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도로이센과의 전쟁이 그랬듯, 언제나 싸움보다 뒷수습이 더 어려운 법이었다.
대회의실이 있는 상아탑 50층.
남향 통유리창에서 햇살이 쏟아지고, 대리석 깔린 바닥과 보석 샹들리에가 빛나는 멋들어진 응집실에, 각 학파의 원로들이 모여들었다.
“이게 무슨 창피랍니까?”
“지금 창피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는 상인들 핑계도 못 댑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1년 만에 연구실 밖으로 나왔는데 알 수가 있어서야지.”
나와 세레라지에는 소파에 몸을 묻고 모일 만큼 모이기를 기다렸다.
붉은색과 크림색이 그라데이션된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세레라지에의 사제(師弟), 니아르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다가와 다과를 준비했다.
아주 맛있어 보이는 마카롱이었다.
나는 유들유들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아이고. 마법사님이 직접 차려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공 전하.”
“상아탑 밖의 신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라고 말씀하셨던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세레라지에가 내 손목을 전기로 지졌다.
“분위기 파악 좀 하렴.”
“……나도 막막해서 이래.”
원로들의 시선은 아주 따가웠다.
빚이라는 건 묘한 면이 있었다.
금화 100닢 빌리면 은행이나 채권자가 나를 닦달하지만, 금화를 10만 닢 빌리면 은행과 채권자가 내게 읍소하게 된다.
내가 못 갚으면 같이 망하기 때문이다.
지금 상아탑이 친 사고도 채무 관계 역전이란 면에서 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옛것 관련 연구 중 실험체가 탈출해 인명 피해가 발생했는데, 그걸 황실에도 숨기던 상황이다.
절차대로라면 바로 사실을 공표한 뒤 상아탑에 배상과 사과, 재발 방지 절차를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워낙 큰 사건이다 보니, 공론화시키면 엄청난 배상을 요구해야 하고, 교회의 감시도 받으라고 해야 한다.
지금 상아탑은 시약 자급자족이라는 1천 년의 숙원을 이뤄 들뜬 상태다.
‘배상금 금화 100만 닢! 그리고 모든 옛것 실험에 교회의 감시를 받을 것!’
‘ㅈ까.’
‘으아아악!’
이런 상황에서 돈이나 감시 체제로 상아탑의 목줄을 잡으려고 하다가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대마법사들이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죄다 남부 아미르 토후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난 이 일을 공론화하지 말고 조용히 해결해야 하는 동시에, 제이릴리스가 만족할 만큼의 고깃덩이를 물고 가야 했다.
반대로 상아탑 원로들은 어차피 내가 공론화하지 못할 건 아니까, 최대한 작은 보상으로 나를 돌려보내려 할 거고.
* * *
마지막으로 화려한 옷차림에 베일 드리운 챙 넓은 모자를 쓴 게스타르테와,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가진 생조학파 원로 크리오스가 들어왔다.
“늦었구나.”
“죄송, 죄송합니다.”
게스타르테는 여전히 고고했고, 크리오스는 미친 듯 달려왔는지 숨을 헉헉거렸다.
“…….”
나는 게스타르테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녀는 원로들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양손을 연극적으로 들었다.
“미안하구나.”
“생각보다 사과가 빠르십니다.”
“사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공론화나 막대한 배상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였다.
나는 쓰게 웃으며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도 못 잔 몰 꼴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일주일을 밤새워 연구해도 생기 넘치던 눈이 하룻밤 만에 핼쑥해졌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아즈의 파편으로 만든 안정제 같은 거 있으면 조제법이랑 같이 줘 보십시오. 폐하께 가져다드릴 겁니다.”
원로들이 한 번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재료 수급이 문제였지요.”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대공.”
예상대로 이 정도는 큰 문제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고 상아탑 주도로 학술회 하나 만들어서, 대 침식 논문 좀 외부에 발표해 주십쇼. 아주 거창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상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제국에 기여들 좀 합시다.”
이번에는 약간의 술렁거림이 잃었다.
“이게 공짜로 우리가 연구한 기술 내놓으라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대신 마도구 홍보는 훨씬 잘될 겁니다. 마법사들끼리 연대해서 교회와 맞서기도 쉬워질 거고요. 과한 신비는 두려움을 부릅니다.”
“흐음. 오히려 마법 사회의 주도권을 잡을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전 반대입니다. 어떻게 속세와 연을 끊었는데 이렇게 다시-.”
한 차례 파문이 일었지만, 결국 원로들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학술회 황실 대표로는 세레라지에 대공이 나갈 겁니다.”
내가 덧붙인 말 때문이었다.
“그렇다면야.”
“안심입니다.”
“교회 말고도 침식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려 주겠습니다.”
학술회를 빌미 삼아 상아탑을 협박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세레라지에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체 왜 내 일이 점점 느는 거니?”
“으음.”
“빈민가 공방이 이제 여덟 개, 종합공방, 폐하가 맡기는 연구, 제자 육성, 워록 연습, 이제 학술회까지 하라는 거니? 장난하니?”
나는 뻔뻔하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숙명이야.”
세레라지에가 내 손목을 전기로 지졌다.
* * *
“……이 정도로 마무리했사옵니다.”
“의외로 자비롭게 끝냈구나. 개인적인 선물은 받지 않았는가?”
황제의 집무실.
제이릴리스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고, 가볍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츠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손 속에서 얇은 뱀 같은 섬유 가닥이 잔뜩 기어 나와 손을 감쌌다.
“이런 걸 받았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약간 놀란 듯 웃었다.
“신기하구나.”
손에 착 달라붙은 검은 장갑은 신축성이 있으면서도 금속 같은 광택이 맴돌았다.
“파괴 학파와 생조 학파에서 공동으로 선물한 물건입니다. 세상 만물을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하더군요.”
“보이지 않는 손?”
제이릴리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녀의 책상 위에 올라간 서류 한 장을 손짓만으로 떠오르게 했다.
“이게, 생각보다는 어렵사옵니다.”
서류는 우리 눈높이까지 올라갔다가 팔랑거리며 다시 떨어졌고, 나는 곧바로 손을 뻗어 허공에서 서류를 잡아챘다.
콰직.
동시에 제이릴리스도 손을 뻗었고, 서류는 형편없이 구겨졌으며, 우리는 손을 맞잡은 모양새가 되었다.
“오빠!”
평소의 위엄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20대의 외모과는 어울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분명 환청일 거다.
“송구하옵니다!”
나는 곧바로 몸가짐을 바로 하며 눈을 내리깔았고, 제이릴리스는 헛기침하며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제이릴리스가 먼저였다.
“그만. 여기서 이 서류에 대해 한 마디라도 더 나불거리면 입술을 혈마법으로 붙여 버리겠노라. 그래. 그대는 염동력 장갑을 받았군. 세레라지에 대공은 마도서를 받았는가?”
나는 다시 얼굴에 철판을 깔았고, 말을 이었다.
“예. 폐하. 파괴 학파와 전격 학파의 공동 연구 마도서를 받았사옵니다.”
그녀가 위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학술회까지 주최해 준다니 이 정도로 넘어가도 되겠구나. 유족들에게 보상금은 전달되었는가?”
“예. 신속히 전달하셨사옵니다. 상아탑 역시 이중으로 보상하였으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기계 기사들의 실전 테스트는 어떠했는가?”
나는 또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아주 만족스러웠사옵니다. 보시다시피 공명 강화, 공유, 전격 그물, 화염 방사, 열선 정화 등 모든 기능이 발휘되었습니다.”
“음.”
“특히 열선을 이용해 ‘불의 정화’가 통한다는 사실이 기껍사옵니다. 소드 유저 급 병사들에게 회로 새겨진 투구를 씌워 주면 침식자와의 전장에도 대거 투입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기술은 주술 회로 상태인가, 주문 회로 상태인가?”
“마커스 후작이 주문 회로로 가다듬었사옵니다. 단, 이해하지 못한 마법을 주문 회로로만 새기고 발동시키는 일도, 정신 오염과 침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어 대량 생산 시에는 주의가 필요할 듯합니다.”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참고하도록 하지. 그래.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구나.”
그녀의 시선에 옆에 놓인 서류들에 닿았다 떨어졌다.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어.”
[동부, 카리오사 닻 군도에 축성 준비.]
[북부, 세베릭 수목형 거대 이물 제거.]
[남부, 체사르 유목민족 대토벌.]
[서부……]
그 외 수많은 서류가 광대한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려오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드러난 어깨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나의 황제는 그런 내 시선을 읽은 듯, 광폭한 육식 맹수처럼 웃으며 말했다.
“성자에게 들었다. 도로이센 쪽이 잘 안정되고 있다더구나. 짐이 운석을 떨굴 필요는 없겠어.”
“아.”
일순 내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고, 나는 잠시마나 주제넘은 생각을 했던 걸 후회했다.
누가 누굴 걱정한 건지 원.
“그래. 잘해 주고 있노라. 혹시 바라는 건 있는가?”
나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기계 기사의 성능과 마총 부대의 효능을 추가로 시험해 볼 겸, 헬레나 대공과 모의전을 벌이고 싶습니다.”
훈련이나 마상창 시합을 빙자해 군대를 모아 놓고 반란으로 돌변하는 일은 역사 속에 많았고, 군사적 움직임은 언제나 신중해야 했다.
나의 황제는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리 무게 잡고 청하는가? 편한 대로 해라.”
“감사하옵니다. 아-.”
나는 상아탑에서 아즈의 결정으로 만들었다는 약을 가방 채로 바쳤다.
제이릴리스가 내용물을 슬쩍 확인하고, 역시 나른하게 웃었다.
“그래. 고맙구나.”
나는 만에 하나 하는 불안감을 품고 물었다.
“폐하. 혹시 옥체에 작은 생채기라도 있으시다면, 결코 숨기지 마시옵소서. 많은 소드 마스터가 무리하다 쓰러졌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손짓했다.
“짐도 연구해볼까 해서 달라 한 것이다. 대공은 쓸데없는 걱정 그만두고 모의전이나 하도록.”
* * *
“그래서 모의전 일정을 잡아보려고 하는데, 가능해?”
물론 난 그녀의 답을 알고 있었다.
헬레나.
곱슬곱슬한 금발과 요사스러운 적안, 불꽃 같은 열기와 전쟁의 광기를 품은 심장을 가진 야전 사령관은 곧바로 종을 울렸다.
뎅, 뎅, 뎅.
“부르셨습니까!”
“2대대장 왔습니다!”
“마법사 부대 시약 배분!”
“5분 대기조 출동 준비 시작!”
옛 아카데미 졸업 유예자, 취준생 깡패, 생도 깡패 출신들로 꾸려진 정예 장교들이 흉갑 위로 멋들어진 군복 코트를 입고 달려왔다.
헬레나가 황홀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의전이란 실전과 같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시작되어야 하는 법! 지금 당장 성문 밖 훈련장으로 향한다! 기동 작전 시작! 1시간 내로 포진한다!”
“포진한다!”
“이동! 이동! 이동!”
“기병 중대, 수송 중대!”
장교들과 기사들과 장교기사들이 달려 나갔다.
나 역시 기계 기사들과 마총 사수들을 불러 모았다.
“서로 때려 부수는 게 아니니 힘 조절 잘해라. 마탄은 전부 충격탄으로 교체했나?”
“예. 전하.”
“그럼 훈련했던 대로만 해라.”
넓은 평야에 양쪽 병사들이 포진했다.
나와 헬레나는 백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막사를 쳐 놓고, 나란히 앉아 전장을 바라보았다.
헬레나 뒤로는 참모 장교들이 앉아 있었고, 내 뒤로는 마커스, 세레라지에, 루디, 텐티아 등이 앉아 있었다.
나는 빠르게 움직이는 헬레나의 중장기병들을 보며 말했다.
“대 침식자 전략이라기에는 기병대가 강한데, 어떤 적을 상정하고 준비했지?”
헬레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침식자와의 전쟁도 아주 숭고한 일이지만, 사실 그건 전쟁보다는 토벌에 가깝지. 토벌에 가까워야 하고.”
그녀 말대로였다.
침식자와의 전쟁은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되는 만큼, 효율을 따지지 않고 자원을 퍼붓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같은 인간과의 전쟁을 원한다. 좀 내가 가진 걸로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 최근 상정한 적은 랑소와 공화국군이었다.”
나는 회귀 전 랑소와 공화국을 떠올렸다.
“랑소와. 그곳은 마법사들이 거의 없다고 알…… 아니. 들었는데, 그럼 내 사병들과의 모의전은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군. 놈들에게 마도 공학의 산물 같은 건 당연히 없을 테니까.”
헬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육식 동물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나름의 초인 양성법과 중, 원거리 공격 수단이 있다고 한다. 기계 기사와 마총 사수라면 딱 맞아. 고마울 따름이다.”
저 앞에서 양쪽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나니 대공을 위하여!”
“악귀 대공을 위하여!”
“전장의 공녀님을 위하여!”
“정복 공녀를 위하여!”
듣는 사람 썩 기분 좋게 해주는 말들은 아니었지만, 막강한 기사와 병사들이 우리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고, 헬레나 역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때 등 뒤에서 사제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들어 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얼마나 대단한 일이기에 이 대단한 순간을-.”
“침식자들의 본거지를 찾았다 합니다.”
“일단 이쪽으로 앉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