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57)화 (257/340)

(257)

“이쪽입니다. 의원님. 식사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마총 사수가 에릭과 수행원들을 대형 천막으로 안내했다.

“고맙소.”

에릭은 수행원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촛불이 아니라 발광하는 구슬이 켜져 있었고, 천막 벽은 가죽이 아니라 특별하게 처리한 수지를 먹인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수행원 하나가 천을 만져본 다음 놀랍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이런 것 하나하나에서도 국력의 차이가 느껴지는군요. 과연 마도 제국입니다.”

에릭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수행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의원님. 말씀은 잘 나누고 오셨습니까?”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전 걱정됩니다. 혹시 그가 의원님을 인질로 삼으려 들지는 않을까요?”

“의원님. 전쟁을 막으시겠다는 마음은 아시겠지만, 적국의 황족을 움직여 공화국의 장군을 협박하신다는 건 자칫하면 반역으로-.”

“그만들 하게나. 너무 피곤하군.”

에릭은 한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제야 수행원들은 에릭의 상태를 파악했다.

사내도 반할 만큼 수려한 얼굴은 피로에 젖어 핼쑥했고, 하얀 셔츠는 땀범벅이었다.

“아, 아.”

“죄송합니다! 의원님.”

수행원들은 부랴부랴 새 옷을 꺼내고 병사에게 일러 물과 수건을 준비해 달라 부탁했다.

에릭은 그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침상에 걸터앉아 발렌시아누스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어떤 사람이었냐고?’

에릭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꽤 활발하게 외부 활동을 벌여온 의원이었다.

복마전 같은 랑소와의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거물들도 만나 보았고, 검 한 자루로 수백의 병사를 베어 넘기는 도로이센의 검호들도 만나 보았다.

그런 그는 망나니 대공을 보며 검왕이라 불렸던 사내를 떠올렸다.

엔시스 폰 도로이센.

260년을 살아온 소드 마스터.

에릭은 자신이 스물도 안 된 소년에게서 홀로 나라를 구한 초인의 분위기를 느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지만, 여전히 손과 눈꺼풀은 덜덜 떨렸다.

깔끔하게 넘긴 백발은 망나니라는 악명을 낳았을 유쾌한 광기를 연상시켰고, 황금빛 눈동자는 누대에 거쳐 내려온 용혈의 권능을 각인시켰으며, 핼쑥한 뺨과 넓은 어깨는 그가 숫자 하나와 손짓 하나로 수십만의 목숨을 좌지우지해온 사내라는 걸 말해주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에릭은 용모와 복식을 보고 상대를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하얗고 빳빳한 제복에 달린 수많은 황금 장식과 붉고 흰 띠는, 그가 신성 황제라 불리는 그의 쌍둥이 누이동생으로부터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 말해주었다.

게다가 그의 뒤로 앉아있던 사람들은 어떠한가?

파랑과 황금의 금은 요동을 가진 마법사는 수백 년을 살아온 마녀처럼 고고했고, 붉은 무늬 들어간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는 랑소와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적기사가 분명했다.

강철로 된 팔다리와 눈을 가진 사내는 분명 지난 몇 년간 도로이센 국경지대를 약탈해온 철혈당주, 마커스였다.

에릭이 그 강자들 사이에서 제일 경계한 건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시녀였다.

그 상냥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안광이 빛날 때마다, 에릭은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비밀이 들통난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특별한 사람이었어.’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그 넷을 거느릴 만한 사람이었다.

완전히 압도당해서, 본래 짜 놓았던 협상 계획은 입에 담지도 못했다.

그저 꼴사납게 벌벌 떨며 모든 치부를 내보였고, 도와 달라 읍소하고야, 아니. 구걸하고야 말았다.

에릭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말로 표현하기를 포기했다.

‘그래. 특별한 사람이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신념조차 금이 가게 할 정도의 경험이었다.

* * *

밤은 깊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연거푸 찬물을 들이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빌어먹을.”

나는 착한 사람, 제 나라 구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 용기 내는 사람을 미워하고 거북해했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그 혈기와 용기로 일을 더 망쳐 놓고, 좋은 의도였다는 말로 넘어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을 거북해하고 있다는 자체가, 그들에게 어떠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시그나인이 보내온 장교 기사를 천막에 불러들였다.

“시그나인 공작은 에릭 의원의 제안을 어떻게 대할 듯한가?”

기사는 제 주군을 대신해 가문의 깃발을 들고 온 베너렛(banneret) 나이트였고, 침착하게 답했다.

“지금 가문에 남서쪽으로까지 영토를 넓힐 여유는 없습니다. 프로이하이트는 전쟁보다 평화를 사랑하니, 싸움 없이 일이 마무리된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음.”

“하지만 적이 돌아올 상황을 만들기도 부담스럽습니다. 전쟁을 벌인다면 큰 피해를 주어야 할 테고,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침략만 어찌어찌 마무리된다고 다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회귀 전에도 공화국이란 놈들은 조약을 맺기가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정권이 바뀌면 그 전 통령이 맺었던 조약을 갈아엎자고 나오니, 그런 자들과 무슨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겠는가?

“텐티아 경. 헬레나 대공에게 전갈이 온 게 있는가?”

“예. 전하. 전서구로 주고받았습니다.”

텐티아가 품속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용맹한 글씨체였다.

[발렌시아누스에게 헬레나가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포용해야 할 봉신이 아니라, 우리가 정복하거나 도려내야 할 적이다.

공화주의자들은 제국의 암 덩어리나 다름없다.

적군이 많다고 하나 흩어져 있고, 아군은 한데 뭉쳐 있으며, 난전과 섬멸전, 원거리 기습과 암살에 모두 능하다.

쟁취할 수 있는 영광과 타협하는 건 겁쟁이의 자세다.

발렌시아누스,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과 무슨 조약을 맺고 무슨 협상을 하든, 적어도 확실한 타격을 입힌 다음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한데.”

참 헬레나 누나다운 말이었다.

내가 제이릴리스에게 간언할까 무서워 말을 아끼고 망설이는 기색이 글씨체에서 엿보였지만, 그 내용은 분명 제국 최고의 야전사령관다웠다.

랑소와 공화국은 제국의 봉신이 아니다.

동쪽 바다를 지키려면 카리오사가 필요했기에, 그녀가 황궁에 쳐들어왔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던 상황과는 달랐다.

랑소와는 제국과 황실을 대놓고 부정한 반역자들의 나라다.

제국은 언제나 반역자들을 강하게 진압했다.

솔레타라스의 용혈 황족들에게 충성은 억지로 받아내야 하는 게 아니라, 기꺼이 받아 주는 것이었다.

충성을 바칠 기회를 주는 일도 군주 된 자의 자비이자 권리였다.

“……텐티아 경.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텐티아 경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사에게는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루디 역시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세레라지에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자기를 보는 걸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말했다.

“발렌. 에릭 의원을 한 번이라도 도와주는 게 어떠니?”

언제나 토라진 고양이처럼 새침하던 세레라지에답지 않은 태도였다.

나는 신선한 기분으로 물었다.

“의원이라고 하면 누나가 썩 좋아할 인종은 아닌 거 같은데?”

의원의 힘은 사람들이 있다고 믿어서 생겼고, 마법사의 힘은 사람들이 믿든 말든 있었다.

에릭 의원은 마법사 세레라지에로서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일 터였다.

세레라지에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 말이 맞잖니.”

“고개를 저으면서 맞다, 고 하는 건 제국 대화법에 어긋나.”

“시비 좀 작작 걸려무나. 그래. 난 의원이 어쩌고 국민이 어쩌고 하는 건 관심 없단다.”

“그럼 왜?”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냐는 듯 눈썹을 치켜 세웠다.

“마법사였잖니. 고뇌하는 후배를 돕는 건 선배의 의무이자 권리란다.”

나는 못 들은 말을 들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에릭 의원이 마법사라고?”

* * *

새벽이었다.

텐티아 경과 마커스는 천막 밖으로 나갔고, 세레라지에와 나만 천막 안에 남았다.

나는 루디를 통해 에릭 의원을 몰래 불러들였다.

“대공 전하? 불렀습니까?”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피로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흰자위까지도 숭고한 보호본능을 자극했지만, 나는 제국 최고의 패악질꾼으로서 치솟아 오르는 동정심을 끊어냈다.

그 역시 정치인인지, 나와 ‘마법사’ 세레라지에만 남아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안 듯했다.

수려한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는 게 볼 만 했다.

나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다음, 턱을 쳐들며 그를 흘겨보았다.

“내가 랑소와 공화국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그곳에는 마법사들이 없다고 하던데?”

실제로 랑소와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회귀 전 나는 루디를 잃은 후 홍등가와 빈민가에서 환락에 미쳐 살았다.

헬레나가 날 끌어내고, 두들겨 패서 다시 사람 꼴로 만들어 주었을 때는, 이미 대륙 전체가 전화에 휩쓸린 뒤였다.

물론 에릭에게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로 들렸을 터였다.

그는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고는, 파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예. 랑소와 공화국은 만민 평등을 지향하고, 혈통으로 힘을 물려받는 이종족 혼혈을 싫어합니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부정한다는 말이 맞겠군요.”

만민 평등은 타고난 자질이 동등하다는 전제하에서만 설립되는 논리였다.

하지만 제국을 비롯한 대륙의 귀족들은 이종족과의 혼인과 혈마법으로 힘을 계승해온 자들이었다.

현실과 논리가 맞지 않을 때, 의외로 많은 사람이 현실을 논리에 맞추려 한다.

그러다 망한다.

“저희 베네틱트 가문의 선조 중에 제국에서 망명해온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끔 어떠한 수련도 하지 않았는데도 마법을 깨우치는 자들이 나오고는 하지요.”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에릭의 목소리가 점점 침울해졌다.

그때 세레라지에가 싱긋 웃었다.

“에릭. 고개를 들지 않겠니?”

생소할 정도로 활달한 목소리였다.

“어, 저…….”

“세레라지에. 세레라지에 선배라고 부르면 되잖니.”

“예?”

“너도 나처럼 특별한 사람이잖니?”

그 말을 들은 에릭의 눈빛이 폭풍 앞 갈대처럼 흔들렸다.

세레라지에는 누가 봐도 인세와 담을 쌓은 마법사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겪고 있을 내적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레라지에는 상큼하게 웃으며 제안했다.

용혈 황족 특유의 탐욕으로 이색의 눈을 빛내면서.

“우리도 전쟁을 즐기지는 않잖니. 마법사답게 뭐든지 두려워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꾸나. 브노아 장군에게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겠니?”

에릭은 정신 오염이라도 당한 듯한 상태로 공화국군 숙영지로 돌아갔다.

이틀 뒤, 브노아 장군이 나를 초청했다.

* * *

브노아 장군은 사자 같은 적갈색 머리에 기름을 발라 넘기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장군다운 인상의 사내였다.

그 역시 신실한 신도였기에, 광명신교의 원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사악한 전제군주정의 이인자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브노아요.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의 공용어는 어색했지만, 어조와 표정으로부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잘 전달되어왔다.

발렌시아누스는 대답하기 전에 공화국군의 숙영지 일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

이 숙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만 해도 8천은 되어 보였다.

곳곳에 정체 모를 금속 날개를 단 기둥이 창처럼 솟아 있었고, 광명신교의 성직자 비스무리한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척 많이 보였다.

광명신교는 국가 간 전쟁이나 영주 간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니 진짜 성직자일 리는 없겠지만,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병사들의 질은 대부분 썩 좋지 않았다.

팔다리에 근육도 거의 붙어있지 않았고, 루디보다 작은 사내도 많았다.

어려서부터 기른 정예가 아니라, 몇 달 훈련한 일반병이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소드 유저로 이뤄진 부대는 보이지 않았다.

정면에서 이기기는 힘들지 몰라도, 만약의 경우 도망칠 수는 있을 게 분명했다.

발렌시아누스는 미간을 한 번 찌푸려 보인 뒤, 마나를 끌어 올리며 답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라 불러라! 이 미천한 평민아!”

“뭣!”

브노아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고, 에릭이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용찬과 정령화를 거듭해온 초인의 기세는 마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범인들이 감당할 게 아니었다.

발렌시아누스가 눈을 부릅뜨고 폭언을 이어 나갔다.

“신성 황제께서는 본래 네놈들의 비루한 나라를 평지로 만들어버리려 하셨으나, 그분의 자비로 내가 여기까지 왔노라.”

“그분의 기사들은 네놈들의 밀밭을 쑥밭으로 만들 것이고, 네놈들의 마을을 불태울 것이고, 네놈들의 강을 메워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분의 대리인 앞에 머리를 조아리거라. 반역자들의 새끼 두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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