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54)화 (254/340)

(254)

헬레나가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발렌시아누스 네가 내 병사들의 승리를 봐줬으면 했다만, 아쉽군. 먼저 나가봐도 좋다.”

사제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헬레나 대공 전하도 같이 들어주시면 합니다.”

“나도?”

“랑소와 공화국도 얽힌 일입니다.”

“그거 아주 기쁜, 아니. 중대한 일이군.”

헬레나가 탄성을 토하고, 막사 안에 불안한 눈빛들이 오갔다.

루디가 주변을 경계했고, 세레라지에가 흡음 결계를 쳤으며, 텐티아는 몇몇 장교와 마커스 휘하 조수들을 내보냈다.

사제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해 보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로이센 왕국에서 암약한 침식자들의 본거지는 랑소와 공화국이었습니다.”

텐티아 경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고, 헬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둘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관계일 텐데.”

회귀한 나 역시 곧바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랑소와 공화국은 1천 년 전 인류가 이종족에서부터 독립한 이래로 꾸준히 만민평등과 공화주의를 부르짖어온 자들이었다.

반면 도로이센은 우리 솔레타라스보다도 중앙 집권이 강하고, 검객과 영웅을 숭상하는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나라였다.

“그 둘이 전쟁했다는 이야기, 서로의 상인과 전령을 내쫓거나 처형했다는 이야기는 흔하게 들어보았다만, 같이 음모를 꾸몄다는 이야기는 처음이군.”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사실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끼리 사이가 좋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만큼 친해지기 쉬운 나라도 없지요. 저희도 이번 조사를 하면서 각국 주교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양국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교역 행위를 막거나 방해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양국 간 관세 역시 꽤 낮은 편이고요.”

내가 회귀 전에 홍등가 망나니 생활을 그만두고 황제의 망나니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양국 모두 사악한 침공군이었고, 불태워 마땅할 침식자 소굴이었다.

그런 관계가 있는 줄은 몰랐네.

물론 여기까지 들었으면 대충 감이 잡혔다.

“알 만하군. 슬슬 양국 지도층 간 적대적 공존이 시작된 건가?”

“예. 전하. 역시 성자님 말씀대로 이해가 빠르십니다.”

사제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마테오스는 내가 이런 걸 빠르게 이해하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결론적으로 옳았으니 뭐라 할 수도 없군.

그때 헛기침 소리가 들려와 옆을 살짝 돌아보니, 텐티아 경과 세레라지에 누나가 하나같이 아무것도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 누나?”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아는 기사와 마법사의 멍한 표정은 귀했기에, 나는 그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에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세레라지에가 텐티아 경을 슬쩍 쳐다본 다음,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발렌. 적대적 공존이라는 게 무슨 뜻이니?”

* * *

나는 어디까지 말해야 이 세상 물정 모르는 마법사도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랑소와는 공화국이잖아. 공화국이 뭔지는 알지?”

세레라지에가 드물게 자신 없는 어조로 답했다.

“선거로 의원들을 뽑고, 그 의원들이 또 총리를 뽑잖니. ……이게 아니니? 아무튼 혈통이 아니라 선거로 임기제 왕을 정하는 나라라고 알고 있단다.”

나는 통령과 왕의 차이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래. 대충 맞네. 중요한 건 선거로 뽑힌 애들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거야. 그럼 투표권 있는 사람들 비위를 맞춰주는 게 중요하겠지?”

“그렇지 않겠니. 그래야 다음에 또 뽑아주겠지.”

“맞아. 그런데 옆에 있는 도로이센은 중앙 집권적인 왕국이잖아. 그러니까 투표권 있는 사람들이 도로이센을 무서워해. 언제 쟤들이 쳐들어와서 우리를 정복하고 투표권을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거지. 그럼 선거에 나오는 애들이 뭐라고 하겠어?”

이번에는 세레라지에가 아니라 텐티아 경이 답했다.

“저들의 위협에 맞서 힘을 길러야 합니다, 저들을 공격해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겠군요.”

나는 손뼉을 쳤다.

“맞네. 경. 하지만 그렇게 뽑혔다 해서 진짜로 전쟁을 벌일까? 잘못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건데. 또, 아들딸들이 전장에 끌려가 죽으면 지지율도 떨어질 거고.”

세레라지에, 텐티아, 헬레나가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그럼 진짜로 전쟁하지는 않을 거면서, 계속 전쟁하자는 말만 한다는 거니?”

“무슨 그런 겁쟁이 놈들이 다 있답니까?”

“그 심장 뛰는 걸 왜 안 해?”

마지막 말은 핵심에 엇나갔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서로를 욕하면서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달래는 건 흔한 일이지. 당장 교회도 가뭄만 들면 황실이 부덕하다고 하고, 황실은 가뭄이 들면 사악한 침식자들 때문이라고…… 못 들은 걸로 해.”

황족이 사제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세레라지에, 텐티아, 헬레나가 피식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튼 실제로 싸우지도 않을 거면서 서로를 욕하며, 불안에 찬 신민들의 지지를 받는 작업을 적대적 공존이라고 해.”

나는 그렇게 말을 정리했고, 사제는 다시 입을 열려 했으나, 텐티아 경이 나를 보며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럼 도로이센은 왜 공존을 택한 겁니까? 그 검객들은 전장을 숭상하던데 말입니다.”

소드 엑스퍼트의 발언권은 하늘처럼 무거웠고, 사제는 얼굴을 구기며 눈을 피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엔시스 역시 전쟁을 피할 만한 왕은 아니었지. 하지만 왕태자는 어떨까?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기사들과 신민들의 지지가 필요하지. 하지만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는 건 무리야.”

“자칫했다가는 다 잃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욕만 하는 거지. 뭐. 경 말대로 비겁한 겁쟁이들이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군.”

“음. 이해는 되지만 설득은 안 되겠습니다.”

텐티아 경이 늠름한 얼굴에 명쾌한 미소를 띠었고, 가련한 사제는 그제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 * *

“방금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서로를 비난, 비방하며 소규모 국지전만을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국지전이라 해도 인근 도시의 삶은 피폐해졌고, 그 과정에서 침식자가 급증했습니다.”

“알 만하군.”

이게 내가 어지간해서는 대규모 전쟁이나 운석 충돌 같은 강경수를 두지 않으려 하는 이유였다.

우리 왕공 귀족은 삶이 괴롭다는 이유로 침식을 택한 사람들을 용납해줄 수 없지만, 동시에 삶이 괴롭지 않게 해줄 책임도 있다.

“하급 침식자의 증가가 확률적으로 고위급 침식자의 증가를 불렀고, 대륙 곳곳에서 침식자들이 모여들며, 자연스럽게 대형 침식 교단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럼 그게-.”

“예. 지난 알첸베르사 수도원에서 성물을 탈환하려 했던 무리이자, 중부 그린스킨 호드에 옛것의 힘을 준 무리이며, 도로이센의 검왕 엔시스를 침식의 길로 이끈 무리입니다.”

그린스킨 호드를 함께 물리쳤던 텐티아 경이 눈살을 찌푸렸고, 세레라지에 역시 혀를 찼다.

사제가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후원자 명단과 척살 완료 명단입니다.”

한눈에 봐도 길이가 1m는 넘어 보였다.

“놈들의 조직체계는 파악 중이나, 평신도, 사제, 주교, 대주교 등으로 이뤄진 체계가 있는 듯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냉랭해졌다.

“도로이센 안에 있던 최고위 침식자는 도로이센의 궁정 귀족이었고, 주교급이었습니다. 생포를 목적으로 움직였으나, 반항이 심해 척살했고, 이 과정에서 성기사 25명과 전투 사제 13명, 정화병 67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떨리는 듯하기도 했다.

“도로이센 안에 대주교급은 없었습니다.”

나는 회귀 전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가 어떤 식으로 망명을 거듭했는지 떠올렸다.

“거대한 비밀 조직을 약소국에서 유지하는 건 힘들지.”

약소국에는 물류, 인력, 자원 모두 한계가 있었다.

자한 동맹이 끝내 세상을 정복하지 못할 이유기도 했다.

거대한 비밀 조직은 그 조직과 비슷한 급의 나라에 있어야 했다.

“랑소와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군. 파벌 싸움, 당파 싸움이 심한 나라인 만큼 정치권에 달라붙어 살아남기도 쉬울 테고. 거점으로서 완벽한 장소야.”

나는 드디어, 하고 중얼거리며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교회의 헌신에 황실의 일원으로서 깊은 감사를 표한다.”

사제가 망령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게 맡겨라. 내분의 끝을 보여주지.”

헬레나가 들뜬 표정을 지었다.

“모의전을 해두길 잘했어. 이렇게 빨리 실전이 될 줄은 몰랐네. 발렌시아누스. 고맙다.”

사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며 서류만 하나둘 내놓았다.

* * *

모의전은 성황리에 끝났고, 헬레나는 장교들과 모의전을 복기하는 동시에 실전을 준비했다.

나는 마커스의 조수들에게 기계 갑옷의 정비를 맡기고, 그 길로 황궁으로 향했다.

“발렌시아누스의 이름으로 알현을 청한다. 긴급 사안이다.”

황형이자 백작급 대영주의 권세에, 아침부터 줄 서서 알현을 기다리던 대소신료 만조백관이 좌우로 갈라섰다.

“폐하.”

“그대? 모의전은 잘 치렀는가? 마침 잘 왔도다.”

제이릴리스가 막 서류 더미 사이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여유 넘치던 나른한 눈빛에 피로로 인한 나른함이 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일할 생각이었노라. 저녁 같이 들고 산책이나 하겠는가?”

나는 죄를 짓는 기분으로 보고를 올렸다.

도로이센의 주교, 랑소와와 도로이센의 적대적 공존, 그로 인해 늘어났던 침식자, 교단의 존재 확인, 랑소와에 있을 대주교까지.

“하여, 공작이 시급하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제이릴리스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흐음.”

어느새 그 황금빛 눈동자에 피로는 온데간데없고, 정점에 달한 초인의 예리함만이 남아있었다.

“저녁 같이 들고, 산책이나 가자꾸나.”

“예, 예? 어디로-.”

“운석을 떨어트리려면 좌표를 한 번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 짐이 이참에 그 공화주의자란 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노라. 그토록 부르짖던 평등을 누릴 수 있으니 내심 좋아할 것이야.”

그녀의 붉은 입술이 가학적으로 말려 올라가고, 오만한 목소리는 거대한 석조 돔에 들어온 듯 서늘하면서도 웅장하게 울렸으며, 어느새 검은 드레스 자락이 말려 올라가 용종의 날개 형태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고정하시옵소서!”

나는 그녀의 발목을 잡고 매달릴 기세로 머리를 조아렸고, 제이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단번에 끝낼 수 있는 일에 왜 시간과 돈을 쓰려고 하느냐? 싸워 이길 수 있는 자들과 타협하지 말아라.”

“그들 중에는 무고한 신민도 많사옵니다.”

“그대가 할 말은 아니로다. 짐의 망나니여.”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소신을…… 특사로 보내 주신다면 정치 공작을 통해 1년 안에 랑소와 공화국과 침식자 세력을 분리해놓겠사옵니다.”

“짐이 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1달 안에 침식자 세력에게 악몽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야.”

“무고한 신민까지도 침식자로 만드실 가능성이 있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낭랑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깨진 보석처럼 섬뜩하고 아름다웠다.

“운석 충돌쯤 되면 문제없나니. 침식자가 될 수 있을 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야. 이걸 보아라. 짐이 최근에 개발한 마법이니라. 운석 충돌 직후 역장으로 된 거대한 돔을 만들어 충격파를 가두는 것이지. 그 안에서 열기와 압력이 물결치며 모든 걸 갈아버릴 테야.”

아이고 맙소사.

나는 문 앞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는 관료들에게 필사적으로 눈짓했다.

하지만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 앞에서 ‘아니요’라고 말할 기개를 가진 사람은 대륙에 나 한 명뿐이었다.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폐하! 그럼 제게 군을 맡겨 주소서. 소신이 랑소와를 침공하겠사옵니다.”

“아니, 왜 그대가 전쟁하는 건 되고 짐이 친정하는 건 안 되는가?”

“폐하는 폐하이시잖습니까? 지배하지 말고 군림하시옵소서.”

“운석 한 방이면 깔끔하게 정리될 일을-.”

“정리 안 되옵니다!”

그때 누군가 집무실에 뛰어 들어왔다.

나는 신성 황제와 망나니 대공이 목소리로 높이고 있는 판에 들어온 용자에게 내심 감사를 표하며 뒤돌았다.

“마침 잘 왔…… 시그나인 공작?”

단정하게 묶은 연갈색 머리와 하늘색 눈동자, 완고한 매 같은 인상 뒤로 숨겨진 영악한 웃음.

서부의 패자가 된 그녀가 다급하게 울부짖었다.

“랑소와 공화국군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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