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욕을 하게 된다.
“세상.”
나는 사람이 아니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도 욕을 하지 않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도 욕을 할 거다.
“세상.”
루디가 날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
허리를 끌어안고 단숨에 힘을 주는 몸놀림이 제법이었다.
“발렌 님! 정신 차리세요!”
“그래. 그래. 정신 차렸어.”
미치겠다.
브노아가 대체 왜 이 사달이 났는데도 후퇴를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인질을 잡혔거나, 협박당하거나, 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도로이센에서는 침식자 놈들이 사람 몸 안에다가 아즈의 파편 결정까지 심어 놨는데, 본거지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랑소와에서 뭘 못하겠는가?
브노아와 대면했을 때, 침식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 사람을 협박하는 방법이 침식만 있던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릿속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좋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나는 버릇처럼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다음, 남은 뱅쇼를 단숨에 비웠다.
“루디. 차 한 잔만 주라.”
“네? 지금요? 그것도 꽤 독하게 만든 건데요?”
“아니. 진짜 차. 에릭 몫까지.”
루디가 조르르 달려 나갔고, 오래지 않아 은쟁반에 차 두 잔을 올려서 돌아왔다.
그윽한 향기와 은은한 열기가 천막 안에 번졌다.
들이마시면 들이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졌다.
사람 살리겠다는 의원에게 해야 할 말들이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조립되었다.
“에릭 의원.”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수려한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대는 할 만큼 했고, 나도 할 만큼 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말을 이었다.
“제국 대공에게 구걸해서 연명한다는 이미지는 그대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장정 10만은 40만 국민의 가족입니다.”
“추격대와 척살대 편성은 막아 주겠다. 후퇴하면 쫓지 않겠다는 약속은 아직도 유효해.”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도록.”
나는 사람 살리겠다는 사람을 매몰차게 밀어냈다.
이게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루디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싸움이라는 게 그렇다.
내가 저놈을 싫어하든 말든, 저놈이 날 싫어하면 싸울 수밖에 없는 거다.
하인 하녀, 시녀 시종, 기사단과 기사단, 영주와 영주, 왕과 왕 간에도 다르지 않다.
랑소와의 장군 브노아는 끝내 내 손을 뿌리쳤다.
이제 난 그 손에 쇠망치를 들고 그놈의 머리를 깨버릴 거다.
그래.
이건 전부 다 그 새끼가 자초한 일이다.
* * *
탁.
그때 에릭이 내 주의를 돌릴 정도의 소리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하.”
파란 눈에는 여전히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누군가는 그걸 열정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그걸 미련이라 불렀다.
“미련을 끊지 못하겠다고 해도 이해한다. 강제로 끌어내지는 않겠어. 머리를 식혀도-.”
“자비를 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구걸하고 있는 듯하다만?”
내 비아냥거림에도 에릭은 개의치 않았다.
천막 발광 구체 아래 빛나는 금발과 음영 진 얼굴 선명한 파란 눈은, 평생 역사( 役事)한 광명교의 성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거래를 청하겠습니다. 전하는 저와 달리 타고난 분이시니, 자존심이 조금 상해도 자리가 날아가지는 않으시겠지요.”
타고난 분이시니, 라고 말했을 때, 세레라지에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게 도박인지 거래인지 확인해야 했다.
“왕공 귀족이 자존심 때문에 100년 전쟁을 벌인다는 걸 모르는가?”
“전하께서는 자존심보다 중하게 여기시기는 게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망나니라는 호칭이 사방에서 튀어나올 리가 없겠지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고, 에릭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술과 도박과 여인에 취한 망나니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국의 대귀족들을 참살하고 다니는 망나니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수도 수복 후 땅을 빼돌린 망나니도 있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돈 빌려준 자한 상인들을 쏴 죽인 망나니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같은 인물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흥미가 동하는 걸 느꼈다.
“확신하는군?”
“랑소와 의원들 사이에서는 흔한 이야기입니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들 지능이 오르락내리락하지요.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사실로 여기느냐니까요.”
도박과 거래.
아무래도 의원에게는 같은 것인가 보다.
에릭이 품속에서 지도를 한 장 꺼냈다.
“그리고 제게 의원 배지를 달아준 사람들은, 국가의 자존심보다 사람 목숨이 귀하다는 게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에는 온갖 광맥의 이름과 예상 채산성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세레라지에가 이채를 띄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동생아. 저 시약은 확실히 귀하잖니. 순도 높은 노천 다이아몬드 광산도 있구나. 희귀 금속도 풍부하잖니.”
“받을만 한 거래라는 거지?”
“당연하잖니. 이렇게 말하기는 뭣하지만, 하나하나를 가지고 전쟁할 만한 광산들이란다.”
에릭이 랑소와가 솔레타라스와 국경을 맞닿은 동북쪽 광산들을 모두 짚어 보였다.
“이쪽 광산 다섯 개의 채굴권을 자한 동맹 상인들을 통해서 넘겨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희귀 금속들의 이름을 입 안에서 하나하나 읊어 보았다.
합금을 만들 때 조금만 넣어도 마나 수용성과 강도가 확 올라가는 금속들이었다.
“조금 더 쓰는 게 어떤가? 어차피 마법이 없으면 채굴하지도 못할 녀석들일 텐데.”
……그런 금속 광산들이 저렇게 많이 남아있는 이유가 있다.
묻힌 곳도 드물지만, 정제 작업이 더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마법으로 분리하지 않을 거면 엄청나게 독한 식초나 양잿물 같은 걸 써야 하는데, 그럼 일대 환경이 박살 난다.
에릭이 입술을 깨물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 위에 몇 개의 광산이 더 짚였다.
“그럼 제가 여기까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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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건 부가 아니라 사람과 지식이네. 랑소와 쪽 주교 세 명, 전투 사제, 연구 사제 각각 일곱 명 이상을 제국에 유학 보내 주게나. 물론 양산한 성물도 몇 개 가져와 줘야겠지.”
에릭이 눈빛으로 내게 욕을 퍼부었다.
“그, 그건…….”
모르기는 몰라도 랑소와 공화국 안에서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거다.
만민 평등의 가치 아래 마법과 마나를 배척한 이상,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은 신성력뿐이니까.
아무리 의원이라도 쉽게 결정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양산형 성물과 그 제조법을 꼭 필요로 했다.
앞으로 벌어질 침식자들과의 싸움에서, 신성력은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었다.
또, 이 정도는 가져가야 제이릴리스가 ‘왜 그들을 살려서 돌려보내 줬냐?’라고 물었을 때 대답할 말이 생긴다.
내 목이 붙어 있어야 부탁을 들어주든 말든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에릭은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의 등을 떠밀어주기로 했다.
“사실 광산이야 우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어. 이 근처 대영주들에게 선제 선전포고 허락을 내려 주면, 굶주린 맹수처럼 달려들어 랑소와를 갈기갈기 찢어 놓겠지. 눈치껏 광산 몇 개를 황실에 헌납할 테고 말이야.”
“아.”
에릭이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요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건 가치가 없지. 잊지 말게나. 우리 솔레타라스에게 랑소와를 비롯한 공화국 세력은 반역자 세력이고, 나 역시 그대들이 나의 황제께 머리를 숙이지 않는 게 불만스러워.”
나의 황제, 라는 말을 들은 에릭이 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늘게 뜬 파란 눈에 묘한 경악의 빛이 어려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내가, 나의 황제께 머리를 숙이지 않는 그대들을 징죄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는가?”
에릭은 이상을 보고 있으나 현실에 발을 딛은 자였다.
“…….”
그는 송곳니를 감추듯 입술을 깨물었고,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해서 좋군. 자. 성직자와 성물들을 내놓게. 그럼 최소한의 피로 랑소와의 아들딸들을 돌려보내 주겠어.”
루디가 즉석에서 양피지로 서류 두 장을 만들었다.
위, 변조 불가능한 고급 잉크와 마법 인장도 함께였다.
“두 분 다 꼼꼼히 읽어 보시고 서명하세요.”
핵심은 세 가지였다.
1. 후퇴하는 랑소와 군을 쫓지 않을 것.
2. 회군이 완료되고 1년 안에 성직자와 성물을 보내 줄 것.
3. 다섯 광산의 채굴권을 넘겨줄 것.
나는 서명과 날인을 남겼고, 그 역시 그렇게 했다.
사실 내게 이깟 종이와 이름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
에릭의 말마따나, 나는 황족이니까.
하지만 에릭은 이 사실이 밝혀지면 치명타를 입는다.
제국에 구걸해 평화를 사 왔노라고 비난할 자는 랑소와에 널렸으니까.
이제 에릭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성물과 성직자들을 보내 주지 않을 일은 없다.
물론 그들은 에릭이 내게 구걸해 평화를 사 오지 않았다면, 내 손에 불타 죽었을 자들이었다.
에릭은 두루마리 첫 번째 조항을 보며 웃고 있었다.
“하.”
나는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착하기는.”
에릭이 발끈하듯 말했다.
“말씀을 왜 그렇게-.”
나는 고개를 슬쩍 저었다.
“나 그런 사람 좋아해. 내가 망나니니까.”
* * *
에릭이 천막을 나서고, 나는 내 사람들을 불러 보았다.
루디, 텐티아 경, 세레라지에, 마커스가 긴 테이블 좌우로 앉았다.
텐티아 경이 핏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전하. 참으로 정의로운 선택을 하셨습니다. 제이릴리스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실지 모르나, 성자 마테오스께서는 분명 칭송하실 겁니다.”
“난 성자님이 아니라 폐하의 칭찬이 필요하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십니까?”
“나도 그게 궁금하잖니? 헬레나는 이미 출발했고, 곧 교전이 벌어질 거란다. 그 멍청한 광신도들을 죄다 후퇴하게 할 방법 같은 게 있니?”
나는 자신감 넘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디가 불안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고, 마커스가 실실 웃었다.
“발렌 님이 저렇게 웃으시면 꼭 이상한 발상을 하세요.”
“저는 알 듯합니다만? 아주 빼어난 발상입니다.”
역시 마커스였다.
나는 천천히 운을 뗐다.
“누나도 경도 조직 생활 해 봤으니까 알겠지만, 사실 상아탑이 어떻다, 백금 기사단이 어떻다, 하고 말하는 건 위험하고 힘든 일이거든. 그 안에서도 사람들 생각이 얼마나 달라?”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끄덕였고, 텐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렇게 어리석은 놈이 어떻게 상아탑에 있니? 하는 의문은 언제나 있었잖니.”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나 하면 딱 좋을 놈도 기수마다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랑 똑같아. 브노아가 미친놈처럼 군다고 해도, 그게 랑소와 공화국 장교진 전체의 생각은 아닐 거거든. 애초에 헬레나 누나가 매복했던 날, 그놈도 회군하지는 않았지만 진군하지도 않았잖아.”
텐티아 경이 말했다.
“장교진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는 거군요. 지금 전하가 보낸 이물들을 막아선 게 후방 부대와 보급 부대라는 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본대에 충성스럽게 따라 붙어줘야 하는 자들이 되려 등을 돌린 거다.
관성적으로 사령부에 복종하는 후방 부대가 이럴 정도면 지휘부는 이미 사분오열되었겠지.
“적진에 침투해서 브노아의 머리를 벨 거다. 놈들은 개개인이 약하고 부대로서 강해. 경과 내가 함께한다면, 주전파 장교들이 기도를 올리기도 전에 죄다 신 옆으로 보내드릴 수 있겠지.”
루디가 입을 쩍 벌렸고, 마커스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흐뭇하니 웃었다.
나는 오만하고 나른하게 몸을 젖혔다.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그다음에 회군 파 장교들이랑 협상해야지.”
텐티아 경이 물었다.
“협상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멋쩍게 답했다.
“그럼 협상하자는 놈이 나올 때까지 죽이면 되지 않을까.”
텐티아 경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전하이십니다.”
욕이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세레라지에가 물었다.
“헬레나에게는 뭐라고 할 생각이니?”
나는 모두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목소리를 낮췄다.
“말 안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