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52)화 (252/340)

(252)

가을도 지나가고 눈 내리는 겨울이 왔다.

농부들은 내년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지만, 황족의 일상은 치열한 법이었다.

오늘 나와 세레라지에는 옛 빈민가에 지어둔 마도구 공방과 슬라임 양식장을 순회했고, 불량률 높은 담당자를 갈궜다.

찬 바람 맞아 가며 신축 공방 부지를 돌았고, 코넬 뒤를 캐는 한 의원 후보를 잡아 지하수로에 담갔다 꺼냈다.

“날이 너무너무 춥잖니.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두꺼운 로브 입고 올 거 그랬잖니!”

“몸 좀 녹이러 갈까?”

“이 근처에 우리가 갈 만한 곳은 없잖니. 게다가 이 마차 소문난 ‘검은 마차’잖니. 주인과 손님들이 가게 문을 닫고 도망칠지도 모른단다.”

“아니. 약간만 방향을 틀면 있지.”

나는 마부에게 손짓했고, 마부는 척하면 척이라고 그대로 홍등가 여명 카지노로 향했다.

한때 은화를 혀 위에 올려 주니 마니 신경전을 벌였던 마부였다.

그러고 보니 세레라지에를 카지노에서 빼 올 때도 이 마부가 마차를 몰았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자니 세레라지에의 얼굴이 시시각각 썩어들어갔다.

나는 뻔뻔하게 웃었고, 세레라지에는 내 손목을 전기로 지졌다.

“꼭 여기를 와야겠니?”

“누나가 출세했다는 걸 제일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곳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말을 말자꾸나. 너랑 이야기를 하고 있자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잖니. 이 궤변론자야.”

“사람 세상 돌아가는 게 다 그렇지.”

“그래서 내가 사람 세상을 싫어하잖니.”

나와 세레라지에는 VIP 대접을 깍듯하게 받으며 안쪽 방으로 들어갔고, 미남미녀들이 나와 독한 위스키와 포도주, 과일 안주와 고급 치즈를 가져왔다.

한두 잔 마시기 시작하니 슬슬 몸이 데워졌다.

세레라지에가 포도주 담긴 유리잔을 기울이며 은은하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짜 놓은 결정체 공명 주술 회로를 마커스 놈이 결국 죄다 주문 회로로 바꿔놓았잖니. 그놈도 난놈이란다. 그래. 슬슬 기계 갑옷 시험 기동을 해봐야 하는데, 수도가 너무 안전해졌잖니.”

“으음. 헬레나에게 모의전이라도 해달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자니, 적가면이 찾아와 깍듯하게 머리를 숙였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언제나 선을 잘 아는 사람이라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 아, 혹시 요즘 불온한 기색을 보이는 가게는 없나?”

“VIP 덕분에 편하게 영업하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소파에 몸을 묻었고, 적가면은 내가 바라던 답이 이게 아니라는 걸 눈치챈 듯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괴담이 몇 개 있기는 합니다.”

세레라지에가 솔깃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자세히 말해 보려무나.”

그리고 적가면의 말이 이어지자, 그녀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상아탑 쪽 지하수로에서 요즘 괴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보수공사를 위해 들어간 인부 여럿이 잡아 먹혔습니다.”

“여러 생물을 섞어 놓은 듯한 모습에 푸른 수정이 박혀 있다고 하더군요.”

세레라지에가 암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색이 다른 두 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발렌. 위로금 좀 전달해 줄 수 있겠니?”

“짐작 가는 거 있어?”

“쿠이트 아즈가 네게 흡수된 뒤로, 그 파편들도 뭔가 영향이 있었을 거잖니. 번쩍인다거나, 떨린다거나.”

“그랬겠지.”

파편은 모두 이어져 있고, 본체가 내게 넘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걸 계기로 뭔가 실험이 시작된 거 같잖니.”

“아까워서 오랫동안 쓰지도 않고 있던 귀한 시약이 다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겠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이 문제 삼으려면 얼마나 크게 문제 삼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제이릴리스는 이참에 상아탑을 완전히 벗겨 먹으려고 할 테고, 마테오스는 상아탑 특구까지 교회법의 감시하에 두려 할 테였다.

물론 상아탑의 뻔뻔한 원로들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해서 책임을 지려 하는 인종이 아니었으므로, 황실과 교회가 보내온 전령의 머릿속에 장난질을 칠 테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세력 간 자존심 싸움이 될 거다.

그리고 세 세력의 수장 모두 자존심 높기로 어디서 안 밀리는 사람들이었고, 손가락질 한 번, 주문 한 마디면 자존심 싸움을 멸망 전쟁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안 돼!”

나는 빽 소리를 지르고 세레라지에를 돌아보았다.

세레라지에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발렌. 이걸 굳이 폐하께 보고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니?”

“선조치 후보고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 정도면 되겠잖니. 술 깨는 마법 아니?”

“써 주게?”

“그렇잖니.”

기계 기사 여섯이 지하수로 출입구 앞에 모였다.

자정이었다.

* * *

기계 갑옷은 장갑 두께가 보통 갑옷 두 배였고, 중심을 잡기 위해 발 쪽을 무척 크고 무겁게 만들었다.

신장 180cm대의 기사가 기계 갑옷을 입으면 230cm에 달했다.

괜히 입는 게 아니라 타는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기존의 지하수로라면 이런 기계 기사들의 접근이 어려웠겠지만, 최근의 지하수로는 제이릴리스가 수도를 복구할 때 토사를 채취당해서 천장이 높아졌고, 양옆 인도도 넓어졌다.

거대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활보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수색 시작하겠습니다.”

“방심하지 마라.”

“2인 1조.”

치이이익!

은은한 어둠 속에서 증기 피어오르는 소리가 울리고, 황동색 판금 장갑 안에서 붉은 색채가 번뜩였다.

색채는 그 자리에서만 빛나는 게 아니라 판금 사이로 보이는 강철 섬유를 타고 피가 흐르듯 온몸으로 흘렀다.

어둠 속에서 붉은 불빛이 유유히 빛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관이었다.

“멋지지 않니?”

세레라지에가 물었고,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멋있어야지. 내가 금화를 몇 닢이나 쏟아부었는데.”

“원래 마법의 발전에는 금화가 들어가는 법이잖니.”

이제 침식자 수색은 직감이나 사제의 기도만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기계 갑옷에는 세레라지에가 개발한 침식자 추적 마도구가 부착되어 있었고, 기계 기사들은 파동이 퍼지는 걸 기다려 가며 미로 같은 지하수로를 배회했다.

나는 세레라지에 옆을 지키며 그들을 따랐다.

그때 선두의 2인조에게서 우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쪽입니다. 전하!”

반경 100m 안에 침식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가자. 누나.”

“그래.”

두 기계 기사가 앞장서고, 나와 세레라지에는 둘을 따랐다.

은은한 어둠 속에서 점점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걸 왜 몰랐나 싶을 정도였다.

워어어억!

키에에에!

무언가가 뒤엉켜 싸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떤 괴물인지 상판 좀 보자.”

우리는 모퉁이를 돌았고, 난투 현장을 목격했다.

한쪽은 괴담의 주인공이 분명했다.

놈은 하체를 물속에 담그고 있었고, 상체는 물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나 거대한지 머리가 천장에 닿을 지경이었다.

피부가 없어서 붉은 근육과 뼈, 각종 내장이 드러나 있었고, 뼈 곳곳에 푸른 수정 결정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수정질 뼈로 된 칼이나 가시, 손톱도 무시무시했다.

반면 반대쪽은 놈에 비하자면 훨씬 인간 같은 모양새였다.

키는 나보다 약간 작았고, 다리는 역 관절이었으며, 리자드맨을 닮아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었다.

양손에 난 한 쌍의 큰 비늘로 만들어진 칼이 그들의 주무장이었다.

세레라지에가 그들을 보자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

“생조학파의 고급 키메라란다. 원로님들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닌 듯하구나.”

나는 눈과 귀 중 한 곳을 의심했다.

“고급?”

여덟 마리의 키메라 중 멀쩡히 서 있는 건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나뉘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키이이익!”

키메라 하나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순간 괴물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이고, 수정질 뼈로 된 칼이 손목에서 튀어나왔다.

사악!

푸른 빛이 반원을 그리고, 머리 잃은 키메라가 바닥을 굴렀다.

몸뚱이는 몇 번이고 꿈틀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괴물이 수정질 손톱을 뽑아 심장을 찌르자 조용해졌다.

“누나. 저거-.”

세레라지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널 닮아가는 거 같아서 이렇게 말하기는 싫지만, 조졌잖니.”

머리 없는 키메라가 일어섰다.

비늘 사이로 푸른 결정을 자라나게 하면서.

순간, 괴물과 키메라 시체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죽은 키메라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기계 기사에게 명령했다.

“두 번 죽여버려.”

치이이익!

톱니가 돌아가고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거체들이 충돌했다.

* * *

“누나. 누나가 천재는 천재다.”

“이제야 알았니? 넌 바보인 모양이구나.”

“칭찬해 줘도 난리네.”

눈앞에서 벌어지는 건 싸움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키에에엑!”

수정에 잠식되어 다시 일어난 키메라가 푸르게 빛나는 비늘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에 기계 기사는 코웃음 치며 붉게 달아오른 황동색 건틀릿으로 정권을 내질렀다.

쾅!

비늘 칼과 건틀릿이 부딪히고, 비늘 칼과 키메라의 상반신이 동시에 으스러졌다.

“힘이 있어도 강철 섬유가 못 버텨서 다 끌어내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네 수정 덕에 깔끔하게 해결되었잖니.”

“저렇게 마도구로 만들어낸 누나랑 마커스가 대단한 거지. 저것도 누나 술식이지?”

두 번째 기계 기사가 대검을 휘둘러 키메라 하나를 짓이기는 동시에, 왼손 건틀릿에 새겨진 공격용 주문 회로를 발동시켰다.

치지지징! 푸른 빛이 번뜩이고 전류 흐르는 그물이 쏘아져 나갔다.

“시이이익!”

그물에 휩싸인 키메라는 미친 듯 몸을 뒤틀었지만, 그물은 빠르게 조여들었고, 키메라는 네모나게 잘린 고깃덩이가 되고 말았다.

치이이익.

그을린 단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두 번째 기계 기사가 연속으로 그물을 발사했다.

치지지징! 치지지징! 치지지징!

“원래 장탄이었다가 생성으로 바꿨다며.”

“그래. 네게 빨간 약 만들어 주면서 물질을 연구했잖니. 물론 대지도 따로 전공해서 가능했단다.”

키메라들이 빠르게 쓰러지자, 괴물은 여섯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하.”

“전하!”

치이이익!

이미 사방에서 남은 기계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괴물의 몸에서 푸른 수정이 은은하게 달아오르고, 번갯불 같은 불꽃이 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정신 파동 대비해라!”

“워어어어어어어어억!”

치이이잉!

괴물의 포효와 함께 푸른 수정이 공명하고 정신 파동이 지하수로를 뒤흔들었다.

내심 두셋이 비틀거리리라 예상했지만, 기게 기사들은 하나같이 굳건히 서서 대검을 뽑아 들었다.

“워어어억?”

괴물이 당황한 듯한 걸음 물러섰다.

세레라지에가 잔향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보려무나. 저것도 네게서 따 온 거잖니.”

“아.”

나는 흐뭇한 기분에 미소 지었다.

기계 기사들의 투구 옆쪽에 달팽이관 모양의 열선 회로가 들어가 있었다.

열선 회로는 붉게 달아오르며 침식의 기운을 지글지글 태웠다.

“불의 정화잖니.”

괴물이 십자로 수로가 교차하는 교차로에 서 있었고, 여섯 기계 기사는 괴물을 포위했다.

괴물이 수정질 뼈 칼을 쳐들고, 기계 기사들이 왼손을 겨누었다.

치이이익!

화르르륵!

증기가 피어오르는 동시에, 맹렬한 불길이 쏘아져 나갔다.

“워어어억!”

수정질 뼈는 거의 타지 않았지만, 살과 내장은 활활 타올라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물론 괴물도 허둥거리다 당하지는 않았다.

놈이 기계 기사가 한 기만 서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

아무리 봐도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 체급이 아니었다.

나는 뛰쳐나가려 했지만, 세레라지에는 여전히 아릿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우우우웅!

시이이잉!

그 순간, 여섯 기계 기사의 판금 안쪽에서 붉은 결정체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내 파편이나 다름없었기에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괴물을 정면에서 마주한 기계 기사가 마나 블레이드 두른 대검을 베어 내렸다.

츠카아악!

괴물은 뼈 칼을 휘둘러 막아내려 했다.

체급만 보자면 막다 못해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쨍그랑!

그러나 기계 기사의 검은 괴물의 수정질 뼈 칼을 잘라 버리고, 되려 괴물의 손목을 반쯤 날려버렸다.

나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기계 기사들의 각 관절부에 들어간 수정체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만 보이는 끈으로 연결되어있는 감각이었다.

시이이잉!

나는 수정체를 약간 더 공명시키며 기계 기사들에게 힘을 보태주었고, 내친김에 끈을 따라 불길까지 흘려보냈다.

세레라지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썩 우쭐해지는 눈빛이라서, 씩 웃어 주었다.

화르르륵!

기계 기사들이 불길에 휩싸인 검을 들고 괴물을 포위했다.

괴물의 분노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여섯 눈을 똑똑히 마주하며 말했다.

“너 하나 죽이는 일보다 그다음에 상아탑이랑 황실이랑 교회랑 조율하는 게 더 힘들어. 상상만 해도 막막할 지경이라고.”

기계 기사들이 불타는 대검을 괴물에게 찔러 넣었다.

“하지만 사람 잡아먹는 괴물은 오늘 죽었어. 그렇게 하나하나 해결해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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