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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하이트 남부는 제국 서부와 남서부를 가르는 경계기도 했다.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바위산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흙색이 흑갈색에서 황토색으로 변하고, 털 달린 것들보다 비늘 달린 것들이 커지기 시작하며, 색채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들이 밤낮으로 울부짖는다.
기후가 충돌하는 곳인 만큼 날씨 역시 변덕스러웠지만, 그만큼 수량은 풍부했다.
지대가 낮아지며 병충해가 약간 늘었지만 그만큼 평야도 넓어졌다.
저 높다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갔지만, 모래 먼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변덕스러우면서도 아름답고 치열한 세상에 이물질이 섞여들었다.
쿠구구구!
사람들은 하늘을 가르는 배의 그림자를 보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저게 뭐예요.”
“세상에.”
“종말이 찾아왔다!”
마을 노인이 사막에는 신기루라는 게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다독였다.
“거, 다들 쓸데없는 소리 말게. 예전에 사막에서 행상인 노릇 할 때 비슷한 걸 여러 번 봤으니. 저 멀리 바다에 있는 게 하늘에 비쳐 보이는 거야.”
노인은 마을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배보다 세금을 독촉하는 마름과 서쪽에서 오고 있다는 랑소와 공화국의 군대가 더욱 두려웠기에, 비공정을 빠르게 잊어버리고 다시 괭이를 잡았다.
그러나 정말로 신기루를 본 적 있던 노인은 알고 있었다.
그 굉음과 생생함, 천 마리 날짐승의 날갯짓처럼 요동치는 소리, 이 아래까지 밀려온 바람, 은은하게 빛나는 자주색 역장은 결코 신기루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지. 원.”
노인은 불안감에 찬 눈으로 남쪽을 바라보았다.
비슷한 눈빛을 한 건 노인뿐만은 아니었다.
랑소와 공화국의 정찰대원들은 들고 있던 망원경을 떨어트릴 정도로 경악했다.
“대체 저게 뭡니까?”
“제국의 마법사들은 배도 마법으로 옮길 수 있는 겁니까?”
“하늘을 날다니……. 하늘은 오로지 천상의 존재들께만 허락된 공간이 아닙니까?”
“하루빨리 장군님과 의원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마법은 부정한 힘이나, 저런 힘을 가진 마법사와 정면으로 싸웠다가는 우리 공화국의 군대가 궤멸당하고 말 겁니다.”
“부정한 힘이라고 해서 떠오른 말인데, 저들의 등장이 이 근처에 열렸다는 마경과 연관이 있지 않겠습니까?”
“흥. 마경을 핑계 삼아 군대를 보내서 우리 공화국의 전진을 방해할 속셈에 불과하지.”
“……아무튼 어서 돌아가 보고하도록 하세. 다리가 다 떨리는군.”
* * *
나는 적당히 평평한 산 중턱에 니벨룽겐을 착륙시켰다.
세레라지에는 제자 마법사들을 시켜 빨간 연기를 피워 올렸고, 이틀 뒤 시그나인의 보급부대가 도착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보급대를 이끄는 건 창천 기사단의 기사였는데, 그는 수십 대의 짐수레 행렬을 이끌고 왔다.
사방에 깔렸을 랑소와 공화국 정찰대를 피해 가며 이틀 만에 온 걸 보면, 여러모로 대단한 실력자인 듯했다.
“포션, 시약, 비스킷, 밀가루, 염장 고기, 이동식 집수(集水) 마도구…… 있어야 할 건 다 있군.”
“그리고 이쪽이 공작께서 보내는 감사의 표시이십니다.”
나는 대공이고, 시그나인은 공작이다.
둘 다 같은 전하지만 내가 조금 더 높았다.
그러니 자기 주군에 대해 전하 호칭을 쓰지 않으면서도, ‘께서’를 통해 격을 지킨 건 매우 영리하고 뛰어난 화법이었다.
“시그나인이 좋은 기사를 두었군.”
나는 흡족하니 웃으며 궤짝을 열어 보았다.
한눈에 봐도 마나 수용성이 높은 은 철사 묶음, 정확히 백 닢씩 들어간 금화 주머니, 최고급 시약이자 사치품인 보석류, 각종 방어용 마도구…….
기사 수십과 마총 부대를 끌고 오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특히 마도구 쪽은 보아하니 모두 상아탑에서 주문 제작한 최고급인 듯했다.
피뢰의 반지랑 화염 내성의 반지도 있는 듯하던데, 마침 줄 사람이 있었다.
나는 루디를 흘깃 바라본 다음, 마지막 궤짝을 가리켰다.
“이게 그것인가?”
“예. 전하.”
이것을 안 줬으면 병력을 조금 덜 이끌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커스의 조수들을 시켜 그 궤짝을 빈 선실에 넣고 문을 단단히 잠근 뒤, 세레라지에에게 부탁해 자물쇠에 전격 마법 함정까지 걸었다.
“발렌 님. 저게 뭐예요?”
루디가 와서 물었고, 나는 목소리를 착 낮추며 답했다.
“용 뼈. 남은 거 몇 조각 달라고 했어.”
루디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고, 나는 잽싸게 주머니에서 아까 챙긴 반지 몇 개를 꺼내 끼워 주었다.
금색 링에 붉은 보석이 붙은 게 하나, 검은 링에 파란 보석이 붙은 게 하나였다.
루디가 반지에서 느껴지는 마나를 파악하려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떴고,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제 손에 마도구 반지가 여섯 개네요. 거의 금을 제 몸무게만큼 달고 다니는 듯해요.”
“그렇지? 원래 있던 게 은마력, 역장, 생조 전림 방식의 신체 강화, 바람 축복 방식의 신체 강화.”
“붉은 보석이 화염 내성이죠? 검은 링은 뭐예요?”
“피뢰의 반지. 전기 공격을 받았을 때 전기가 몸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피부만 타고 흘러가게 해 줘.”
루디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상냥하게 웃었다.
“잘 쓰겠습니다. 발렌 님.”
“그래. 이제야 내가 원하던 말을 해주는구나.”
그때 세레라지에가 내 옆으로 다가와 북쪽을 가리켰다.
이렇게 빨리 자물쇠에 주문을 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벌써 용 뼈를 넣어놨어?”
“내가 누구니. 그 정도는 지팡이 한 번 휘두르면 된단다. 그보다 저쪽 좀 보렴.”
나는 피부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한 이계의 마나를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오는 길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히 마경이네. 시그나인도 고생이다. 적국과 이계가 동시에 침략해오다니.”
“아주 신비한 존재는 아닌 듯하잖니. 이물보다는 마수에 가까운 놈들이겠지만, 그만큼 물리적인 파괴력은 더 강할 거란다.”
“정찰대 몇 명을 보내 놔야겠네. 오가는 길에 공화국 놈들이랑 부딪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할 거고.”
“그건 알아서 하려무나.”
세레라지에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기 선실로 돌아갔다.
오랜 비행으로 적잖이 피곤한 기색이었기에, 난 그녀를 붙들지 않았다.
그녀의 빈자리는 곧바로 텐티아 경이 메웠다.
그녀는 육중한 기계 갑옷 차림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전하.”
“경. 표정이 어둡군.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는가? 편하게 말해 보게.”
“그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
“실은…… 지금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드리는 게 맞는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심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기계 갑옷을 입는 건 주군 앞에서 말을 타고 있는 것과는 다른 듯하네. 편하게 서 있게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번째는?”
“왜 정찰대를 보내지 않으시고, 봉화까지 피우셨습니까? 창천 기사는 앞으로 국경을 넘어올 병력이 총 10만도 넘는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그들 모두가 저희가 어디 있는지 알 겁니다.”
10만이면 카리오사가 데려왔던 대군 이상이었다.
물론 철저한 정예만 골라왔던 카리오사와 랑소와 공화국의 잡병들이 비교될 수는 없겠지만, 10만이라는 숫자에는 숫자만 가진 질이 있었다.
아무리 내가 강해졌다고 해도, 10만 대군이 몰려오면 결국 마나가 떨어져 갈려 나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내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준 건.
“그래. 오라고 알려준 걸세. 마침 저기 오는군.”
썩기도 쉽지만 그만큼 자정하기도 쉬운, 다양한 의견과 세력이 용납되는, 공화국이란 체제의 특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텐티아 경이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마병들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백기?”
그들은 삼색의 국기와 백기를 모두 들고 있었다.
나는 여유만만하게 읊조렸다.
“자. 손님맞이 준비를 하도록 하지.”
* * *
난 정체 모를 전령을 기선 제압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마커스를 시켜 일부러 니벨룽겐을 띄웠다 재착륙시키기도 했고, 텐티아 경과 기계 기사들을 시켜 숙영지 주변에 구보를 뛰게 하기도 했고, 마총 사수 대대장에게 명령해 발맞춘 걸음걸이와 신무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한숨 자고 나온 세레라지에와 텐티아 경, 마총 매고 단검 찬 루디와 의족, 의수, 의안을 모두 티 나게 드러낸 마커스를 모두 천막에 밀어 넣은 뒤, 내 뒤로 병풍처럼 둘러앉혔다.
“발렌 전하. 너무 작위적이신 것 아닙니까?”
“동생아. 이거 좀 추하잖니?”
“발렌 님. 의전이 아니라 협박으로 보일 듯해요.”
“발렌 대공 전하. 기술력 유출이 걱정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모든 반발을 묵살했고, 막사 천장에 매단 발광 주문 새겨진 수정구의 밝기를 조절했다.
원래 약간 어두워야 분위기가 사는 법이다.
“다들 입은 다물고 있게. 상대는 10만 대군을 대표해 왔다고. 우리는 그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는 듯 굴어야 해.”
나는 제복 깃을 더더욱 까다롭게 가다듬었고, 평소 달지 않던 무거운 금장 장식까지 달았으며, 머리를 30분 동안 네 번 바꿔 정리했다.
벌벌 떨며 돌아가게 해주마.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서늘하게 명령했다.
“들라 하라.”
그리고 천막 문을 젖히며 들어온 인영은 그런 내 다짐을 단숨에 산산조각 냈다.
“솔레타라스 제국의 발렌시아누스 대공에게 랑소와 공화국의 에릭 얀 베네틱트 의원이 인사드립니다.”
시간은 초저녁이었고, 이 천막의 출입구는 서쪽을 향하고 있었기에 붉은 노을이 그를 배경 삼아 보였다.
그는 의원이라는 작자들답지 않게 생머리 금발을 내려 이마를 약간 가리고 있었는데, 노을빛을 받아 붉게 달아오른 게 꼭 나라와 국민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의미하는 듯했다.
이에 대비되듯 역광이 진 푸른 눈동자는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듯 서늘했고, 동시에 그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듯 맑았다.
선량한 인상과 수려한 용모, 깔끔한 피부는 공화국의 의원이 아니라 어느 왕국의 젊은 왕자를 떠올리게 했다.
비틀어버리고 싶을 만큼 얇은 목선을 따라 눈을 내리면, 중후한 금배지가 눈에 들어왔다.
악명 높은 발렌시아누스 대공의 숙영지에 들어오는데도, 그는 정장과 코트 차림이었다.
그는 검으로 싸우러 온 게 아니라는 의사를 이미 내게 전달했다.
“의원. 베네틱트 가문은 어떤 귀족 가문이지? 처음 듣는 이름이라서 말이오.”
기선 제압을 위해 묻기는 했지만, 나는 에릭 얀을 이미 알고 있었다.
회귀 전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망국의 왕자도 아니고 망국의 의원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는 구 공화국 일대의 수많은 생존자를 반역 황자 유스티아누스 밑에 모이게 한 상징이었다.
진심으로 국민을 아끼던 정치인이었으며, 내게 신민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듣기 부끄러워질 정도로 낭랑하고 의연하게 답했다.
“전하께서는 조금 당혹스러울 수 있으나, 저희 공화국에는 귀족 계급이 없습니다. 베네틱트 가문은 그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나는 성자 앞에 선 마귀가 된 기분으로 그를 압박했다.
“귀족도 아닌 자가 통치하다니…… 세상에 그런 막돼먹은 나라도 있군. 그래. 이곳에는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지?”
에릭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화국 총사령관 브노아 장군을 말려 주십시오.”
“!”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텐티아 경과 세레라지에가 미간을 찌푸렸고, 마커스가 흥미롭다는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기를 바랐다.
“공화국은 전쟁을 바라는 게 아니었나?”
에릭이 단호하게 답했다.
“공화국은 결코 기회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팽창 정책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브노아 장군과 의회 강경파의 행보는 너무나도 이상합니다.”
이 정도로 진솔하게 나와 줄 줄은 몰랐다.
“지지율을 위해 도로이센과 수백 년 동안 가짜 전쟁을 벌여 가며 애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것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도로이센을 상대로 한 미친 짓이 끝나니 제국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에게는 세베릭과는 다른 형태의 숭고함이 있었다.
“…….”
“인정하기는 싫지만, 솔레타라스는 랑소와와 비교할 수도 없는 강대국입니다. 저는 공화주의자지만, 현실 역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국과의 전쟁은 공화국의 멸망을 가져올 뿐입니다.”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었고.
“…….”
“다른 정치인이 개인의 지지율을 위해서, 또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서, 국가를 멸망으로 몰아가는 걸 눈 뜨고 보지는 못하겠습니다. 아직은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부디 회군을 용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있었다.
“말려, 달라고 한다면?”
에릭이 내게 머리를 숙였다.
아주아주 깊고, 정중하게.
“……명성 높은 대공께서 저희 숙영지로 와 브노아 장군에게 현실을 알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저 ‘명성 높은’을 해석해 보면 ‘악명 높은’ 이다.
현실을 알려 달라는 건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는 말이다.
한마디로 그는, 내가 브노아라는 장군을 적당히 협박해서, 겁먹은 그가 본국으로 회군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
협박과는 별개로, 세레라지에와 함께 그를 만나면 침식의 기운을 느껴서 공화국 군부에 침식자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볼 수도 있겠지.
날 끌어들이려는 함정이라기에는 어설프고, 진짜로 평화를 바란다고 보기에는 어색했으며, 외면하기에는 매혹적이었고, 받아드리기에는 불안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