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난 제국의 망나니 대공, 황형 발렌시아누스였다.
침략군을 물리치겠다는 헬레나를 말릴 수도 없고, 회군만이라도 허락해 달라는 에릭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제이릴리스와 광명신 앞에서 적당히 고개를 들 수 있기 위해, 어찌어찌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이물들은 지금도 동쪽으로 향하고 있을 거다.
보급로 확보를 위한 후속 부대가 진격 명령에 항명하고 방어에 나섰다는 보고를 막 들었다.
브노아도 굶어 죽기 싫으면 회군하겠지.
……그럼 이제 조금은 늘어져 있어도 괜찮겠지.
나는 내 천막에 놔둔 화려한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발렌 님. 차를 준비했습니다.”
“차?”
루디가 포도주에 계피, 사과, 포도 등 다양한 향신료를 넣고 끓인 뱅쇼를 가져왔다.
향이 아주 풍성한 게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네. 전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몸에 기운이 나게 해주는 액체니, 분명 차일 겁니다.”
“그래. 맞네.”
루디가 상냥하면서도 장난기 있게 웃으며 큼지막한 주석 잔을 건넸고, 나는 곧바로 한 모금 들이켰다.
따듯한 열기가 가슴 속에 번져 갔다.
내 취향대로 뱅쇼를 한 번 끓인 다음에 독한 포트 포도주를 추가로 넣어서 단맛과 도수까지 더했다.
삶이 절로 즐거워지는 배려였다.
루디가 낭랑히 보고를 올렸다.
“텐티아 경은 기계 기사들과 함께 사냥 대회를 벌이고 있고, 세레라지에 전하는 마커스 후작과 함께 니벨룽겐 안에서 종합공방 운영에 대해 토의하고 있습니다.”
“루디 백작은 어디서 뭐 하고 있어?”
“저는 전하 앞에서 보고를 올리고 있습니다.”
“옆에 앉아서 보고하고 있으라고 해.”
루디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 하나를 가져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헬레나 전하가 발렌 님을 뵙고자 하셨습니다.”
“아. 그래. 지금쯤이면 잔뜩 화나 있겠네. 뱅쇼 한 잔만 더 가져 와 주라. …안정의 물약 한 방울만 넣어서.”
마지막 말은 밖에서 절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했다.
루디가 천막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헬레나가 들어왔다.
시녀 앞에서 그 주군에게 화내지 않겠다는 일말의 배려인지, 아랫사람의 눈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화내겠다는 계산인지는 모르겠다.
“발렌시아누스!”
그녀는 방금까지 투구를 쓰고 있던 듯 금발 머리를 내려 성기게 묶고 있었다.
투구 안쪽에 쓰는 천 모자 때문에 정전기가 발생했는지, 잔머리가 잔뜩 튀어나와 약간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붉은 눈은 석탄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체 왜 그날 새벽에 공격을 허락하지 않은 거지? 애초에 내가 허락받을 필요가 있던가? 나 역시 제이릴리스 폐하께 명령받았다. 제국을 침범한 반역자들을 물리치라고!”
나는 실실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분노였고, 사실 헬레나 말이 맞았다.
“허락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부탁했잖아? 쟤들이 돌아갈 테니까 굳이 공격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고.”
“놈들의 숙영지에서 제국 마을까지는 하루면 간다. 언제 놈들이 우리의 신민들을 공격할지 모른단 말이다.”
“니벨룽겐을 띄우면 놈들 숙영지까지 1시간도 안 걸려서 가. 누나도 지금 본대는 그쪽에 남겨 뒀고, 정찰대 운영하면서 감시하고 있잖아. 이상한 짓 하려 하면 그때는 내 손으로 구워 버릴 거야.”
회귀 전 폐인이었던 날 사람 만들어 준 감사와는 별개로, 피는 덜 흐르면 덜 흐를수록 좋았다.
아무리 은인이라고 해도 미친 투계처럼 싸우고 다니겠다는 걸 용납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나는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미안해 누나. 누나가 기른 병사들이랑 벌이는 첫 전투였을 거고, 다들 기껏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을 텐데, 무산된 거잖아.”
기껏 공격 준비를 마쳐 놓고 돌아가자고 말하는 건 창피한 짓이다.
지휘관만큼 멋이 중요한 자리가 없었다.
헬레나의 체면도 적잖이 깎였을 거다.
물론 이걸 직접 언급하는 건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그래도 아무도 안 다쳐서 다행이야.”
“그걸 다 알면서도……!”
내가 자기 체면을 생각해주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헬레나의 어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는 못을 박듯 말했다.
“군비는 시그나인 옆구리를 찔러서 받아내 줄게. 그리고 폐하께 말해서 개선식도 열어 주고.”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헬레나가 이를 갈았다.
“넌 랑소와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다. 네가 이물을 보내서 랑소와 동부를 휩쓸어 놓고, 내가 보급 끊어진 병사들을 전멸시켰으면, 랑소와는 다시는 고개를 못 들게 되었을 거라고!”
나는 그 미련을 끊어내려 했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 침식자 세력이 무럭무럭 자라났겠지. 알잖아. 걔들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수도 이물 사태도 놈들이 배후라고. 한 놈 한 놈 죽여 봐야 끝이 없어. 우리는 세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해.”
“쯧!”
헬레나가 혀를 찼다.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누나도 알겠지만, 전후 안정이 전쟁보다 더 중요해. 전투에서 이긴다고 전쟁이 끝나는 게 아니잖아. 공화국이면 민병대도 엄청나게 생겨나겠지.”
“그래. 그러겠지. 제국 내 영지전처럼 세금 내는 영주만 바뀌는 게 아니니까.”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면 손도 안 대는 게 낫다고. 심지어 옛것은 시체도 언데드로 되살리잖아. 모든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인 다음에 뼈까지 태워버릴 게 아니면, 침공은 자제하는 게 나아. 그냥. 그런 시대가 됐어.”
그래, 그냥 그런 시대가 되었다.
헬레나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더니, 바싹 당겨 묶어 올렸다.
볕이 닿지 않아 하얀 목덜미에 잔머리가 몇 가닥 빠져나왔다.
그녀가 내가 마시던 뱅쇼 잔을 빼앗아 들이켰다.
“아. 맛있네. 네 시녀 요리도 잘한다.”
“그럼. 당연하지.”
“비법이 뭐야? 나도 우리 조리병들 시키게.”
“알려줘도 못 따라 할걸?”
“그러지 말고.”
“동종업계 3배의 임금을 주고, 백작 작위를 내리고, 수도에 저택을 사줘.”
헬레나가 눈을 부릅떴다.
“그 돈이면 정예병을 백 명은 더 기를 수 있겠다. 그래. 난 못 따라 하겠어. 에이. 앞으로도 비스킷과 염장 고기로 끓인 죽이나 먹고 살아야겠네.”
루디가 천막 반대쪽 문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헬레나가 내 뱅쇼를 마시고 있는 걸 보더니,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발렌 님. 여기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한 모금 마시고 빼앗겨버렸지 뭐야.”
원래 잔과 달리 손잡이 쪽 흠집이 사라진 것을 보니 아예 잔이 바뀐 듯했는데, 과연 처음 잔에 안정의 물약이 몇 방울이나 들어가 있었을지는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을 것이다.
* * *
헬레나가 잔을 거의 다 비우고 물었다.
“그럼 이제 그놈들은 후퇴하는 건가?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거야.”
나는 뱅쇼를 들이켜며 쓰게 웃었다.
무척 달게 끓인 뱅쇼였지만, 끝맛이 썼다.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물이 이대로 서진하면 공화국 동부는 박살이 날 거고, 그럼 보급선도 같이 증발해. 10만 대군은 짐 덩이가 되겠지.”
“만민 평등 좋아하는 공화국이란 놈들이 약탈로 충당하지도 않을 거고. 이래서 명분과 정체성이 무서워.”
“지금 이물을 막고 있는 건 후방 부대하고 보급 부대야. 오래는 못 버티겠지. 걔들도 강력한 성물이나 기도 사용자는 전방에 배치했을 테니까.”
“보급 부대가 옮기던 성수가 떨어지면 끝장이겠어. 그전에는 회군하겠군.”
헬레나가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백발도 금안도 아니었지만, 남은 솔레타라스 황족 중 제일 솔레타라스다운 웃음이었다.
“그래. 발렌시아누스. 네 말대로 칼 한 번 안 휘두르고 이겼네. 이렇게도 엿을 먹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해. 나쁘지 않아.”
나는 막 떠오른 말들을 술과 함께 입 안으로 삼켰다.
“그래. 그렇지.”
‘부차적인’ 피해는 생길 거다.
마을도 많이 불탈 거고, 이 겨울에 얼어 죽는 유민도 많이 생길 거다.
가축을 두고 떠나야 하는 목장주, 보리밭이 불타는 걸 봐야 하는 농부, 배가 불러 가는 아내를 태울 수레를 구하는 남편이 생기겠지.
난 그런 광경을 지난 40년 동안 질리도록 보았다.
병사들에게 화려한 개선식을 열어 주고, 간신히 마약의 범주에 들지 않는 연초를 배급해 주고, 큰돈 써 가며 종군 사제를 대동하고, 틈만 나면 연회를 열어 만취하게 해주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 같은 초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그래도 랑소와 공화국 10만 대군을 다 태워 죽이고, 쏴 죽이고, 찔러 죽인 다음에 양국 간 전면전으로 번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 10만 중 6만 가량이 언데드로 다시 일어나 산 자들을 찾아 배회하는 꼴을 볼 수도 없었다.
제국 신민이 ‘영주의 폭압에서 해방’ 당하고, 영지를 지키던 기사 일가와 향사 일가가 랑소와 병사들의 손에 붙들려 산 채로 불타 죽고, 간신히 탈출한 기사가 거지꼴로 수도에 올라와서 가족의 복수를 청하는 걸 들을 수는 없었다.
눈 돌아간 제이릴리스가 운석을 부르고, 하루아침에 나라 하나가 호수로 변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웃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래. 나쁘지 않아.”
그때 내 천막 문이 왈칵 열렸다.
“급보입니다!”
“경?”
마커스를 따랐다가 이제 내 사병이 된 기계 기사였다.
텐티아 경을 따라 사냥을 하다 왔는지, 평소와 달리 육중한 기계 갑옷이 아니라 평복에 가까운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랑소와 공화국의 부대들이 전방으로 이동 중입니다. 브노아 장군이 지휘하는 최전방의 부대 역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뱅쇼 잔향이 올라왔다.
미치도록 썼다.
* * *
나는 잠시 에릭이 날 배신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날 이용해 시간을 끌고, 그 사이에 국경지대를 통과한 다음, 곧바로 내륙으로 쏟아져 진군할 생각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물론 그걸 작전이라고 세웠다가는 뺨을 맞을 테니, 경악에 찬 내 머리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설명하려 만든 환상이라고 보는 게 맞을 터였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에릭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 천막으로 달려 들어왔다.
“이 반역자가 누구 이름을 불러대?”
헬레나가 사슬 장갑 낀 왼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챘고, 오른손으로 단검을 뽑았다.
“네놈 탓에 반역자 놈들이 국경지대를 거의 다 통과하는 걸 눈 뜨고 봐야 했어! 날 엿 먹인 이상, 네놈은 칼날을 처먹게 될 거다!”
당장이라도 에릭의 목울대를 뚫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목 아래로 흘러내린 금발이 에릭의 금발과 섞였다.
나는 달려나온 마커스와 힘을 합쳐 간신히 헬레나를 말렸다.
세레라지에는 헬레나의 손짓 한 번에 반대쪽 소파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풀려난 에릭에게 의자를 권하며 쓰게 웃었다.
“일이 우리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았군.”
나는 잠시나마 그를 의심한 걸 후회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혼절할 듯 창백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 이, 이럴 리가 없습니다. 의회 내 반전 파벌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다음 선거 때 주전파가 박살 나면 군부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랑소와는 공화국이고, 랑소와의 의회는 우리 수도 의회와 달리 강력한 권한을 가진 통치 기구였다.
이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군부가 자신들을 도우러 오지 않은 사실에 분노할 거다.
그럼 군부와 친한 주전파 대신 반전파를 찍겠지.
그렇게 의회가 반전파로 채워지면, 다음 선거에서 군비가 반토막 날 거다.
따라서 브노아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에릭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헬레나는 머리를 고쳐 묶고, 질긴 천을 여러 겹 겹쳐 만든 갬비슨(Gambeson) 모자를 눌러 쓰고, 화려한 붉은 술이 달린 황궁 투구까지 썼다.
“발렌시아누스.”
투계 같은 미소가 투구 너머로도 보이는 듯했다.
“이제야말로 내가 필요할 듯하네. 이번에는 아무 부탁도 하지 말아 주면 고마울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에릭이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