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62)화 (262/340)

(262)

“헉, 헉.”

에릭은 거친 숨을 내쉬며 바위산을 올랐다.

지평선까지 닿은 거대한 불길과 새벽을 내쫓을 기세로 번지는 매캐한 연기 탓에, 마경과 발렌시아누스를 찾는 건 쉬웠다.

하지만 바위산에는 말이 오를 수 없었고, 그는 말에서 내린 뒤 네발로 기다시피 경사를 달려 나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나와 한 약속을 지킬 생각인 건가, 아니면 날 이용해 공화국에 치명타를 입힐 생각인 건가? 브노아 는 왜 바로 회군하지 않는 거지?’

무수한 의문과 험한 길이 에릭을 지치게 했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니 수려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화사한 금발이 땀에 젖었으며, 손가락과 손에 크고 작은 상처가 늘어갔다.

하지만 에릭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평화가 비싸고, 더럽고, 치사해도 전쟁보다는 낫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여전히 내 편이라면, 우리 병사들의 회군을 용인해줄 생각이라면, 그를 살려야 해.’

‘그러려면 마녀사냥꾼의 위험을 알려줘야 한다. 그가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마녀사냥꾼을 상대로는 당할 수밖에 없어!’

에릭은 바위 하나에 손을 짚고 몸을 끌어 올렸다.

저벅.

그때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에릭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제 손가락 바로 앞에 군화가 있는 걸 보았다.

“……의원님?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곳은 지금 작전 구역입니다.”

그는 망토 아래 가벼운 갑옷을 입고 있었고, 단창과 쇠뇌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흑백 문장을 달고 있었다.

마녀사냥꾼들과 함께 움직이는 정찰대원이었다.

에릭은 침착하게 숨을 들이켰다.

“마녀사냥꾼들은 이미 올라갔는가?”

정찰대원이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제가 알기로 의원님은 지금 숙영지에 머무르고 있으셔야 합니다. 혹시 브노아 각하의 명령서를 가져오셨습니까?”

“나는 선거로 선출된 의원일세. 내가 움직일 때 명령서 같은 건 필요치 않아.”

“죄송하지만, 저는 명령서를 따를 뿐입니다.”

정찰대원이 바위 아래로 훌쩍 내려왔다.

그때 에릭은 품속에 넣어 둔 시약, 벼락 맞은 나무 조각을 왼손으로 움켜쥐는 동시에, 입 안에서 긴 주문을 외웠다.

‘빨리.’

“가장 작은 푸른 불꽃도 어리석은 자의 눈은 멀게 하고-.”

“의원님?”

“몸은 격렬하게 춤추며, 이가 부딪쳐 경의를 표한다.”

“지금 뭘…… 설마?!”

정찰대원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고기가 타는 냄새. 전류의 손길.”

에릭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서 푸른 번갯불이 작게 튀었다.

치지지직!

“아악!”

에릭이 두 손가락으로 정찰대원의 손목을 정확히 지졌고, 정찰대원은 몸을 부르르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에릭 역시 다리가 풀려 비틀거렸다.

“허억, 허억.”

마법을 쓴 여파로 심장이 미친 듯 뛰며 격통을 호소했다.

온몸의 진이 다 빠져버린 듯했다.

그러나 그는 비척비척 일어나 산 위로 걸음을 옮겼다.

“배신당했다면 멸망이지만 배신당하지 않았다면 희망이다.”

‘내게 나라의 명운을 판돈으로 걸 자격은 없다. 하지만 10만 장병과 그 가족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 정도는 걸 수 있어.’

* * *

난 지평선 너머까지 불길이 번져 가는 모습을 흐뭇하니 바라보았다.

불은 옮겨붙고, 더더욱 커지고, 마침내 새까만 밤하늘을 붉게 물들었다.

메마른 풀잎만 가득한 겨울 대지는 탐욕스러운 불길에 모든 걸 내주고, 붉게 달아오르다 끝내 녹아내렸다.

이제 불에 타지 않는 몸이 되었지만, 막강한 열기 탓에 이 높이에서도 얼굴이 후끈후끈했다.

세레라지에는 아예 마법까지 써 가며 열기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새삼스러울 정도로 강해졌잖니.”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했지.”

세레라지에가 눈을 흘겼다.

“노력만 했니?”

난 낄낄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물론 타고난 혈통이 더 중요했지. 용혈 덕에 용찬을 하고도 살았고, 용찬으로 충만한 화기를 품은 덕에 정령의 정수를 이식받는 데에도 성공했고, 그 정령의 정수 덕에 쿠이트 아즈를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위태롭게 갈팡질팡 얻어낸 힘이었다.

제이릴리스와 제국, 그리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힘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 장갑을 낀 채로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사아아아.

검은 손아귀 위로 황금색 색채가 물씬 피어올라 큰 구슬처럼 뭉쳤다.

용언의 권능이 마나를 움직여 저 아래 불의 정령들에게 보냈다.

“까르르르!”

“하하하하!”

불의 정령들은 이제 중성적인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불꽃 갈기와 거대한 뿔을 가진 근육질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보낸 마나를 먹고 더더욱 거대해졌고, 손짓만으로 주변에 불길을 일으켜 마경의 핵 주변을 둘러쌌다.

보랏빛으로 침식된 대지는 이미 불로 정화된 지 오래였다.

침식 대지를 다 태워버리면 이물들이 나오는 속도가 느려질지도 몰라서 일부러 일정 범위는 남겨 두었다.

또 살덩어리 핵에서 이물 마수 두 마리가 기어 나왔다.

“무오오오?”

놈들은 기어 나오자마자 입을 쩍 벌리고 당황했고, 불꽃 정령들이 휘두른 불의 채찍을 피해 먼저 간 동족들을 따라 서쪽으로 내달렸다.

“아. 저놈은 좀 크다. 누나가 잡아주라.”

막 뿔 네 개 난 놈이 하나 나왔다.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끄덕였고, ‘관통의 섬광’을 사용했다.

지이이잉!

어김없이 푸르고 흰 빛줄기가 쏘아져 나가고, 거대한 이물 마수가 바닥을 굴렀다.

불의 정령은 놈의 몸을 불태운 뒤, 놈이 가지고 있던 힘을 열기로 바꿔 내게 보내왔다.

나는 가슴 한켠이 따듯해지는 감각에 웃음을 지었다.

그때 세레라지에가 미간을 찌푸렸다.

* * *

“누나. 왜 그래?”

“동생아. 넌 안 느껴지니? 마나가 이상하잖니?”

“마나가 이상하다는 게 뭔 소리야? 방금 용언을 너무 세게 사용했나? 산 아래쪽 마나만 모았는데.”

“아니. 네가 한 게 아니란다. 이건, 그래. 나 배운 적 있잖니.”

그녀의 눈동자에 적잖은 불안감이 어렸다.

파란 동공과 노란 동공이 수축하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마녀사냥꾼.”

“마녀사냥꾼?”

그때 등 뒤쪽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박, 사박.

나 정도 되는 싸움꾼이 이제야 눈치챌 만큼 희미한 존재감이었다.

서른 걸음 정도의 거리, 바위산 키 작은 관목 사이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단심문관?”

그는 철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었고, 품이 넉넉한 흑백 로브를 입고 있었다.

흑백 로브 자체는 익숙한 물건이었다.

교황 아르고스가 수족처럼 부리는 이단 심문관들이 딱 저 법의를 입고 다녔다.

흑 아니면 백, 유죄 아니면 무죄, 화형 아니면 방면.

그게 이단심문관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은 절대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교회법에 따라 신 앞에서 떳떳하게 움직이는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챙!

나는 곧바로 흑루를 빼 들었고, 세레라지에 앞을 가로막았다.

“감히 내 앞에서 머리를 쳐드느냐!”

그러나 그것을 벨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상대가 내 앞에 있는데도, 마치 꾸벅꾸벅 졸다가 본 어렴풋한 환상 같았다.

저게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회귀 전에도 유스티아누스 밑에서 비슷한 놈들을 만나본 적이 있기는 했다.

랑소와 공화국 출신인 줄은 몰랐지만.

저게 분명히…….

“동생아. 마나의 추방자잖니.”

마나의 추방자.

마나를 빨아들이는 체질을 타고난 자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보통 어린 나이에 쇠약해져서 죽지만, 어찌어찌 살아남은 자들은 마법사를 상대로 최고의 상성을 자랑했다.

체질 탓에 존재감도 흐릿해서 어지간해서는 도저히 알아챌 수도 없었다.

“웬 놈들이냐!”

아래쪽에서 텐티아 경의 함성과 쇳소리가 들려왔다.

사박, 사박.

그리고 그런 그녀와 날 비웃듯, 수풀 사이에서 수십 명의 마녀사냥꾼이 걸어 나왔다.

붉게 물든 밤하늘 아래, 불길이 비친 금속 가면만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까르르르…….”

저 아래서 불꽃 정령들이 하나둘 비틀거렸다.

정령들이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가거나, 아예 펑 하고 터지며 사라졌다.

막 핵에서 기어 나온 거대 이물이 이쪽을 노려보았다.

사아아아…….

나는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렸지만, 주변에 마나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

그뿐만 아니라, 저 마녀사냥꾼들이 우리 몸에서도 마나를 빨아가고 있는지, 급격한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슥.

놈들이 품속에서 무시무시한 톱날이 달린 단검과 전쟁 망치를 빼 들었다.

“마법사는 죽인다.”

“이종족 혼혈도 죽인다.”

“홀로 꿈꾸는 미래의 침식자들을, 민폐쟁이들을 죽인다.”

“이 세상은 타고날 때부터 평등한 인간의 것이다.”

무뚝뚝함 속에 지독한 증오가 어린 목소리였다.

분명 어릴 때부터 세뇌 교육으로 주입된 증오가 분명했다.

나는 세레라지에가 이를 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번개를 뿌려댈 만한 말이었다.

세레라지에가 온몸을 떨며 울분을 토했다.

“……분하잖니. 하필 저렇게 말하는 놈들에게 상성이 안 맞다니.”

다음 순간 수십 명의 마녀사냥꾼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에릭은 간신히 바위산 위까지 기어 올라왔다.

밤하늘이 붉게 달아오르고, 막대한 열기 탓에 온몸에서 땀방울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손아귀에 무언가가 걸렸다.

땡그랑.

“가면?”

파란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마녀사냥꾼은 최후의 순간에만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마녀사냥꾼이 그 가면을 벗은 이상, 상대 마법사는 무조건 죽었다.

그게 랑소와 공화국 수백 년 역사 동안 이종족 혼혈의 타고난 초인들이 귀족 계급으로 자리 잡지 못한 이유였다.

에릭은 침음성을 흘리며 잡목 덤불을 헤치고 나아갔다.

“대공……!”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헛숨을 들이켰다.

“말도 안 돼.”

마녀사냥꾼 수십 명이 백발의 소년 대공과 고깔모자 쓴 금은 요동의 마법사를 절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백발의 대공은 처참히 죽어 가기는커녕, 한없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서 마녀사냥꾼을 노려보았다.

되려 고깔모자 쓴 마법사 주변에 열댓 명의 마녀사냥꾼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끄으으윽!”

“아아아악!”

“커어억! 커억!”

그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벗고 있었으며, 얼굴과 손등에 핏줄이 흉측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언 듯 보면 뱀 수십 마리가 살가죽 속을 기어 다니고 있는 듯 보였다.

‘이게 무슨-.’

에릭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마녀사냥꾼 열댓 명이 다시 땅을 박찼다.

“타고난 자들을 죽여라!”

혼혈 사냥은 랑소와의 건국 이념이었다.

혈통으로 힘을 물려받는 자들이 사회 지배층으로 굳어진다면, 끔찍하던 이종족 치세와 다를 것 없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숨으로 만민 평등을 이륙할 것이다!”

“인간은 평등해야만 한다!”

전투 망치가 휘둘러지고 단검이 예기를 뿜었다.

이에 마법사는 검붉게 불타는 하늘을 뒤로 하고 황금색 안광을 번뜩였다.

역광 진 얼굴에는 깊은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고, 지팡이를 쥔 손아귀 안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파지지직!

황금빛 기운이 마법사 주변에서 일렁이는가 싶더니, 희고 푸른 번개가 튀었고, 마법사의 긴 남색 머리카락이 전부 하늘로 솟구쳤다.

에릭은 헛숨을 들이키며 경악했다.

‘어떻게 마녀사냥꾼 앞에서 마나를……?’

다음 순간, 땅을 박찼던 모든 마녀사냥꾼이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커억!”

“크아아악!”

“케르르륵!”

그들은 다시 일어나려 아우성쳤지만, 앞서 도전했던 자들과 같이 온몸의 핏줄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남색 쪽 눈에서 피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에릭은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챘다.

‘그냥…… 힘으로 찍어눌러 버렸다고? 저런 게 가능한 건가?’

랑소와 공화국 수백 년 역사 속에서는 마녀사냥꾼 한 명을 이겨낸 마법사의 기록도 없었다.

‘상아탑에서 제대로 배운 마법사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했지만…… 저건-.’

마법사가 지팡이를 한껏 치켜들었다 내리찍었다.

땅!

노란 보석에서 푸른 번갯불이 사슬처럼 뿜어져 나갔고, 포위망 한쪽을 맡고 있던 마녀사냥꾼 다섯 명이 일제히 감전되었다.

“끄으으윽!”

그들의 몸에 파고든 전류는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며 상처를 입히는 대신, 그들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마나의 추방자인 마녀사냥꾼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고깔모자 쓴 마법사가 지팡이를 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파지지직!

손등에 핏줄이 솟고, 푸른 전격이 번뜩였으며, 다섯 마녀사냥꾼이 걷어찬 인형처럼 튕겨 나갔다.

에릭이 넋 나간 듯 세레라지에를 바라보았다.

세레라지에는 들뜬 숨을 내쉬며 새침하니 중얼거렸다.

“날 막아선 건 너희가 처음이 아니잖니. 몇 번이고 발목을 잡아 보려무나. 내 꿈은 점점 더 단단해질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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