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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해부! 는 아니고, 약간의 채혈과 조직 검사가 동반되는 신체검사를 하겠다는 뜻이잖니.”
세레라지에가 소풍 가는 아카데미 생도들처럼 신나서 말했다.
옆에 선 생도 깡패 출신 제자, 까까머리 투피올이 수술용 칼과 집게를 꺼내고 있는 건 환상일 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누나. 잠깐만 거기 서 있어 봐.”
세레라지에의 눈빛에 광기가 어리고.
“정말로 신기하잖니. 정화와 흡수라니. 어떤 식으로든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단다. 비늘의 강도는 얼마나 강해졌니? 결정화란 뭐니? 정령화는 어떻게 조절할 수 있게 된 거니?”
마커스의 눈빛에 열기가 감돌았다.
“저 역시 몹시 알고 싶습니다.”
세레라지에의 제자들과 마커스의 제자들이 나를 에워싸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대공 전하!”
“부디 순순히 따라와 주십시오!”
“실험에 집중하라고 네 시간이나 자게 해주셨단 말입니다!”
생각보다 수도 많고 기세도 살벌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텐티아 경! 텐티아 경!”
하지만 그녀는 내가 한 달짜리 장기 휴가를 준 참이었다.
“발렌 님! 도망치세요.”
루디가 내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그녀의 손이 단검 숨겨진 옆구리 쪽으로 파고 들어가던 찰나, 세레라지에가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메두사의 속박이잖니!”
그러자 돌로 된 뱀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루디의 온몸을 칭칭 휘감아 버렸다.
“어어?”
세레라지에의 제자들이 루디를 번쩍 들어 한쪽으로 옮겨놓았다.
나는 세 걸음을 더 물러섰고, 등 뒤에 무언가 부딪치는 느낌이 드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래. 가자, 가.”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하겠다.
검사실은 6층에 있었다.
워낙 한 층 한 층을 높게 지은 석조 건물이었던 만큼, 6층까지 올라왔는데 벌써 주변 건물들이 내려다보였다.
“누나. 그런데 왜 검사실을 6층에 지은 거야?”
당연하지만 이 탑에는 상아탑처럼 바람 마법을 통한 승강기가 없었고, 세레라지에는 몸 움직이는 걸 안 좋아하는 마법사다.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 검사실을 5층에 지을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다 이유가 있잖니.”
그러자 그 새침한 마법사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제자와 조수로 꾸려진 일행 맨 뒤에서 우리를 따라오는 광명신교 사제를 흘깃 바라보았다.
“주여!”
그 역시 숨이 넘어갈 듯 헉헉거리고 있었다.
세레라지에가 마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뭐가 좋아서 저놈들 편한 걸 해주겠니. 헉헉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나는 교회와 마커스가 손을 잡고 황실을 몰아붙이는 걸 막기 위해서, 궁정 귀족들을 움직여 교회법 개정을 도왔다.
이제 교회는 침식이나 옛것 관련 실험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가서 참관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세레라지에가 이렇게 계단을 오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내 탓이다.
“누나도 헉헉거리고 있잖아.”
“입 다물렴. 같이 헉헉거리는 게 낫단다.”
“제일 좋은 건 저 사제만 헉헉거리는 게 아닐까?”
세래라지에가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었다.
“당연하잖니.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니?”
나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들어 줄까?”
세레라지에는 노란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뭔가 기대에 찬 듯하면서도 불신 어린 시선이었다.
“안길래? 라고 말했으면 전기로 지졌을 거잖니. 그런데 들어 줄까? 라니까 아무 감정 없이 도와주려는 거 같아서 혹하는구나.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가 물건이니? 짜증이 나잖니.”
“그래서 들어 줄까 말까?”
“……검사 끝나고, 정령화를 네가 완벽히 제어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되면 그때 부탁하겠단다. 지금은 올라가다가 갑자기 네 손이 반투명해져서 돌계단에 엉덩방아를 찧는 게 아닐까 무섭잖니.”
세레라지에가 지팡이를 마법용이 아니라 진짜로 몸을 지지하는 데 쓸 무렵, 그리고 그걸 보다 못한 내가 그녀를 옆구리에 낄 무렵, 우리는 6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더럽게 높네.”
“네가, 설계한 걸…… 잊지 말려무나.”
* * *
6층 검사실은 약간 서늘했고, 해가 안 드는 북향이었으며, 하얀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멀끔했다.
한쪽은 긴 테이블에 시험관과 각종 플라스크, 시약과 약재 등이 놓여 있었고, 한쪽은 해부대나 실험대, 크고 작은 솥들과 가열 마도구가 놓여 있었다.
세레라지에가 두 번 손뼉을 치자, 모든 제자가 관물대를 열어 하얀 가운을 둘렀다.
“지금부터 내 이복동생 발렌시아누스의 신체검사를 시작하겠잖니. 용혈 황족의 몸을 볼 수 있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니, 모두 집중하도록 하려무나.”
“오. 멋있어.”
“넌 이제부터 대화 금지잖니.”
“왜?”
“원래 실험체는 말이 있으면 안 되는 법이잖니?”
“다시 삿대질하면 그 손가락 물어 버릴 거야.”
“그건 조금 무서우니 마커스보고 잡아 달라고 해야겠구나.”
마커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제가 왜 끌려 들어오는 겁니까?”
나는 마커스 편을 들어 말했다.
“그 의수는 신경을 연결해서 통각을 느낄 수 있지.”
세레라지에가 싱긋 웃었다.
“끊을 수 있으니 괜찮지 않니?”
사제가 종이와 펜을 들고서 우리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흘깃하며 말했다.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혼자서 어떻게 해볼 생각 말고 바로 대성당 가서 성자님 불러오십시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좀 위험해서.”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라지에가 손짓했다.
“벗으려무나.”
여기도 큰 거울이 여럿 있어서 내 몸을 내가 볼 수 있었다.
나는 하얀 제복 단추와 넓은 띠를 풀어 한쪽에 내려놓았고, 루디가 아침마다 다려 주는 셔츠도 벗었다.
거울에 비친 몸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피부는 부드럽고 희었으며, 힘줄과 근섬유,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허리는 얇았고, 가슴과 어깨는 바위처럼 불거졌으며, 배와 옆구리에는 갈비뼈와 섬세한 근육이 아른거렸다.
겨드랑이 사이로 광배근이 잘 보여서 몸이 두껍고 강인해 보였다.
회귀 전과 달리 흉터 하나 없었다.
이만하면 무난하게 마흔 즈음에 경지에 오를 수 있을 듯했다.
물론 그때까지 용심에 삼켜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꿀꺽, 세레라지에의 제자와 마커스의 조수 중 몇몇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빠르게 못을 박았다.
“아래쪽은 안 벗는다.”
“시킬 생각도 없었잖니.”
“방금 아쉽다는 듯 한숨 쉰 놈 잡아서 밖에 던져도 돼?”
“끝난 다음에 마음대로 하려무나. 자. 우선 용언부터 일으켜 보렴.”
세레라지에가 고깔모자를 고쳐 쓰며 다가왔다.
그녀 뒤로 금발 장발의 제자 로레인과 적발 반삭의 제자 투피올이 각종 시약과 수술 도구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용언의 기운을 서서히 일으켰다.
본래는 발작적으로 비늘과 뿔이 솟았지만, 이제는 내가 조절할 수 있었다.
손바닥 위로 금빛 기운이 모여들고, 거울에 비친 동공이 세로로 갈라졌다.
세레라지에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비늘 뽑으려고 했는데 왜 여기서 멈추니?”
“용언 일으켜 보라며. 이제 비늘 안 두르고도 가능해.”
“훨씬 안정화됐구나. 그래. 그럼 비늘 일으켜 보렴.”
나는 용언의 기운을 다시 흡수하고, 손등에 반투명한 암적색 비늘 몇 장을 일으켰다.
본래보다 색도 짙어지고 두꺼워진 게 느껴졌다.
“아플 거란다.”
“실례하겠습니다.”
생도 깡패 출신 제자 투피올이 반삭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가 이걸 밀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손등에서 무언가 욱신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투피올의 집게에 비늘 세 장이 딸려 나왔다.
“손재주 좋네.”
“감사합니다.”
금발의 마녀, 로레인이 그 자리에 바늘을 꽂아 채혈까지 시작했다.
“조금만 뽑겠습니다.”
“조금만이면 얼마나?”
“저 병을 다 채울 정도요.”
유리병은 대충 10L는 되어 보였다.
“황족 시해죄로 죽기 싫으면 병 작은 걸로 바꿔라.”
“예. 전하.”
* * *
나는 채혈이 이뤄지는 동안, 세레라지에와 마커스가 제자들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시약이 아니라 이 시약이잖니.”
“마지막에 강도 측정한 자료 가져오려무나.”
“혈액 성분 변화 바로 측정할 거니까 시약 준비해 두렴.”
둘의 손짓과 지시에는 조금의 거침도 없었고, 실험은 쉬워 보였다.
“수정체는 침식 차단 마도구에 넣어 오십시오.”
“여기서 교차 검증할 겁니다.”
“기계 기사에 이식할 회로도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뭔가가 쉬워 보인다는 말은 그걸 아주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니?”
세레라지에가 한참 비늘에 전류를 흘리다 나를 흘깃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보기 좋아서.”
내가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징그러우니까 입 다물렴. 이게 뭐가 좋아 보이니.”
세레라지에가 눈을 흘겼고.
“비늘 달래서 뽑아 줘도 난리야. 나 아니면 용의 비늘을 어디서 구하려고 그래?”
나는 턱을 쳐들며 말대꾸했다.
“으음. 그건 그렇잖니.”
세레라지에가 또다시 집게를 들고 다가왔다.
“수정 결정도 채취해야 하잖니. 아즈의 힘도 일으켜 보려무나.”
“아. 이거 기분 이상한데.”
나는 쿠이트 아즈의 힘을 표면으로 끌어 올렸다.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온 기운이 비늘을 매개체 삼아 자라났다.
쩍.
하얀 손이 금 간 도자기처럼 갈라지고, 그 틈에서 붉은색 결정이 하나둘 자라났다.
“주여.”
사제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성호를 그었고, 제자와 조수들은 잔뜩 흥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며, 세레라지에와 마커스는 흡족하니 웃었다.
“이게 정령화랑 결합되는 거라고 했잖니?”
“그렇지. 몸 일부를 변화시키는 거니까.”
세레라지에는 손가락보다 커진 결정을 수확하듯 뽑아냈고, 마커스는 마도구를 통해 결정에서 침식의 기운이나 정신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지 검사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별도로 정화 없이 바로 이식해도 되겠어요. 공명을 이용해 기계 기사들을 강화하기도 쉽겠습니다.”
검은 눈은 열락에 차 번들거렸고, 의수와 손가락은 당장이라도 기계를 만지고 싶은 듯 꿈틀거렸다.
세레라지에가 사제를 흘깃하더니, 입을 세모나게 찌푸렸다.
“불안하기는 하잖니. 교회 놈들이 발목 잡으면 골치 아파지는 거 아니니?”
사제는 못 볼 걸 본 얼굴로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단심문과 숙소로 달려가 나와 세레라지에를 신고하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럼 가서 검증받지. 뭐. 루디. 별궁 가서 금화 한 자루만 가져와 줄래?”
“누구에게 말이니?”
“성자 마테오스.”
사제가 미친 듯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 * *
“쿠이즈 아즈라 불리던 옛것은 타협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것이 발렌시아누스의 대공에게 완전히 흡수되었고, 모든 자아가 사라져 하나의 기능이 되었음을 광명신의 이름으로 공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금화 한 자루를 헌금했고, 마테오스는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화하고 분석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그 결론이 위와 같았다.
마테오스는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용찬, 정령, 이제는 옛것까지 집어삼키다니. 대공은…… 뒤돌아보지 않는군요.”
뒤돌아보지 않는다, 라.
무려 40년을 뒤돌아온 나로서는 썩 공감되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말했다.
“너무 멀리 와 버렸습니다.”
“이제 또 얼마나 강해진 겁니까?”
“쿠이트 아즈는 공격적인 옛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할 수 있던 걸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지요.”
나는 불의 정령 한 명을 불러내 꺼진 촛대에 모두 불을 붙이게 했다.
새의 날개를 단 소년 형태의 자그마한 정령이 방 안을 붕붕 날아다니다 펑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마테오스가 그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다,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
“도로이센 쪽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신실한 신도들이 국정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침식자 소굴을 수색 중입니다. 조만간 모든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그리고 정화병에 첩자들 섞어서 보낸 건 특별히 봐주겠습니다.”
정화병에 황실 첩자들이 섞여 있다는 말은, 정화병들의 활동을 황실이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렁.
일순 모든 촛불이 흔들렸고, 검은 성자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 역시 어느새 이런 계산에 능통한 조작의 장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난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마차를 타고 종합공방으로 돌아가는 길, 난 마커스에게 명령했다.
“지금 내 수정 파편으로 기계 기사들 강화하는 거 얼마나 걸리지?”
“6달은 걸릴 듯합니다.”
“1달. 가능하지?”
“이런 망나니 새끼를 봤나……. 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