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61)화 (261/340)

(261)

브노아는 국경을 넘자마자 수백 개의 정찰조를 내보냈다.

“일단 제대로 보고 들어야만 제대로 때릴 수 있는 법이지.”

정찰대원들은 모두 몸이 날래고 기도로 자신을 축복할 수 있는 빼어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단검과 단창, 두꺼운 망토와 비상약, 비스킷 등을 가지고 2~5인씩 짝을 지어 활동했다.

주요 임무는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이 진군할 길을 며칠 앞서 이동해 보고 이상 상황을 보고하는 일과,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로 주변을 정찰하는 일이었다.

“4차 보고. 마경 담당 6조. 범람 조짐은 보이지 않음.”

“확인. 계속 면밀하게 주시해 주기 바람.”

마경은 이상 상황 중의 이상 상황이었고, 당연히 그들의 정찰 범위에는 마경이 들어가 있었다.

마경이 범람했다가는 진군하는 병사들과 보급로가 모두 망가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세상에.”

“저 골짜기 너머는 다시 우리 땅이야.”

“광명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어, 어찌 사람이 되어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발렌시아누스!”

따라서 정찰조들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화르르륵!

망나니 대공 발렌시아누스가 들판 전체를 불태우고, 사랑하는 조국 랑소와 공화국을 향해서 이물 마수들을 밀어내는 모습을.

쿠구구구!

이물 수천 마리가 서쪽을 향해서 파괴적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지만, 그들의 상상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악!’

‘살려줘요!’

‘엄마!’

그들은 몇 시간 뒤 저 이물들의 발굽에 들이받힐 국경 일대의 마을 사람들, 며칠 후 저 이물들의 뿔에 들이받힐 대도시의 시민들을 떠올렸다.

“이 망나니 새끼가!”

거대해진 불의 정령들이 불타는 들판을 거닐며 발렌시아누스를 닮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뻔뻔하고도 오만한 웃음소리가 정찰대원들의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들은 소용돌이치는 불길 속에서 어떠한 환상을 보았다.

‘천한 것들이 감히 황실에 반기를 들어?’

‘그러게. 누가 제국에 쳐들어오랬나?’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거라.’

‘너희는 영원히 노예다.’

망나니 대공이 장중한 제복 차림으로 그들을 돌아보며, 황금빛 눈에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찰대원들은 반사적으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들은 지금 그들이 욕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바로 보고해야 합니다.”

“전서구 있는 거 다 띄워!”

“본국에도 전갈을 보내야 합니다. 대피령을 내리고 후속부대를 방위로 돌려서-.”

“일단 브노아 총사령관님과 후속부대 사령관님께 전한다. 목숨을 걸고 이 편지를 보내도록.”

* * *

마경 일대에 퍼져 있던 수십 개의 정찰조가 들쑤신 벌집의 벌들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세레라지에와 발렌시아누스는 그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바위산 위에서 내려본 정찰대원들은 점처럼 보였지만, 둘은 그 점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동생아. 쟤들을 죽일 필요는 없잖니.”

세레라지에는 눈을 흘겼고.

“당연하지. 오히려 빨리 돌아가서 보고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

발렌시아누스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뭐라고-.”

그리고 브노아는 연극 주연배우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령관님!”

“다시 말해 봐라! 그 망나니 대공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브노아는 황망한 목소리로 울부짖었고, 전령은 벌벌 떨면서도 해야 할 말을 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으로 추정되는 불꽃 요술쟁이가 마경을 폭주시켰습니다. 현재 이물 약 1천 2백여 마리가 랑소와 공화국으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브노아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거의 다 왔는데.’

양국이 일부러 교역 도시로 키우지 않은 이상, 국경 일대는 이렇다 할 마을이나 도시가 없는 미개척지대였다.

국경은 지도 위에 그은 선이 아니라 산맥이나 골짜기, 습지나 바다 따위의 자연 경계로 정해질 때가 많았고, 당연히 그 일대는 사람 살기 좋지 않은 땅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루만 더 전진하면 진짜 제국령이었다.

기사령 주제에 인구가 수만이 넘고, 남작령 정도만 되어도 번성한 도시가 있으며, 수만의 농노가 한 명의 기사 아래서 신음하는 제국령이었다.

브노아는 피를 토하듯 내뱉었다.

“본국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게 먼저다. 곧바로 전서구를 띄우도록. 후속부대에도 소식을 전해라. 기습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녀사냥꾼을 보내라. 그 요술쟁이가 누구든 죽여 버리겠다. 마경을 이용한 사악한 책략에는 그에 알맞은 보답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

전령이 무언가 추가적인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브노아는 그 눈빛을 외면했다.

“어서 가 보도록 해라.”

전령이 당혹스러워하며 천막을 나섰다.

천막에 모여 있던 장교들도 비슷한 눈빛이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태풍 앞 촛불처럼 요동쳤다.

“각하…… 회군 명령은 내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다니엘이 그들을 대표해 물었다.

“…….”

숨 막히는 침묵이 막사 안에 내려앉았다.

브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회군하지 않는군.”

헬레나는 황동 갑옷을 입고, 빳빳한 붉은 털 장식이 도끼머리 모양으로 솟아 있는 투구를 썼으며, 칠흑 같은 털을 가진 바이콘에 탔다.

두 개의 뿔이 난 짐승이 산 아래를 바라보는 가운데, 헬레나의 부관과 장교들이 답했다.

“회군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고 벌벌 떨고 있을지도요.”

“뭐, 저들이 그렇게 무능하거나 비정한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미 마경은 범람했고, 지금 돌아가 봐야 늦을 게 분명하니까요.”

“차라리 이대로 후속부대를 규합해 이 주인 없는 땅을 집어삼키는 게 전술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입니다. 조금만 더 전진하면 지켜줄 대영주도 없는 마을과 도시가 잔뜩 나오니까요.”

상대에 대한 비웃음과 비꼼이 어린 목소리였다.

“훌륭한 분석이었다.”

헬레나는 썩 만족스럽게 웃으며 산 아래 숙영지를 바라보았다.

랑소와 공화국군 8천이 산 아래 호숫가에 천막을 치고 있었다.

“앞쪽은 들판이고, 뒤쪽은 반달 모양의 호수와 산이 막아주고 있으니, 기습당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생도 시절 한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자 대규모 패싸움을 이끌었었던 참모 장교가 말했다.

“정찰대를 곳곳에 뿌린 건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무능한 지휘관은 아닙니다.”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콘의 발굽 아래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밟힌 시체 세 두가 놓여 있었다.

바이콘은 육식이었기에, 시체는 상당 부분이 뜯어먹힌 채였다.

이 산에서만 비슷한 정찰대 수 개를 맞닥트린 참이었다.

당연히 정기 보고 절차가 있을 테니, 산에 숨어들었다는 건 금방 들키겠지만.

“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겠지. 본국이 박살 날 위기인데 말이야.”

헬레나는 자신이 전쟁 신의 화신이나 사도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전투를 앞두고 이렇게 심장이 뛸 수는 없으니.’

그녀와 텐티아가 가진 싸움에 대한 관점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텐티아 같은 기사들에게 싸움이란 본질적으로 수단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도구가 싸움이었다.

반면 헬레나에게 투쟁은 삶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전력을 다해 부딪치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고. 그게 삶이 아니면 뭐가 삶이겠어?’

그녀는 투구 틈으로도 보일 만큼 선명하게 웃으며 명령했다.

“전투 마법사 부대장?”

“예. 전하. 칸타타 여기 있습니다.”

거대한 생도 깡패 조직을 이끌었던 마법사가 머리를 숙였다.

“전하가 아니라 사령관님이다. 그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너희는 마법으로 호수를 가로질러서 공격할 거다. 기마 돌격 전에 혼을 빼놔야지. 중장 보병대원들을 호위로 붙여 줄 테니 적당한 위치를 잡아라. 너무 낮은 곳까지 내려가면 반격당할 수도 있으니 유의하도록.”

“존명.”

칸타타가 거수경례를 올렸고,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호위로 붙은 중장 보병들과 함께 한쪽으로 빠졌다.

“기병 부대?”

헬레나의 동료인 황동 기사들과 역시 아데미 출신들로 꾸려진 중장기병들이 나섰다.

“여기 있습니다.”

“마법에 두들겨 맞은 랑소와 놈들의 숙영지에 난리가 나면, 그때 호수를 우회해서 돌격할 거다. 타이밍을 맞추는 게 생명이고, 포위에 주의하도록.”

“존명.”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 * *

헬레나는 추가로 보병대, 사제, 사령술사에게 명령을 내렸고, 작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내 동생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멋진 책략으로 저들을 회군시키려 한다. 그것도 나쁘지 않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게 진짜 승리지.”

그녀의 목소리에 아주 잠시 진심 어린 두려움이 섞였다.

그녀 역시 나름 빼어난 지휘관이었지만, 마경의 이물 마수를 죄다 밀어내 버린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발상이 달라. 발상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어디까지 의도한 건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에릭이라는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부터 작전이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확실한 건,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랑소와 놈들은 박살이 날 거다.’

‘이물 마수들의 공격으로 본토에 큰 피해가 생기겠지. 보급도 끊어지고 사기도 떨어질 거다. 그 꼴이 난 군대는 몇만이 되었든 절대 날 못 이겨.’

‘젊은이 10만이 죽고 국경 쪽 도시는 초토화되겠지. 군대와 나라 모두 뿌리까지 뽑히는 거다. 그때 도로이센에게 했듯 경제적으로 목을 조이면…… 사실상 정복이다.’

‘1년 만에 서방의 강대국 두 개를 반쯤 죽여 놨어. 정공법으로는 몇 년이 걸리고 돈과 피가 얼마나 흐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평소 어떤 생각을 하고 살면 그런 패악질을 떠올릴 수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에게 피 백 방울을 흘리게 하고, 우리는 피 한두 방울만 흘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거다.”

헬레나의 군대는 대부분 생도 깡패 출신이었고, 그들은 피 흘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몹시도 허망한 싸움을 해 왔다.”

그녀는 그들의 출신 성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부분을 섬세하게 자극했다.

“지금까지 너희는 기껏 승리해 봐야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다음 날이면 또 다른 생도들이 너희의 방과 강의실과 빵을 빼앗으려고 왔지. 지켜내면 그다음 날이 있을 뿐이고, 지켜내지 못했다면 다시 빼앗으려고 가야 했다.”

“맞습니다!”

“그랬습니다.”

여기저기서 동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이기면 너희는 저들의 몸값을, 부귀영화를 얻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업은 전쟁이다.”

분위기가 고양되고, 헬레나의 목소리 역시 조금씩 더 달아올랐다.

“내가 바라는 건 재화가 아니라 승리다. 승리의 영광도 재화도 너희와 나누겠다. 나와 같이 갈 자가 있느냐?”

기습을 전제로 한 작전이었기에, 우레 같은 함성은 뒤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의에 찬 눈동자 수백 쌍이 헬레나를 향하고, 수백 개의 손이 한순간에 치솟는 광경은, 고요하기에 더더욱 장엄했다.

“새벽에 놈들이 이동을 시작하면 공격하겠다. 각자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 * *

밤이 깊었다.

에릭은 살금살금 천막에서 기어 나왔다.

체격이 비슷한 수행원이 머리를 맥주로 감아 금발로 물들이고 에릭의 침상에 누웠다.

‘마녀사냥꾼은 위험하다. 발렌 대공이 죽을 수도 있어. 그럼 제국은 위신 때문에라도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할 거다.’

‘이대로라면 랑소와는 끝장이야.’

‘내가 하려는 짓은 매국인가 애국인가?’

많은 상념의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지금껏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자부하는 정치인이었다.

헬레나가 했던 계산은 그의 머릿속에서도 똑같이 돌아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정말…… 미친 자다. 마경을 이용하려 하다니.’

‘브노아가 뭘 망설이는지는 모르겠다. 회군하지 않는다면 랑소와는 끝이야.’

‘만약에, 만약에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이 모든 걸 예측했다면…….’

에릭이 그를 찾아올 걸 예측하고, 도와주는 척 에릭의 신뢰를 사 브노아의 발목을 잡게 한 뒤, 마경을 이용해 랑소와를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 오만하고 핼쑥한 인상의 사내라면 진짜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을 듯해서 더더욱 두려웠다.

‘난…… 내 나라를 팔아버린 건가?’

에릭은 울타리 밑을 빠져나갔고, 말 한 필을 슬쩍 쥐었다.

그때 풀숲에서 병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에릭 의원님.”

“!”

에릭은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병사는 고함을 치는 대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가십시오.”

“……자네.”

“저도 제국은 싫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시작부터 이상했습니다. 브노아 장군님이 왜 회군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소리에 점점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전 국경지대 마을 출신입니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 주십시오. 의원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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