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랑소와 공화국의 병사들은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발렌시아누스에게 검과 창을 겨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망나니 대공에게서 물씬 흘러나온 마나의 기운이 일대의 모든 인명을 구속하고 있었다.
황금빛 아지랑이가 줄줄이 번지는 듯했다.
병사는 이를 악물며 발렌시아누스를 노려보려 애썼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키, 악신의 천사가 내려온 듯 매혹적인 외모와 화려한 제복, 그리고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분위기.
“끄으으윽!”
그는 이를 드러내며 애썼지만, 용혈 황족은 그 동공을 뱀처럼 세로로 바꾸어 뜨며 병사를 노려보았다.
사아아아.
마나에 실어 보낸 살기를 견디지 못한 병사들이 그대로 주저앉거나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브노아 장군은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피로 물려받은 힘만 믿고 망나니처럼 날뛰는군.”
발렌시아누스는 조소를 흘리며 브노아를 내려다보았다.
“난 목숨을 걸었지. 너도 그렇게 했어야만 할 텐데.”
“마나의 힘을 믿는 건가? 수천 병력 앞에 단둘이 들어올 정도로? 터무니없이 오만하군.”
발렌시아누스는 수행원으로 텐티아 한 명만을 데려왔다.
그것도 기계 갑옷이 아니라 백금 갑옷만 입은 채였다.
그러나 텐티아와 발렌시아누스 모두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있었다.
“오만한 건 너야. 장군. 소드 엑스퍼트를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잡병들로 잡을 생각이었나?”
브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잡병? 그 말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공화국에 도전할 용기는 있나? 기회를 주지.”
랑소와 공화국의 숙영지 안쪽에도 큰 공터가 있었다.
기사들의 연무장처럼 넓고 마총 사수들의 사격장처럼 길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를 흘깃 바라보았고, 텐티아는 면갑을 내리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
발렌시아누스와 에릭은 공터 가장자리에 나란히 섰고, 브노아는 장교와 호위병에 둘러싸여 약간 떨어진 곳에 섰다.
발렌시아누스 같은 ‘높으신 분’은 협상과 공작, 외교를 위해 적진을 빵 먹듯 돌아다니는 게 흔한 일이었기에, 그는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되려 나른한 웃음을 그 붉은 입술에 띄우며 뭇사람의 시선을 훔쳤을 뿐이었다.
“에릭. 여기 있어도 되나?”
“저는 엄연히 공식적으로 외교 임무를 받은 외교관이기도 합니다. 여기 있는 게 제 일입니다.”
“브노아 장군이 이렇게 어리석을 줄 몰랐군.”
“저도 그렇습니다.”
“응?”
에릭이 목소리를 떨었고, 발렌시아누스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거만한 장군이지만, 무능한 장군은 아닙니다. 도로이센의 소드 유저, 엑스퍼트들과 여러 차례 싸워 본 적이 있지요.”
“그럼.”
“예. 전하의 도발을 역으로 이용하려 하겠지요. 공화국군이 제국 기사를 이기는 모습을 보여줘 사기를 끌어 올릴 생각일 겁니다.”
“제법 배포가 있군.”
발렌시아누스가 능글맞게 웃었고, 에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전하가 그 비공정을 타고 수십 기사를 거느린 채 오실 줄 알았습니다. 위압감이란 그런 게 아닙니까?”
발렌시아누스는 희미하게 웃은 뒤,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에릭. 아니고말고. 위압감이란 저런 것이야.”
* * *
공터 한쪽에서 텐티아가 말을 타고 나왔다.
고삐를 당기는 손놀림은 잠시 외출을 나온 듯 가벼웠고, 겨울 햇살을 받은 백금 갑옷은 찬란하게 빛났으며, 붉은 망토는 그녀의 마나 블레이드처럼 펄럭였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공터 전체와 그 공터 주변에 몰린 수천 인파가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장중했다.
그녀가 한번 내렸던 투구 면갑을 다시 올렸고, 용기와 투지로 가득 찬 늠름한 눈빛을 보여주었다.
“오늘 그대들은 제국 기사의 힘과 용맹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반대쪽 공터에서는 공화국군 100여 명이 나왔다.
그들은 흉갑 위로 삼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중간중간 창날 대신 금속 날개가 붙은 장대를 치켜들고 있었다.
한 사람이 백 사람과 싸운다면 한 사람 쪽이 불리한 게 당연했지만, 이 자리에 선 누구도 그 사실에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사 한 명이 일반병 1천 명보다 강한 세상이었다.
10명 정도 내보냈다면 되려 텐티아가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고 따지고 들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숫자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눈살을 찌푸렸다.
“불안한데.”
아무리 혈통주의를 경계하고 만민평등을 중시한다 한들, 군대에 기사도 없을 줄은 몰랐다.
밤낮으로 조련된 정예병은 일반병 대상으로 1대 10 정도의 교환비를 냈다.
소드 유저는 1대 100, 소드 엑스퍼트인 기사는 1대 1,000 이상이었다.
그것도 갑옷이 발달하기 전 이야기였으니 지금은 어찌 될지 몰랐다.
마법사도 기사도 혈통으로 만들어진 인종들이다.
만민 평등주의 때문에 그들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국체를 유지한 건지 의문이었다.
수천수만을 갈아 넣어 가며 두들기면 적국 기사도 언젠가는 잡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젊은이들을 그렇게 소모한 나라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랑소와 공화국과 주변 공화국들은 오히려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고 있었다.
검객이 우글거리는 도로이센과 수백 년 동안 싸워 온 이상 뭐라도 있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나와 텐티아 경이 그 ‘뭐’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난 지독한 낭패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텐티아 경-.”
동시에 나팔이 울렸다.
뿌우우우-!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공화국군 100명 사이에 선 장교가 가슴에 멘 십자가를 쳐들었다.
텐티아 경이 당황한 듯 다급히 마상창을 겨누었다.
동시에 장교가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광명이시여. 혁명의 동지들에게 영원한 은혜를 내리사-.”
우우우웅-!
창백한 하얀빛이 십자가에서 물씬 피어올랐다.
미친.
은은한 신성력이 장교의 십자가로부터 주변 날개 장대로 퍼져나갔다.
신성력을 받아들인 날개 장대는 그 주변 병사들에게 또 신성력을 퍼트렸다.
병사들의 눈빛이 달아오르고, 팔다리에 힘이 들어갔으며, 어설프던 자세가 전사의 그것으로 일변했다.
내가 성자 마테오스의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아 진과 함께 아카데미 신학과에서 연구하고 있는 그것이었다.
신성력 공유와 증폭.
나는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저거 완전 이단 사이비-.”
성자조차 정치적 부담과 교리 해석 문제로 못하고 있던 걸 랑소와 공화국의 주교 따위가 추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신은 믿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이고, 이단은 있어도 사이비는 없다.’
‘제국 바깥의 교인들은 각 교회의 자율성을 주장하며, 극단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때는 홍의주교였던 교황 아르고스의 말이었다.
정말로 사이비라면 신성력이 내려올 리가 없었다.
마테오스가 내게 은연중 했던 말이 있었다.
‘공유라는 발상 자체가 아니라, 그걸 이용해 사병을 양성해서 권력을 키우거나, 성물을 양산해서 돈을 벌려는 시도가 문제였습니다.’
즉.
저들이 정말로 만민평등을 위해서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다면.
성물을 양산하고 새로운 기도를 만들어도.
천벌 받을 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난 이걸 말해주지 않았던 에릭의 머리를 쪼개버릴 생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대공님. 저 장교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자인데, 신심이 깊고 병사들을 잘 조련하기로 유명합니다. 잘 사용하는 기도는 광명 전사의 기도와 구마의 빛 기도입니다.”
이렇게 싸우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어조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모르는 게 면책 사유가 되는 신분이 아니었다.
텐티아 경을 위험 속에 내던져버린 죄책감이 차올랐다.
이제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 * *
텐티아는 적진에서 신성력이 피어오르는 걸 보며 당황했지만,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성기사 수십 명과 난투를 벌인 적도 있는 그녀였다.
‘대공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그녀는 발렌시아누스 앞을 지나가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손짓을 원망의 손짓이라고 생각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군. 이렇게 창피할 수가. 경. 미안하네.’
텐티아는 면갑을 내리고, 마상창을 겨드랑이에 껴 앞으로 단단히 겨누고, 마나 블레이드를 끌어 올려 창끝에서부터 칭칭 감듯 둘렀다.
츠츠츠츠!
붉은색 기운이 창날을 휘감고, 창대를 빙빙 감아 올라왔다.
“제국의 기사여! 오늘 그대의 피를 보겠다!”
“저 사악한 혈통주의자를 낙마시키자!”
“삼색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하나 되어 싸워라.”
텐티아는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생각했다.
‘발렌 전하를 따른다는 게 무슨 뜻일까? 고생도 많이 했고, 고민도 많이 했다.’
꾸욱.
창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생은 힘과 깨달음을 주었지. 힘은 원하던 거였고, 깨달음은 원치 않던 것도 많았어.’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신성력으로 강화된 화살과 석궁이 날아와 텐티아의 백금 판금 갑옷에 쏟아졌다.
땅!
굵은 촉이 투구를 강하게 치고 흘러나가고, 메추리알만 한 쇠구슬이 흉갑을 정통으로 두드렸다.
‘하지만 고민은 내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하면 할수록 늘기만 했지.’
주문 회로로 강화된 백금 갑옷이 물리적 충격은 버텨 주었지만, 신성력은 갑옷을 뚫고 스며 들어와 텐티아에게 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퍽!
화살의 말의 어깨를 꿰뚫었다.
말이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고, 텐티아는 주저 없이 낙법을 펼치며 뛰어내렸다.
“후우.”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빛나는 화살과 돌이 쏟아졌다.
저 앞에는 빛나는 방패와 장창이 고슴도치처럼 진을 치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원방패와 한손반검을 든 성기사 느낌의 병사들이 즐비했다.
‘기사답지 않게 말장난 같은 걸 하려 했던 게 잘못이었다.’
텐티아는 사납게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괜히 마나만 낭비했어.’
쓰지도 못한 마상창은 던져 버리고, 화한을 빼 들어 화살을 쳐냈다.
기사라고 해서 미친 듯 돌격만 하는 건 아니었다.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장소를 노려 한 방에 끝내버리는 게 제일 좋은 싸움이었다.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당연하지만 상대는 지금처럼 돌과 화살을 퍼부었다.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상대가 더 용맹해지니, 화살과 주문의 비를 맞으면서도 두려움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고, 그게 기사가 단순 무식해야 하는 이유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라.’
텐티아는 한 손을 들어 면갑 앞을 가렸고, 전투 사제처럼 주문을 외우고 있는 병사들을 응시했다.
“불로 심판하여 주소서!”
병사 여덟이 고리형 철퇴를 치켜들었다.
철퇴에서 하얀 불꽃이 길게 뿜어져 나왔고, 그 순간 병사들의 시야가 가려졌다.
‘무식해야만 용감할 수 있다는 건가?’
텐티아는 그 순간 광소를 터트리며 땅을 박찼다.
“하-하하하!”
땅!
발밑이 깊게 파이고, 바람이 갈라졌으며, 화한에 붉은색 파도 같은 마나블레이드가 어렸다.
‘분명한 게 있다면, 당신께서 용감한 기사를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뿐.’
텐티아의 한 손은 화한의 자루 아래를 꼭 잡았고, 반대 손은 손잡이 끝 알 굵은 보석을 잡았다.
츠카아악!
한 차레 끈적한 붉은 파도가 일고, 하얀 불꽃이 반으로 갈라졌다.
쿵!
그녀가 화살처럼 내달리더니, 방패 벽 앞에서 왼발을 천년 거목처럼 단단히 디뎠다.
당장에라도 덮쳐올 줄 안 병사들이 신성력 일렁이는 장창을 내질렀지만, 창날은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갈랐다.
“엇?”
“멍청아, 저거!”
“젠장!”
경험 많은 병사들은 텐티아의 전조동작을 보며 탄식했고, 지휘관 다니엘은 다급하게 천 년 방호의 기도를 올렸다.
끼이이익!
텐티아가 파도를 끌어내듯 검을 베어 올렸다.
츠카카칵-!
붉은 파도가 검을 떠나 쏘아져 나갔다.
도로이센의 절기, 마나 블레스트였다.
쾅!
무시무시한 폭음이 잃고, 방패 벽과 그 뒤에 선 병사들이 바닥을 굴렀다.
텐티아의 하얀 갑옷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요동쳤다.
“저 사악한 혈통주의자가 우리를 다 죽이려 한다!”
“사악한, 혈통주의자가, 우리를 다 죽이려, 한다아-!”
그녀의 면갑 안에서 서늘한 비웃음이 흘러나왔고, 곧이어 칼과 강철 주먹이 춤추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릭은 다시금 다짐했다.
‘전면전만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