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55)화 (255/340)

(255)

시그나인 엘제누스 프로이하이트.

전대 프로이하이트 후작, 시그마인의 셋째 딸.

충성 맹세 당시의 혼란기에 옆 후작가의 봉신 백작 몇 명을 집어삼켰고, 수도 이물 사태 당시 내게 군사적 협조를 해준 대가로 인스트루멘툼 일부까지 할양받았으며, 그 권세를 인정받아 공작으로 승격된 대귀족.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서부의 신성, 시그나인이었다.

그녀는 보는 각도에 따라 옅은 하늘색과 짙은 푸른색이 섞인 동공을 파르르 떨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평소 애용하던 부채 역시 덜덜 떨며 한겨울에 바람을 일으켰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아니, 시그나인 공작. 황궁에는 어쩐 일이지?”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물었다.

제이릴리스 역시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대귀족과 황실의 관계는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었다.

대귀족들은 하나하나가 수백 년 동안 해당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는 왕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원래 왕가였던 가문이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후, 백작, 후작으로 봉해진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타국 왕들과 달리 일단 겉으로나마 충성을 맹세한 만큼, 대놓고 경계하지 못했으니, 어떤 면에서는 타국보다도 긴장감이 어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와이번핏이었다.

‘그 멀리서 마차 타고 오기 힘들지? 와이번 타고 빨리 올라와.’

‘그럼 호위를 몇 명 못 데려가는데, 님이 나 목 잘라버리면 어떡함?’

‘그건 어쩔 수 없고. 히히.’

‘안 올라감. 수고.’

대귀족들이 빨리 올 수 있게 지었는데, 와이번 한 마리만 타고 오게 되니 호위가 적어졌다.

‘그럼 와이번핏 안에서 숙박 해결하게 해줄게. 황궁까지 안 들어와도 돼. 이상한 낌새 보이면 바로 도망쳐도 돼.’

‘그것도 불안하기는 한데…… 일단 믿어 보겠음.’

호위가 적어지면 안전이 보장 안 되니 수도에 안 오려고 하고, 와이번핏은 결국 중축을 거듭해 숙박 시설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렇듯 황실과 대귀족들의 관계는 치열한 눈치 싸움과 명분 싸움으로 얼룩진 피곤한 관계였다.

무슨 일이 터져도 그걸 빌미 삼아 다른 대영주나 황실이 개입해올까 두려워 알아서 해결하려다가 더 망하기도 했다.

대규모 마경이 터졌는데 원군을 거절하다가 가문이 망하는 등의 사태가 있을 수 있겠다.

하물며 프로이하이트는 유서 깊은 서부의 대가문이고, 한참 세력을 확장 중이며, 그 가주인 시그나인은 아직 스물 초반인 젊은이다.

빈틈없는 모습으로 외부의 적들을 경계하고, 강한 모습으로 내부의 아군을 결집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 이미지가 박살 날 걸 각오하고 황실에 손을 벌리려 왔다는 건,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제이릴리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 * *

“폐하. 랑소와 군이 미친 듯 진격해오고 있습니다.”

“공작. 랑소와가 약소국은 아니지만, 프로이하이트 가문에게 큰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제국은 오거, 엘프, 드워프, 수인 등 온갖 강력한 이종족의 피를 받아드렸고, 그들이 그대로 귀족 계급이 되었다.

“짐도 랑소와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나, 그들은 침공보다 방어에 능하고 소드 엑스퍼트와 전투 마법사의 수가 적다고 하지.”

소드 엑스퍼트는 혼자서 천 명의 병졸을 상대하고, 전투 마법사는 마법 한 번에 백 명을 구워버린다.

전쟁이 점점 기사 몇 명의 무대가 되어가는 게 시대의 흐름이었다.

“그대는 창천 기사단의 레이디이자, 수 개의 마법 학파를 후원하며 전투 마법사들을 키워내는 프로이하이트의 가주가 아닌가? 황실에까지 손을 벌릴 상황은 아닌 듯한데?”

시그나인이 울상을 지었다.

분명 나와 제이릴리스보다 두세 살 많은 나이였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실은…… 제가 보유한 병력 대부분이 새 점령지를 안정시키는 데 들어가 있어요. 옆 후작에게 빼앗은 백작령만 네 개고, 거기에 인스트루멘툼 남부까지 더해지니까, 일시적으로 병력 공백이 너무 심해요.”

나는 목덜미를 잡았다.

반사적으로 반말이 튀어나왔다.

“왜 점점 말할 때마다 백작령이 늘어나는 거 같지? 아니. 백작령을 그럼 거의 다섯 개나 먹은 거야? 내가 내전 일어나면 영지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했지?”

“내, 내전은 안 일어났잖아요. 침공이 터져서 그렇지. 게다가 공작 작위에 걸맞은 영토를 가지라고 한 건 대공 전하라고요.”

제이릴리스가 나를 토막 내버릴 듯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슬쩍 눈을 피했고, 시그나인은 침통하니 말을 이었다.

“제 병력이 대부분 동부, 북부로 가 있는데, 랑소와는 저희 프로이하이트의 남서부에 있어요.”

“완전 반대쪽이네. 동맹은 없어?”

“주변 영주들이랑 같이 막기도 애매한 게, 그쪽이 딱 남서부랑 서부의 경계선이라서 주변 영주들끼리도 데면데면해요. 인종부터가 달라져 버리는 느낌이라서.”

그럼 집단으로 군을 운용하기가 힘들다.

나는 제이릴리스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소신이 군을 이끌고 감히 제국의 영토를 범한 간악무도한 자들을 물리치겠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짐이 본토에 운석을 떨어트리면 알아서 물러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시그나인의 말을 들은 직후, 나는 몇 가지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폐하. 이번 침공 역시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 일으킨 게 분명하옵니다.”

“으음?”

“이유 없는 전쟁이 어디 있겠나이까?”

침식자에게 제일 중요한 일은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침식에 투신하게 하는 거다.

하지만 도로이센 왕 필리오스는 이제 쓸데없는 국지전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랑소와 주변 약소국들은 대부분 같은 공화국이다.

랑소와 침식자 놈들이 나라를 움직여 침공할 곳은 제국뿐이다.

“침식자들은 도로이센 교구가 부서진 만큼 어디선가 인력과 자원을 충당하려 하겠지요. 그럼 침공을 결정한 자들과 장군들의 정체도 명백해지옵니다.”

즉.

“죄다 포로로 잡아 고문하면 조직을 통째로 털어먹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일순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라면……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구나.”

“저 역시 언제나 단칼에 모든 걸 해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폐하는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라 재건하시는 분이며,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분이옵니다. 부디 더 어렵지만, 더 고귀한 길을 가소서.”

나는 애원하듯 말했고, 제이릴리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눈빛에서 예리한 기운이 사라지고, 다시 오만하고 나른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럼, 하고 운을 떼며 그녀가 말했다.

“피곤한 인세는 이번에도 그대에게 맡기고, 짐은 여기저기 마경이나 닫고 다니겠노라. 믿고 있어도 되겠는가?”

나는 못 들을 말을 들은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루디, 텐티아 경, 세레라지에, 마커스까지.

늘 보던 얼굴들이 별궁에 모였다.

“발렌 님. 그럼 남서부 전선으로 가시는 거예요?”

루디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됐어. 엄연히 말하자면 아직 전선은 아니지. 전선이 아니게 하려고 내가 가는 거기도 하고.”

나는 천장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알 굵은 청포도를 씹었다.

그렇게 맛있던 포도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

만약 내가 적당히 잘 끝내는 데 실패한다면, 제이릴리스는 운석을 떨어트릴 거다.

그럼 랑소와는 랑소와였던 무언가가 될 거고, 운석 먼지는 태양을 가려서 일대 농사를 죄다 망칠 거고, 폭증한 유랑민은 죄다 침식 교단에 투신할 거고, 그럼 제이릴리스는 운석을 한 번 더 날릴 거다.

그리고 난 결국 그녀 곁에서 그 모든 일을 돕게 될 거고, 우리 쌍둥이는 다시 세계 인구 감소에 크게 공헌하게 되겠지.

내가 끔찍한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자니, 마주 앉은 텐티아 경이 입을 열었다.

“전선이 아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만.”

“그랬지.”

“도로이센 때처럼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국지적인 교전이나 도발로 끝내 볼까 해. 그쪽 장군들을 만나서 침식자 세력이 랑소와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만약에 회생 불가능 수준이면 그냥 폐하 말씀대로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텐티아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눈동자에 피처럼 진득한 결의가 어렸다.

“전하께서 실패하신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헬레나도 준비 중이야. 걔가 걔대로 움직이겠지. 랑소와를 완전히 정복해서 자기 영지로 만들어버릴 꿈을 꾸고 있더라고.”

못할 사람이 아니라서 더 무섭다.

“멋진 꿈이군요.”

“꿈일 때 멋질 거야.”

루디가 그럼, 하고 운을 뗐다.

“하루아침에 끝날 일은 아닐 거 같은데, 전쟁터 따라다니는 주보 상인들을 섭외해 둘까요?”

“보급은 시그나인이 맡아주기로 했어. 그리고 우리 말이나 와이번을 타고 가지는 않을 거야.”

그쪽에서 나와 대화하려 들 만큼의 무력은 갖추고 가야 했다.

일단 내 사병들은 죄다 동원할 생각이다.

짐마차는 오래 걸리고, 와이번은 군대가 이동하는 데에는 썩 매력적인 수단이 아니다.

텐티아 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뭘 이용하실 겁니까? 배? 제가 알기로 그쪽까지는 직통 운하가 없습니다.”

“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도 배는 배지.”

나는 한때 세계 최고의 협상가라 불렸다.

그리고 최고의 협상가는 협상하지 않는다.

“마커스. 니벨룽겐 띄울 수 있지?”

* * *

니벨룽겐.

바우스프릿을 제외하고도 길이가 150m에 달하는 대형 비공정.

어느 전함이 모두 그렇듯, 엘프가 살던 숲에서만 자라는 거대수로 만들어졌고, 마커스의 천재성으로 버려낸 마도공학의 산물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속도는 와이번보다 약간 느리지만 지치지 않고, 한번 날면 사실상 반영구적으로 날 수 있으며, 최대 1천 명의 병력을 태울 수 있었다.

여덟 개의 반중력장으로 선체를 가볍게 한 다음, 네 개의 프로펠러로 날아오르는 방식이었고, 자기력을 이용한 복잡한 기계장치를 통해 중심을 잡았다.

“이 녀석을 다시 정비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커스가 오만 가지 감정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후작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직접 허리에 공구 벨트를 차고 현장에 나섰다.

밧줄을 타고 프로펠러 접합부를 확인하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총합 백여 명에 달하는 조수 마법사들이 그를 따라 곳곳의 설비와 장비를 점검했다.

기계 기사와 마총 부대의 지휘권이 내게 넘어온 지금도, 그는 여전히 수많은 제자와 조수를 이끌었다.

나는 선체 위로 올라가 슬쩍 물었다.

“과거가 그리운가?”

그 역시 이 비공정을 타고 서부 일대를 정복하려 했던 시절이 있었다.

마커스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눈이 먼저, 의안이 한 박자 늦게 떨렸다.

그는 조이던 나사를 마저 조이고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잊었다면 거짓말이지요. 하지만 전 마도 공학자입니다.”

“…….”

“부를 쌓아야 연구를 할 수 있었고, 부를 쌓을 제일 빠른 방법이 약탈이었으니 약탈하고 다녔지만, 그걸 즐기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랬군.”

“이제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으니, 제가 부를 위해 싸울 필요는 없겠지요.”

철혈당주, 서부에서 제일 위험한 대영주라 불리던 마도공학자의 말이었다.

마커스가 외안 안경을 쓰며 말했다.

“그쪽에 큰 나사 좀 주시겠습니까? 최근에 녹이 안 스는 소재로 바꿨습니다.”

“이거 말인가?”

“예.”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마커스가 달라는 대로 나사와 공구를 건네주었다.

얼굴에 검은 기름과 먼지를 묻힌 그의 모습은, 궁정에서 호의호식할 때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옳았다는 확신을 가졌다.

타협할 수 있는 자와는 공존할 수 있었다.

정비는 총 5일이 걸렸다.

각종 정비용 장비와 기계 갑옷의 보조 부품, 마총 탄환 등을 격납고에 채우는 데에 2일이 걸렸다.

나와 세레라지에는 종합공방에서 다리를 떨며 마커스를 독촉했다.

“이제 날 수 있는 건가?”

“언제 출발하는 거니? 내일 가게 될 줄 알고 연구 쉬었는데, 계속 쉬고 있잖니.”

“아니. 누나는 좀 쉬어.”

“내가 쉬면 제자들도 쉬잖니.”

“좀 쉬게 해 줘!”

마커스가 씩 웃으며 니벨룽겐 정비소에서 석조 건물 홀로 들어왔다.

“이제 마나 엔진에 마나만 불어넣으면 됩니다.”

나와 세레라지에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넣어야 하는가?”

“여기 대마법사급이 둘이나 있잖니. 바로 준비하자꾸나.”

마커스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넣을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지금 조수들 시켜서 마나 수정을 사들이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마나를 불어 넣어 보관하고 또 사고팔 수 있는 맑은 수정은 아주 아주 비싼데다가, 소모품이었다.

“마커스. 지금 뭐라고 했나?”

“유지비용이 대부분 여기서 나옵니다. 아마 이 정도 청구되실 듯합니다.”

“!”

나는 텐티아 경을 시켜 밖으로 나간 조수들을 죄다 잡아들였다.

그리고 세레라지에와 함께 그 엔진인지 뭔지 하는 쇳덩어리에 미친 듯 마나를 불어 넣었다.

“전하.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

우우우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