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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59)화 (259/340)

(259)

“전쟁은 이미 결정되었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지만, 달라질 건 없소.”

브노아가 여전히 고압적인 어조로 내뱉었다.

막 그의 뒤로 다니엘이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다.

나는 옅게 조소하며 물었다.

“대체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이건 자신감이 아니오. 만약 훨씬 더 일방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내 뜻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요.”

“하.”

슬슬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벽을 보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기껏 되돌렸던 동공이 다시 세로로 찢어지지 않게 유의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병사가 나와 텐티아 경에게 경계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그보다 많은 병사가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무기를 손질하고, 기도를 올리고, 날개 십자가 성물을 성유로 닦고, 수레에 말먹이를 잔뜩 실어 이쪽저쪽으로 끌고 다녔다.

“저들을 다 죽일 생각인가?”

“나도 그 옆에 있을 거요. 대공.”

“대공 전하라 불러라, 천한 것아.”

“……난 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의 의지를 섬기오. 그럴 수 없소이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이 장군에 대해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침식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고, 십자가를 제외하고는 마도구도 차고 있지 않았다.

용언의 기운을 살짝 끌어올려 일대 마나를 죄다 굳히거나 뒤흔들어 놓아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

되려 내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기까지 했다.

아예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이라는 뜻이었다.

“국민의 의지라…….”

“내가 원한 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싸우는 일뿐이었고, 의회는 내게 제국의 핍박받는 농노들을 해방시키라고 명령했소. 그리고 난 그 명령을 거부할 자격이 없지.”

브노아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선 굵은 적갈색 눈동자 안에 내가 언뜻 비쳤다.

그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있는 힘껏 내질러 봐야 내 눈꺼풀도 뚫지 못하겠지만, 나는 브노아에게서 어떠한 형태의 강인함을 느꼈다.

그리고 난 그런 형태의 강인함을 밟아 부수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회군하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

“그럼 다음 장군이 오겠지. 이미 우리는 10만 대군의 편제를 마친 상황이오.”

“황제 폐하께 운석 소환을 부탁드려야겠군.”

“운석이 우리의 건물을 부수고 인명을 앗아갈 수는 있겠지만, 정신만은 남아 있을 거요.”

“10만의 시체를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사악한 솔레타라스 제국의 귀족들이, 농노들의 처우를 조금도 개선해주기 싫어서 10만을 쳐 죽였다는 사실을, 만국이 알게 되겠지.”

나는 내가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내뱉었다.

“그 사실을 알리는 게 10만의 목숨만큼 중요한가?”

장군은 선이 굵은 눈썹을 꿈틀해 보였다.

“목숨을 아껴서는 못 할 일이 많소. 내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게 있다는 것만큼 기꺼운 일도 없지. 그게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거요.”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아끼지 않는 수준을 한참 넘은 듯한데? 형벌부대도 이 정도 전력 차가 나면 안 보낸다고.”

나는 브노아가 손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걸 보았다.

“열사암후 체사르가 암살자를 보낼 거다. 네 가족은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죽겠지. 아이들을 산 채로 잡아 방패 앞에 매달아도 네가 진격을 명할 수 있을까?”

“소문답지 않게 말이 길구려. 누가 보면 대공이 우리를 살려주고 싶어 하는 줄 알겠소?”

“못난 아버지로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빈정거렸고, 브노아의 얼굴에 한 차례 경련이 일어났다.

“……인정하지.”

그가 한 손을 들었고, 중무장한 병사들이 다가와 에릭 의원의 양 팔을 붙들었다.

“브노아 장군!”

에릭이 거칠게 몸을 흔들었지만,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가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에릭 의원. 의원의 활동은 ‘전쟁 중 협상, 외교 임무’라는 의원의 직무 범주를 명백히 넘었소.”

에릭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외쳤다.

“사람 살리자고 시작한 공화국이요!”

“나는 의원의 행위가 의회에서 정식으로 통과된 신성한 출병 명령을 뒤엎으려는 반동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군.”

“민중의 이름으로 10만을 죽이는 건, 공화국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범죄요. 왜 이 전쟁이 시작되었지? 의원들의 자존심과 지지율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그토록 욕하던 귀족들과 지금 우리가 다를 게 무엇인가?”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막사에 머물러 주시오.”

“놔라! 이 자식들아! 너희를 다 죽일 수는 없단 말이다. 이건 국민의 자살이야!”

에릭 의원이 질질 끌려 사라졌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한 병사가 내게 와 말했다.

난 텐티아 경을 시켜 그 병사를 던져버렸다.

“대공에게 걸어가라는 것이냐? 말과 마차를 가져오거라!”

* * *

우리 숙영지로 돌아와 보니, 황동 기사단의 망치 깃발과 황실의 삼두룡 깃발을 선두에 내건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길을 비켜라! 헬레나 대공 전하의 행차이시다!”

“황동 기사단의 장교 기사께서 납시신다.”

“황제 폐하의 깃발을 든 대리인이시며, 저 추악한 반역자들을 심판할 분쇄자이시다.”

외치는 구호와 문장은 과격했지만, 기계 기사들과 마총 사수들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고, 그들 역시 우리를 향해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왔군!”

“기다렸네!”

“자네들 몫을 남겨 놓았지.”

나와 헬레나는 모의전을 마친 날, 그 자리에서 병사들을 한데 모아 놓고 만찬을 대접했다.

이는 모의전을 계기로 내 사병들과 헬레나의 부대원 간 악감정이 생겨, 안 그래도 내분과 경쟁이 심한 황실의 군사 집단들이 더 쪼개지는 걸 막기 위한 책략이었다.

텐티아 경이 제시한 이 대책은 아주 멋들어지게 먹혀들었고, 덕분에 두 군사 집단의 만남은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발렌시아누스!”

이글거리는 한여름 태양처럼 열정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레나.”

그녀는 두 개의 뿔이 난 거대한 전투마, 마수의 피가 섞인 짐승, 바이콘을 타고 숙영지 안으로 들어섰다.

황동 투구를 벗자 금속광으로 보일 만큼 찬란한 금발이 길게 흘러내렸다.

속눈썹 긴 붉은 눈에는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등 모든 종류의 탐욕을 한데 모아서 뜨겁게 벼려 놓은 듯한 열기가 타올랐다.

매일같이 병사들과 바닥을 구르고 진창을 달리는 훈련을 해서인지, 하얗던 피부가 한결 그을려 있었지만, 썩 잘 어울렸다.

헬레나가 검은 바이콘에서 훌쩍 뛰어내려 다가왔다.

“생각지도 못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들었어.”

‘빠진’ 건가?

아니면 내가 들어간 걸까?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네. 지금까지 많은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누나니까.”

도와주겠다는 말은 언제나 반가웠다.

하지만 그녀의 도움은 지금 내가 바라는 것과는 약간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헬레나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떤 병사들을 데려왔는지 봐. 발렌시아누스.”

미인을 마주한 색마 같고, 보물을 맞이한 용 같았으며, 살얼음 뜬 맥주를 맞이한 드워프 같았다.

* * *

“일단 저쪽의 여섯 기사는 모두 황동 기사단의 전우들이야. 저들이 전원 소드 유저로 구성된 중장기병들을 이끌지.”

한 무리의 기마병은 말까지 주술 회로 새겨진 전신 판금 갑옷을 입혔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이어진 중장보병들이 아카데미 검술학부 출신의 검객들이야. 하나같이 홀로 수백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싸움꾼이자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병사들이지.”

중장보병들은 포션과 공격 마법 스크롤을 비롯한 각종 소모성 마도구, 충격 반사 주문 새겨진 원방패, 거대한 한손반검으로 무장했다.

“연구마법사들에게 전투마법사의 교리를 가르치는 건 적잖게 힘든 일이었어. 하지만 이제 그들은 현장에서 마도구를 제조하다가도 주문을 날리며 싸울 수 있는 전사들이지.”

마법사들은 얼굴에 역병 의사 같은 마스크를 썼고, 주문 새겨진 가죽 코트를 입었으며, 쇠가시 돋은 지팡이와 파괴술 주문 새겨진 에스토크, 쇠뇌 또는 석궁으로 무장했다.

소모성 마도구를 공급하고,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마법 폭격을 퍼부으며, 기습에도 호위대가 달려올 때까지 버텨줄 게 분명했다.

“사제님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으시겠지만 부상자 치료를 도와주실 거고, 저 친구들은 시체 수습을 맡아줄 거야.”

백의를 입고 두건을 걸친 무리는 예상대로 사제였지만, 그 옆에서 해골 지팡이를 들고 뼈 갑옷을 입은 자들은 다소 생소했다.

세레라지에가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들을 사제와 함께 데려오는 건 아무리 황족이라도 만만찮은 일이었을 텐데, 정말 세상이 바뀌기는 바뀐 모양이구나.”

헬레나의 군세에는 열댓 명의 사령술사가 끼어 있었다.

헬레나가 무슨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고 죄다 썩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전투 끝나고 지친 병사들에게 이제부터 네가 죽인 시체나 수습하라고 할 수도 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난 내가 가는 곳마다 좀비와 스켈레톤, 어보미네이션, 레이스, 고스트, 구울이 떼로 생기는 걸 바라지 않거든. 어떻게든 한데 모아서 잘 화장해 줘야지. 장례식은 아군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에도 중요하다고.”

헬레나가 내가 아는 최고의 야전사령관답게 웃었다.

“아직 숫자가 부족하기는 해. 개개인의 실력도 네 기계 기사들보다 밀릴 거고. 하지만 난 전면 돌격, 기습, 유인을 때에 따라 사용할 줄 알고, 바위산과 평야, 호수가 공존하는 일대의 지형을 이용할 줄 알며, 내 병사들이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지 알아.”

지옥의 불꽃처럼 뜨거운 웃음이었다.

“물론 10만 대군을 정면에서 이길 수는 없지만, 천 명씩 100번 이길 자신은 있어.”

그녀가 다시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뭘 망설여. 발렌시아누스.”

그리고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등을 시원하게 두드렸다.

“같이 전장의 불꽃에 빠져보자고. 네가 잘하는 거잖아?”

* * *

나는 바위산 중턱 가장자리에 서서 해 지는 서쪽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았다.

사아아아.

서늘하게 불어온 겨울바람도 향유로 굳힌 머리카락을 날리지는 못했다.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쿠구구구.

브노아가 우리를 우회해서 제국령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듯했다.

‘해방 전쟁’ 따위의 이름이 붙은 전쟁이 대부분 사람을 이승에서부터 해방하는 결과를 만든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불의 창을 던지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세금 걷어가는 황족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신성불가침한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

저들의 병장기에 우리 신민들의 손끝 하나, 밀 한 포기도 다치지 않게 해줘야 할 의무와 권리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랑소와 공화국에 운석을 떨구고, 역병을 퍼트리고, 통령을 고문해야 했고, 그렇게 할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고민이십니까?”

그때 건조하면서도 비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쪽을 보니 마커스가 외안 안경을 쓰고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고, 그 역시 굳이 묻지 않고도 말을 이었다.

“기술은 사용되기 위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니벨룽겐을 띄우고, 하늘에서 마총을 퍼붓고, 적 장교들을 노려 기계 기사들을 강하시키시지요. 그렇게 할 수 있으시잖습니까?”

한 번 더 바람이 불어왔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광명신의 시선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동시에, 소름 돋는 마경의 기운이 바람에 실려 왔다.

그때 내 오른쪽으로 세레라지에가 다가왔다.

“동생아. 에릭의 바람을 들어줄 방법은 없겠니? 그 광신도들의 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리라는 걸 아는 후배잖니. ……브노아를 죽이고 전투 하나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알아서 도망치지 않겠니?”

드물게도 내 눈치를 살피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이었다.

본인이 이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안다는 듯 계속 탄식하고 있었다.

방금 그 생각을 나도 했다.

한 3천 명 정도를 마법 한 번에 태워 죽이고, 번개로 위협하면 다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러나 공화국 상층부가 침식자라고 추정되는 이상, 새로운 장군 새로운 병사가 올 뿐이었다.

……대체 저 신실한 나라에 침식자가 어떻게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세상 시X, 세상 시X, 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때 불현듯 발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회귀 전에도 한두 번 해본 적 있는 작전이었다.

잘만 하면 랑소와 공화국 군대를 모두 회군시키는 동시에, 의원들 사이에 숨어 있을 침식자 세력의 실체까지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발렌시아누스. 미쳤어?”

헬레나는 눈을 부릅떴고, 텐티아는 입을 쩍 벌렸으며, 세레라지에는 귀를 의심했다.

발렌시아누스가 지도에 십자 표시가 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물을 죄다 랑소와로 보내버리자. 죽기 싫으면 그 잘난 의회에서 브노아에게 회군하라고 명령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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