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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64)화 (264/340)

(264)

“대단했잖니. 마나가 잘 안 움직여져서 이 나도 환장할 지경이었단다. 넌 거의 연습도 못 했으면서 전류의 손길을 사용했잖니. 역시 우리는 영혼까지 특별하단다.”

세레라지에가 흡족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찬사 어린 목소리였다.

에릭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로서는 긴 주문과 수인, 시약이 일상이었던 만큼, 수인을 오래 맺어야 하는 상황도 그리 생소하지는 않았습니다.”

세레라지에가 겸손 떨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란다. 선배의 찬사를 받아드리렴. 너 역시 진리의 탐구자잖니?”

마나의 추방자에게 둘러싸이고 강력한 흡음 결계가 쳐진 상황에서 고위급 주문을 두 개나 사용한 마법사의 찬사였다.

마법사라면 황홀경에 빠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수려한 얼굴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약간의 미련과 이게 옳다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아닙니다. 마법사님. 전 마법사가 아니라 의원이고, 변치 않는 정답이나 진리가 아니라 선거철마다 달라지는 해답을 찾는 사람입니다.”

세레라지에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격이 다르잖니. 우리는 특별하단다. 결국 송곳은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고, 독수리 새끼는 닭장에서 살 수 없잖니?”

에릭은 맑은 푸른 눈을 감았다 뜨며,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님께서는 특별해지기 위해 노력하신 끝에 특별해지셨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특별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아니잖니.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마법사라는 업, 궁정 수석이라는 직책은 귀하고 특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슨 업을 타고났고 무슨 직책을 수행하든, 사람 자체는 똑같이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예. 직업에는 귀천이 있어도, 사람에는 귀천이 없지요.”

“…….”

“저는 그 똑같이 귀한 사람들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제국의 황족과 귀족께서는 선을 긋는 사람이시겠지만, 저는 그 선 밖의 사람도 똑같이 귀하게 여겨야 하는 사람입니다.”

세레라지에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너를 선택했다는 거니?”

에릭이 찬란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법사님.”

세레라지에가 서늘하니 물었다.

“거기에 의미가 있니?”

변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사라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인 것에 마음을 줘 봐야, 결국 배신당하지 않는가?

홀로 선 마법사의 물음에, 수많은 사람과 함께 선 의원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법사님. 저도 같이 변하니까요.”

“!”

이번에는 나와 세레라지에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에릭이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도 변합니다. 저 역시 같이 변해야만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내 동생이라면…… 그들이 변하든 말든 그들은 이끌 생각을 하라고 했을 거잖니.”

세레라지에가 약간 망설이며 말했다.

에릭이 동생? 하고 중얼거리더니 나와 세레라지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실례했습니다. 대공 전하.”

“선배라고 불러 줬으면 용서했을 거잖니.”

그녀가 잠시 딴죽을 걸었지만, 에릭은 부드럽게 흘려냈다.

“대공 전하분들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옳으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귀족이 아니라 의원입니다. 날 때부터 하늘에 선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올라온 사람일 뿐이지요. 저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는 몸입니다.”

세레라지에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릭이 세레라지에를 지나치고 내게 다가왔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생각도 없는 절박함이 어려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긴 설명을 마쳤다.

“……헬레나 대공을 잡아둘 명분이 필요했지. 이렇게 하면 브노아가 회군할 줄 알았네.”

에릭이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 많은 사람을 인질로 삼으신 겁니까? 저, 저, 저는 발렌시아누스 대공께서도 인명을 소중히 여겨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수도 사태 당시 수도 시민들을 먹여 살리려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알고 경탄했단 말입니다.”

나는 얼굴에 열 장 철판을 깔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네. 이건 나만의 과제가 아니라. 헬레나 대공도 있었잖은가. 안심하게. 브노아가 더 진군하지 않는다면 헬레나 역시 공격하지 않을 거야.”

“혹시 절 이용해서 공화국의 군과 민을 모두 타격할 생각이십니까? 잠깐, 그럼 헬레나 대공이 지금 숙영지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말씀이군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겠네. 난 거짓말을 싫어하거든.”

에릭이 환장할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금 브노아는 회군을 준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대로라면 헬레나 대공이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을 공격할 테고, 발렌 전하가 보낸 이물들은 공화국 변방을 초토화할 겁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유감이군.”

“으아아악!”

밤이 착실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어느 국경지대 마을이 다 그렇듯, 랑소와 공화국의 아게르 마을도 조용했다.

목장에는 소와 양이 뛰놀고, 강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갔으며, 들판에는 푸릇한 보리싹이 흔들렸고, 마을 청년들은 자경단을 꾸려 고블린을 때려잡고 다녔다.

가끔 오크가 나타날 때마다 한둘이 크게 다치거나 죽기도 했지만, 신고만 하면 오래지 않아 랑소와의 병사들이 와 국경 전체를 순찰해 주었다.

그랬던 아게르 마을은 한참 들떠 있었다.

의회에서 제국을 향한 침공을 결의했고, 총합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차례로 국경지대에 모여들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요?”

“다들 무사히 돌아오면 좋겠는데.”

“제국 기사들은 엄청나게 강하다는데.”

물론 그들이 모두 아게르 마을을 거쳐 간 건 아니었지만, 소수의 정찰대와 주보상인(酒保商人)들만 해도 마을에 활기가 돌기에 충분했다.

전서구를 다루는 병사 한 무리가 아예 마을에 자리를 잡아준 덕에 오크의 위협도 사라졌다.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은 난폭한 용병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에게 패악질을 부리지도 않았다.

아게르 마을은 평화로웠고,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늦은 밤에 갑작스러운 소개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제국 쪽에서 엄청난 수의 이물이 몰려오는 중이다. 당장 마을을 비우고 인근 도시로 향해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나리. 지금은 한겨울입니다.”

“아니. 이 근처에 병사님들이 한가득 있지 않으셨나?”

병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우리도 무슨 일인지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총사령관님이 아직 방어 명령이 아니라 진군 명령을 내리고 있으시단 말이다!”

“!”

그날, 전서응 수십 마리가 밤하늘을 날았다.

어느 전서응들이 그렇듯, 랑소와 공화국의 전서응도 품종 개량으로 야생종보다 강인했고, 다급한 장교들은 전서응에게 신성력까지 불어 넣어주었다.

전서응들은 화살보다 빠르게 바람을 갈랐고, 랑소와의 의원들은 밤중에 난리가 났음을 알게 되었다.

“당장 피난을 준비해라. 일단 돈과 보석만 챙겨.”

제 잇속부터 챙기는 자도 있었고.

“당장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인근 도시에 나눠 수용하고 식량 지원을 준비해. 그리고 브노아 장군에게 이물들을 처리하라고 명령해라.”

의무를 다하는 자도 있었다.

겨울이라 밤이 길었던 게 랑소와의 국민에게는 행운이었다.

의무를 다한 자의 명령은 밤이 가기 전에 전선에 도달했다.

당연하지만 숙영지의 회의용 천막에는 지금껏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 * *

“지금! 당장! 회군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소리 높여 일갈했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그가 총사령관 앞에서 고함칠 수 있던 건, 적잖은 하급 장교들이 이미 회군을 준비하고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우리 조국의 서쪽 국경은 아주 박살이 날 겁니다! 그럼 제국은 공화국이 국민들을 버렸다는 흑색선전을 시작할 테고, 공화주의와 만민 평등의 깃발은 시궁창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도의적인 부분은 굳이 말씀드리지도 않겠습니다. 이해득실로만 생각해도 당장 회군하는 게 옳다는 말입니다.”

“에릭 의원이 배신자니 아니니 하는 소리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지금 국민을 지킬 수 있는 건 우리뿐이란 말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적잖은 하급 장교들이 회군을 준비하고 있는데도 아직 회군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브노아가 적갈색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대들의 의견 잘 들었네.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도록 하지. 지금 우리는 제국 남부와 서부를 완전히 단절시켜 분리하고, 공화국 체제의 강인함을 대륙에 알릴-.”

다니엘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머리 뚜껑이 열린 듯 포효했다.

“총사령관님! 닥치고 회군 명령이나 내리십시오! 지금 시발! 사람이 죽어 가는데 체제의 우월성 이야기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게 우리의 공화국입니까?”

그의 뒤를 이어 장교들이 고함을 토했다.

“혹시 어떤 의원 놈들이 총사령관님을 협박하기라도 했습니까? 전공을 못 세우면 몇 년 뒤에 전역시켜 버리겠다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제가 그 개새끼들을 다 찔러 죽여 버리겠습니다.”

“아니!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뭘!”

브노아는 콧수염을 실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잠시 머리를 식히겠다며 개인 천막으로 향했다.

다니엘과 하급 장교들이 길길이 날뛰었고, 몇몇은 명령서를 위조하겠다며 전서구 담당 장교를 포섭하다 헌병 장교에게 걸렸다.

헌병 장교가 군법대로 처리하겠다는 소리를 꺼냈다가 분노한 사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마구간 여물통에 던져질 무렵, 브노아는 개인 천막 안에서 어떤 가방을 열고 있었다.

그의 억센 손이 덜덜 떨렸고, 가방에서 작은 침이 튀어나와 손을 찔렀다.

피로 주인을 알아보는 마도구 가방이었다.

츠츠츠츠.

가방은 괴물이 입을 벌리듯 열렸다.

천막 안은 촛불 하나 없이 캄캄했지만, 가방이 열린 순간 음산한 푸른 빛으로 가득 찼다.

가방 안에는 쿠이즈 아즈의 파편인 수정 결정을 가공해 만든 마도구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브노아는 마도구에 대고 읍소했다.

방금까지 공화국 체제 어쩌고 했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처절했다.

“이만하면 되지 않으셨습니까? 제발 회군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희 국민이 죽어가고 있단 말입니다!”

“…….”

“시키는 대로 다 했잖습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제, 제 아들을 그렇게 잡아가시고도 부족하십니까?”

우우우웅!

푸른 수정 결정이 은은하게 발광하고, 검은 안개가 수정에서 흘러나왔다.

스으으윽.

안개는 천막 바닥에 두텁게 깔렸고, 서서히 위로 솟아올라 뭉쳐 들었다.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검은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인영이었다.

소매는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손이 보이지 않았고. 얼굴 구멍은 조금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농밀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후드는 탑처럼 꼭대기가 평평했고, 안쪽에 인간의 머리가 들어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높았다.

천막 천장에 후드 끝이 닿아 봉긋하게 올라갈 정도였다.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말했느냐?”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고, 이 세상의 생물이라면 누구나 소스라칠 기운이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브노아는 뭐라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벌벌 떨었다.

강인한 장년 군인의 눈동자가 수축했고, 곧이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바지를 적시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제국에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했으면서, 어찌 시키는 대로 했다는 말이냐?”

“!”

“무고한 자들의 피로 땅을 적시라 말하지 않았느냐?”

브노아는 그날 먼동이 터 올 때까지 진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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