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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멍청한 짓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사람이 멍청해서다.
하지만 조직이 멍청한 짓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게 그나마 제일 덜 멍청한 짓이어서일 때도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후퇴해야 합니다.”
“용혈 황족이 파악된 것만 둘이나 나섰습니다. 궤멸 위험이 너무 커졌습니다.”
“마녀사냥꾼도 거의 전멸했다고 했잖은가? 대체 뭘 믿고 버티는 거지?”
따라서 랑소와 공화국의 장교들은 결론을 내렸다.
“이게 멍청한 짓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그런데 왜 장군님은 모르는 거 같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네 군대는 조직이 아니라 브노아 장군의 사병에 불과하다고.
랑소와의 장교들은 공화국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북서부의 강대국 도로이센과 수백 년에 거친 전쟁을 벌여온 나라의 장교들이었고, 마나 없는 초인을 양성하는 데 성공한 무력 집단이었으며, 전 국민의 초인화라는 원대한 목적을 실천에 옮기는 손발이었다.
신앙, 애국, 박애, 평등의 이상을 신성력으로 바꾼다.
완벽히 성공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이종족의 잔재를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는 계획이었다.
“……혹시 이것도 높으신 분들의 계획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병만을 가지고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시험한다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10만은 너무 많아. 이 많은 젊은이를 죄다 제물로 바칠 셈인가?”
랑소와의 모든 군사 활동은 그 계획을 실천하는 단계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체계적인 계획보다는 막연한 건국 이념에 가까웠다.
‘언젠가는 이종족과 완전히 차별화된 인류만의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힘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계획보다는 희망이나 이상, 국가 정책의 방향성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물이 본국으로 몰려가고 있다는데, 후퇴도 못 하는 장교들의 마음속에서는, 의심의 불씨가 점점 커져만 갔다.
“……선배님. 고대 광명신교에도 번제 문화가 있던 걸 아십니까?”
“야, 야. 입 다물어. 너 너무 나갔다.”
“아들이나 딸, 자신을 바친 제사장들의 이야기는 고대 문헌에 꽤 흔합니다. 당장 경전에도-.”
그들은 제국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지난번에 왔던 기사가 그 유명한 적기사라더군. 솔레타라스에서는 성기사 수십 명과 난투를 벌였다나 봐.”
“그때 밤하늘 붉어진 거 있잖아. 이물을 몰아서 서쪽으로 보냈다는 거. 그거 화염 마법사들을 대거 동원한 게 아니라, 화염술사 한 명이 한 거래. 응. 망나니 황형 발렌시아누스 대공. 검왕 엔시스를 죽였다지.”
“이번에 마녀사냥꾼 애들 엄청나게 죽었잖아. 8할이 증발했다고 하더라고. 아니. 마녀사냥꾼에 둘러싸이고, 흡음 결계까지 쳤는데, 마법을 쓸 수 있던 마법사가 있다고 하더라고. 평야에서 회전을 벌이면 재앙 아니냐?”
“사실 우리 공화국이 평균적으로 강하고, 적들이 초인 몇 명을 데려오는 게 일반적이었기는 해. 쟤들 일반병하고 우리 병사들하고 싸우면 우리 병사들이 가지고 노니까. 그런데 쟤들은 점점 일반병을 안 데리고 오잖아.”
하급 장교들은 공화국 동부가 위험한 이 상황에 군대가 후퇴하지 않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이미 불만은 쌓일 만큼 쌓였다.
“왜? 아니 진짜 왜? 사람 살리겠다고 세운 공화국 아닌가?”
“제국 공격하자고 우리 땅이 초토화되는 걸 보고 있으라고?”
“우리 부모님도 동부에 사는데.”
그들은 후방 부대에 위조된 명령서를 보냈고, 후방 부대가 전선에 합류하는 대신 이물을 막게 했다.
그걸 헌병 장교들이 알아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명령 위조, 하극상, 전서구의 사적 이용.
모두 군법에 따라 사형까지 받을 수 있는 중죄였다.
“쳐!”
“조져!”
“이 개 같은 새끼들.”
물론 하급 장교들은 순순히 끌려가 주는 대신,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헌병들을 두들겨 패 마구간 여물통에 던졌다.
이미 불만은 쌓일 만큼 쌓였다.
이제 불만에 더해 두려움까지 쌓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중대한 순간, 고위 장교들은 말다툼이나 벌이고 있었다.
“브노아 장군님! 백번 양보해서 침공 자체는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유격전이 아니라 전면전을 고집하시는 겁니까?”
“제국의 마법사와 기사들은 수가 적고 개개인이 강하며, 우리 병사들은 수가 많지만, 개개인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피가 강처럼 흐를 겁니다!”
“산개해야지요! 당연히 산개해야지요. 수적 우위를 살려야 합니다. 일단 각 마을을 점령하고,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전파하고, 모병을 통해 세를 불린 다음 대도시를 노리는 게 공화국 전술의 정석 아닙니까!”
“우리의 승리는 제국 기사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핍박받는 농노들을 해방하는 게 아닙니까? 기사들의 유격전에 보급로가 막히는 걸 걱정한다는 말은 마십시오! 도로이센에서 보셨잖습니까? 후방의 영지가 위협받으면 기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다툼’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한쪽이 명백히 맞는 말을 하고 있었고, 반대쪽은 속된 말로 ‘뻐기고’ 있었으니까.
브노아가 회의 천막이 울리도록 포효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나!”
장교들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고 신음했다.
브노아가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지금 우리 공화국에 필요한 건,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승리일세! 무려 10만 대군을 동원하지 않았나?”
결국 장교 중 참지 못한 자가 나왔다.
다니엘이 악을 쓰듯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 장군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적군의 궤멸이 아니라 적군의 와해라고 몇 번을 말하고 있잖습니까! 평야 회전을 통한 상징적인 승리? 그게 자유, 평등, 박애 정신과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다니엘!”
“하고 싶은 말 다 하겠습니다. 대체 왜 회의 중에 두 시간에 한 번꼴로 장군님 천막에 가서 10분쯤 있다가 나오는 겁니까? 거기 애인이나 약이라도 숨겨 놓으셨습니까?”
피가 쏠려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 제국 유격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십니까? 용혈 황족이 끌고 온 비공정 대책은 세우셨습니까? 며칠 전에 소식이 끊어진 정찰대들의 상황은 파악하고 계십니까? 저희가 뭘 하려고 하면 왜 다 안 된다고만 하십니까!”
다니엘의 말은 이 상황에 백번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브노아는 다니엘이 모르는 상황을 알고 있었고, 다니엘과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금 네놈이 감히 지휘관의 명령에 토를 달아!”
그는 그들이 피를 원한다는 걸 알았다.
그들도 대륙 최강국인 제국을 가장 경계했지만, 신실하기로는 첫째인 공화국도 몹시 경계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제국의 피를 보지 못하면, 그만큼 공화국이 피를 보게 되리라.
자신이 제국 신민 10만을 죽이지 못하면, 그들은 공화국 신민 10만을 죽여 손해를 메꾸려 들 터였다.
또한 브노아는 10만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인 동시에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고.
진실을 아는 자의 책임감에 더해진 아버지의 부성은, 주변인들이 환장할 시너지를 일으켰다.
“이 막돼먹은 자를 당장 가두어라!”
병사들이 들이닥쳐 다니엘을 끌고 나갔다.
브노아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제 천막으로 향하는 가운데, 고급 장교들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 * *
“이번에야말로!”
헬레나는 사흘을 굶다 만찬 앞에서 세 번쯤 제지당한 병사처럼, 수도 제일의 인기를 자랑하는 뮤지컬 배우와 만날 기회를 잡은 아카데미 생도처럼, 백한 번째 실험에 도전하는 상아탑 마법사처럼 외쳤다.
황동 갑옷은 전쟁 신의 하사품처럼 빛났고, 거대한 곡도에 새겨놓은 주술 회로는 피를 기다리며 사납게 울었다.
저 아래 반달 호수 너머 랑소와 군의 숙영지가 보였다.
병사들은 이동 준비를 마치고 있었지만, 장교들은 여기저기 허우적거리며 배회했다.
헬레나는 경험적으로 저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회군이든 진격이든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날 거다. 어디든 가기는 할 거야. 그런데 어디로 갈지는 안 정해졌다. 개개인은 이동 준비가 되었지만, 군대는 이동할 준비가 안 되었어.’
‘기습하기에 딱 좋다. 지금 마법을 퍼부으면 대열은 와해될 거고, 와해된 대열을 기병으로 들이받으면 완전히 무너질 거야.’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헬레나는 투구 너머에서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너무 설레서 현실이 아닌 듯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 뛰었다.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서는 배우가 이런 심정일까?
이제 명령 한 마디면 모든 게 시작되었다.
그녀가 지금껏 해온 훈련, 병사들과 함께 흘린 피, 땀, 눈물.
‘아카데미 깡패들과 취업 못한 졸업생들. 제 잘난 맛에 살던 놈들을 군대로 만들어야 했지.’
그게 얼마나 값진 일이었는지 확인해 볼 순간이었다.
헬레나는 호수 너머 보이는 보초병과 정찰병들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에게 저들은 신경 쓰지 말고 본대를 공격하라 일러라. 전투가 시작된 후에 저들은 아무것도 아니-.”
그녀는 말하던 중 말을 끊었고, 전령은 몹시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헬레나는 언제나 정확한 명령을 내려 주던 지휘관이었다.
그러던 헬레나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투구까지 벗고 미간을 찌푸렸다.
불꽃을 품은 눈동자가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저게 무슨-.”
막 보초병 하나의 머리가 더 날아갔다.
붉은 액체와 하얀 액체가 집어던진 수박처럼 튀었다.
각도상 뭔가를 호수를 가로질러 쏜 게 확실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마법사들에게 발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헬레나는 반사적으로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발렌시아누스. 이 망나니가.”
* * *
‘이 마도구 진짜 편하네요.’
루디는 호수가 아름드리나무 위에 앉아서 상하쌍대 마총 카스파의 방아쇠를 당겼다.
쇄애액!
한 발이 쏘아져 나갈 때마다 병사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세레라지에 전하 덕분이에요. 반투명화 액체 갑옷이라니요.’
쇄애액!
그녀의 시녀복에는 ‘흐릿함’ 주술 회로가 새겨진 아콰테그가 먹여져 있었고, 그녀는 랑소와 공화국 정찰병과 헬레나 휘하 정찰병들을 모두 손쉽게 피해서 그곳까지 들어왔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화려한 손놀림으로 장전을 마쳤고, 또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쇄애액!
녹색 눈과 대비되는 붉은 안광이 사점 안경알 위로 어른거렸다.
지금 그녀가 낀 사점 안경은 마커스가 만들었는데 ‘시야 확장’ ‘열 감지’ 약간의 ‘투시’ 같은 주문이 새겨져 있어서, 명중률을 몇 배로 올려 주었다.
‘게다가 발렌 님은 또 이런 걸 구해 주셨어요.’
루디의 목에는 은으로 마감한 뿔피리가 걸려 있었다.
일정 반경에 흡음 결계를 치는 성물이었다.
루디는 성직자가 아니었기에 넓은 범위에 칠 수는 없었지만, 결계 반경이 앞으로 겨눈 마총보다만 넓으면 아무 상관 없었다.
발포음만 숨길 수 있으면 그만이었으니까.
쇄애액!
퍽!
마지막 보초병의 머리가 썩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루디는 사점 안경테를 중지로 밀어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이제 지원 사격해드려야겠네요. 포복 전진이라도 해서 다가갈까요? 하지만 그럼 위험하게 군다고 싫어하실 듯한데…….’
‘그래도 발렌 님을 그 험지에 홀로 들여보낼 수는 없지요. 물론 기사님이 함께하지만…… 저도 걱정되는걸요.’
용혈 흐르는 황족을 걱정하는 건 호위 기사와 시녀의 특권이었다.
‘이 세상에서 앞머리 내린 벨 님을 기억하는 건 저뿐이니까요.’
루디는 해맑게 웃으며 나무에서 뛰어 내렸다.
타앗!
아름드리나무는 4층 높이에 달했지만, 그녀의 착지 지점에는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가히 초인적인 기예였다.
그녀는 카스파를 등에 메고, 6연발식 리볼버 마총 아가테와 샌드웜 이빨 단검을 빼 들고서, 수풀 사이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