹감이 들었습니다.”

“저게 진짜로 악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겠군요.”

“저는 기사가 아닙니까. 차라리 정복하면 정복했지, 살려 두고서 관을 꽂아 단물만 빨아먹는다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그런데 또 대공으로서 제국과 황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무슨 문제지? 라는 생각도 들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머리가 복잡합니다.”

마테오스가 찻잔을 기울이며 잠시 눈을 깜빡였다.

“텐티아 경. 그래도 충성심은 변하지 않지요?”

텐티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주군을 따르면 안 될 이유가 아니라, 따라야 할 이유를 찾는 인종이었다.

아무리 사악하다 한들 추구할 만한 낭만과 명예가 있으면 죽을 때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마테오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텐티아 경. 검과 검이 부딪히면 결국 가운데에서 만나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애초에 가운데에서 멈추면 되는 게 아닙니까?”

텐티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붉은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궤변이십니까? 그 정도 힘으로 검을 내지른다면 중간에 밀려나고 말 겁니다. 이 일격에 적을 베겠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여야 간신히 가운데를 지킬 수 있습니다.”

마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 대공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최선을 다해 밀어붙이면, 상대도 똑같이 해오겠지요. 지금 도로이센 수도에서는 수도의 주교들이 자체적으로 침식자 수색 작업을 개시했고, 자생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제가 보낸 이단심문관들을 밀어내려 하고 있습니다.”

“으음.”

“발렌 대공이 다소 경악스러운 발상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음은 인정합니다. 애초에 대여섯 명만 데리고 그레모리우스에 갔을 때, 저도 그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

텐티아 역시 그 자리에 함께했었다.

그녀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었고, 마테오스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적 이익이 아니라, 황실과 제국을 위한 일에서 그런 과격한 수를 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황실과 제국의 이익을 최대한 대변해야 하는 황족이 상대의 사정을 봐 가며 적당히 요구하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그건 꼭 발렌 대공이 망나니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당장 저도 그에게 성기사들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텐티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셨지요. 그날 많이 아팠습니다.”

“예. 결국 경은 성기사들을 막아 냈고, 저는 발렌 대공에게 혹시라도 교회법 개정을 더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만 주게 되었지요. 그렇게 중간 지점을 찾은 겁니다.”

“…….”

그녀는 무언가 이해되는 듯한 감각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명쾌해지는군요. 애초에 기사인 제가 이런 걸 고민하는 게 이상한 일이기도 한 듯합니다.”

마테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조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예?”

“기사들이 신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사들은 대귀족의 비정해 보이는 결정을 바로 옆에서 보는 만큼 그런 고민이 잦습니다. 대귀족이 숫자를 보고 내린 명령을 검과 피로 이행하는 만큼 회의감도 잦지요. 당장 청은 기사단장도 주일마다 와서 고해성사를 하고 갑니다.”

“!”

텐티아의 늠름한 얼굴에 처연함이 어렸다.

“……그 역시 중간 지점이겠군요. 그럼 저 역시 같겠군요. 충심은 커지나 회의감도 영원하고, 계속 회의감을 털어내며 살아가는 겁니까?”

마테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 모든 게 그렇습니다. 텐티아 경.”

“예?”

“당장 아침을 먹고 몇 시간만 지나면 배고플 걸 아는데도, 빵을 또 먹지 않습니까?”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텐티아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차만 홀짝였고, 마테오스는 다시 진중하니 말을 이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언젠가 천상의 왕국이 지상에 세워지리라 합니다.”

“예.”

“그럼 그때는 광명과 신도들을 이어줄 사제도 필요 없고, 신도들을 지켜줄 성기사도 필요 없겠지요. 성자도 당연히 필요 없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언젠가 이뤄질 테니 탱자탱자 놀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

“예. 경이 한 말이 맞습니다. 괴로움을 계속 덜어내며 사는 겁니다.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려면 아예 모든 걸 놓아버리는 방법뿐이겠지요.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잖습니까.”

텐티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테오스는 이마에서 성흔을 빛내며 말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제이릴리스 황제에 대한 ‘신성 황제’ 호칭을 퍼트렸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텐티아는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며 답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책망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 역시 내부적으로 그 호칭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습니다.”

“예?”

무척이나 의외인 말이었다.

텐티아는 깜짝 놀라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마테오스는 낭랑히 말을 이었다.

“제국 검술 1단계,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건 괴로움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녀가 예상외로 신실한 신자였던 것인지, 나름대로 깊게 고민한 끝에 사제들의 도움 없이 광명께 닿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각자의 길을 걷다 진리라는 점 앞에서 만났을 수도 있겠지요. 경 역시 그 경지를 진작 이뤘을 테니, 이미 알고 있던 겁니다.”

텐티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한결 맑아진 듯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그녀의 붉은 눈에 다시금 총기가 번뜩였다.

마테오스는 그 눈빛을 보며 흐뭇하니 웃었다.

“텐티아 경.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진정 망나니인 지점은 방금 경이 말 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럼 어느 부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홍등가에서 깡패를 끼고 밀수 연초 사업을 벌이며, 광명께서 죄악이라 말씀하신 술, 도박, 간음의 장을 수호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야말로 중죄입니다.”

“아하하하.”

“제가 따지면 그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쓰레기통을 부수면 쓰레기가 바닥에 쏟아지지 않겠습니까?’ 기가 차는 소리입니다. 성자인 전 필요악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인정한다고 해도, 그건 불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악입니다.”

텐티아는 늠름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홀가분한 걸음걸이로 별궁으로 돌아갔다.

“전하! 제가 엔시스와의 전투에서 깨우친 심득을 공유해 드리고자 합니다! 함께 마나 블레스트를 연습하도록 하지요.”

“텐티아 경. 가을 단풍이 이렇게 화려한데 무슨 연습인가? 수도 밖으로 나가서 유람이나 하지.”

“59.”

“그, 그럼 오늘 저녁까지만 쉬고-.”

“58.”

* * *

나는 루디와 함께 종합공방으로 향했다.

높은 담과 정예 마총 사수들의 경비를 통과하고, 8층 석조 건물 안에 들어가자 홀이 북적북적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오셨습니까?”

“다들 인사드려라! 황형께서 납시셨다.”

“아이고!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번에 배움의 거리에서 뵈었던 레옹입니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수도 부르주아들이 죄다 몰려와 내게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렸다.

난 히죽거리고 있는 철혈당주를 향해 물었다.

“마커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왜 저들이 여기 몰려온 거지?”

뭔가 일어나지 않던 일이 일어났을 때, 일단 이놈을 의심하면 어지간해서는 정답이었다.

“전하의 생각보다 마도 공학이란 학문에 큰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의족이나 의수 쪽은 더더욱 그렇지요.”

“그럼 다들 투자자들인가?”

“투자라기보다는 동업이자 분업입니다. 제게 의족과 의수, 의안 기술을 사서 생산하려 하는 자들이지요. 겸사겸사 기계 기사 부품도 맡길까 합니다. 물론 핵심 부품은 여기서만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커스가 재질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재질 다른 다리를 움직여 다가왔다.

“그래. 알았네. 다리는 이제 좀 괜찮은가?”

“예. 슬슬 적응도 끝나 가고 있습니다.”

마커스는 쿠이트 아즈가 묻혀 있던 광산에서 싸우던 도중 한쪽 다리를 잃었다.

날 위해 시간을 끌어 주던 도중 그랬기에, 난 막대한 헌금으로 고위 성직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의 다리를 회복시켜줄 생각이었다.

‘됐습니다.’

‘괜찮네. 줄 때 받게. 1년이면 다시 자라날 거야.’

‘어차피 한쪽은 자르고 의족을 끼울 생각이었습니다. 이참에 전하께 빚이나 지워놓지요. 정 죄책감 드시면 연구비나 늘려 주십시오.’

그는 이제 코넬처럼 한쪽 다리에 의족을 차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의족은 코넬의 의족과 달리 강철과 황동으로 만들고 강철 섬유에 온갖 주문 회로를 새긴 기물이었다.

“얼마나 더 걸리지?”

마커스가 손을 내저으며 부르주아들을 몰아냈다.

“안 그래도 슬슬 입찰 끝났으니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귀하신 몸 뜯어보는데 저들을 안에 둘 수는 없지요.”

루디가 눈살을 찌푸렸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뜯어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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