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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소와 공화국은 수백 개의 정찰조를 운영했다.
따라서 숙영지 목책 정문 앞을 지키고 선 병사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고민할 때가 많았다.
“아으. 날씨도 추운데 이런 데 서서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참아. 그래도 우리는 우리끼리 쓸 화로 하나 있잖아.”
“화로가 있으면 뭐 하냐. 장작 주워 올 시간도 안 주는데.”
때는 볕 좋은 대낮이었다.
붙임성 좋은 들고양이 몇 마리가 숙영지 안에 들어와 야옹거리다 마음씨 좋은 조리병에게 생선 대가리를 받은 뒤 그의 발치에서 머리를 비벼대고, 선임 병사는 기도를 올리다 꾸벅꾸벅 졸며, 담당 장교도 어디 가서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병사도 슬슬 창을 내려놓고 기도나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동료는 이미 창을 벽에 기대 놓고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있었다.
병사 역시 눈을 감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들판을 휩쓸고 호수에 물결을 일으켰다.
그래서 병사는 구둣발 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누군가의 출현을 알아차렸다.
“추, 충성! 어? 어어?!”
“내게 충성하겠다? 나쁘지 않군.”
그는 병사가 언젠가 보았던 솔레타라스 황족들의 초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사내였다.
하얀 머리카락은 볕을 받아 반투명하게 달아올라 반짝반짝 빛났고, 콧대가 높고 턱선이 날카로웠으며, 노란 눈동자는 그 점잔 떠는 제복과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야성적이었다.
병사 역시 어른들에게, 교회 성직자들에게, 훈련소 교관들에게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어 알고 있었다.
솔레타라스 제국의 귀족과 황족들은 모두 사악한 이종족과 몸을 섞어 만들어진 괴물들이고, 우리는 그런 괴물들을 몰아내고 진정한 인류의 세상을 만들어낼 의무가 있다고.
병사는 그제야 어른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했다.
저 붉은 입술과 우묵한 눈, 약간 뾰족한 귀와 긴 손가락,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얼굴, 그리고 문자의 나열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위엄과 매력.
그가 두르고 나타난 분위기와 가장 흡사한 걸 고르라면, 호랑이나 사자, 표범처럼 맹수를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이었다.
나쁘지 않군, 하는 목소리가 병사의 귓가에 울렸다.
저걸 가지고 싶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저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다, 충성을 바치고 싶다.
강자의 호의만큼 치명적인 건 없었다.
랑소와의 건국자들은 그것을 이겨내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히 누군가의 노예로 살게 되리라 예견했고, 천년 후의 후손은 그제야 그것을 거절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다.
병사는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오! 주여.”
* * *
발렌시아누스가 하얗고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유쾌하게 웃었다.
“브노아 장군은 안에 있겠지? 아직 회군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고.”
병사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명령받은 대로 숙영지 입구를 막아섰다.
발렌시아누스는 옅게 웃으며 검은 장갑 낀 손을 내저었다.
염동력이 발현되고, 긴 창대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쩍!
보이지 않은 손에 잡힌 창대는 병사의 마지막 투지와 함께 으스러졌고, 망나니 대공은 유유한 걸음걸이로 숙영지 안으로 들어섰다.
“어, 어?”
“미친! 여기 왜-?”
“바, 발렌시아누스다!”
무수한 의문과 경계 어린 목소리가 울렸고, 그제야 두 보초병은 정신을 차렸다.
‘발렌시아누스 대공은 강력한 요술쟁이다.’
‘혼자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검왕 엔시스를 죽였다고 했어.’
“잡아라!”
“비상이다!”
“오! 광명이시여!”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자기 자신에게 기초적인 축복을 내리며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역사할 힘을 주소서!”
몸에 은은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고, 병사들의 눈빛에 열기가 어렸다.
힘과 반사 신경을 조금씩 올려 주는 하급 기도였다.
발렌시아누스는 거칠 것 하나 없다는 듯 낭랑하게 웃었다.
“아- 하하하하!”
그 웃음소리만으로도 주변 병사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괴로워했다.
“머, 머리가-.”
망나니 대공의 손아귀 안에서 뱀 같은 불길이 피어오르더니, ‘불의 창’ 두 발이 되어 날았다.
쐐애애액!
한 발은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솟았고, 한 발은 포물선을 그리며 짐마차 행렬을 덮쳤다.
펑!
불길이 파문을 그리며 번지고, 짐마차 몇 대가 삼켜졌으며, 그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물 가져와!”
“식량 수레다! 저거 없으면 우리 진군도 후퇴도 못 해.”
“일단 멀쩡한 것들부터 밖으로 빼라!”
병사들이 짐말을 끌고 가 멀쩡한 짐마차를 끌어냈다.
발렌시아누스는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불의 창을 쏜 건 우발적이고 감정적인 공격이 아니라, 파괴 범위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랑소와 군의 이동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한 책략이었다.
‘뭐가 있을지 모르는 제국령 안쪽으로 전진하기는 부담스러운 양이지만, 일단 아껴 먹으면 본국으로 돌아갈 정도는 되리라고 생각할 만큼만 남겼지. 역시 나야.’
그는 흑루를 뽑아 들고 불길을 장막처럼 일으키며 숙영지 입구 주변을 거닐었다.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그는 40년간 싸움꾼으로 살며 전장의 호흡은 익혔다.
기습당했을 때 최정예 주력 부대가 기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분 30초였고, 1분 30초면 발렌시아누스가 적어도 3백 명은 잿가루로 만들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그는 그동안 병사들을 도륙하는 대신, 곳곳의 건초와 보급품 저장 천막에 불의 창을 날려댔다.
“저쪽이다!”
“준비해!”
“성물 있는대로 가져와!”
아마도 성수를 보관하고 있었을 천막이 폭발하고, 깨진 유리병 조각이 날아와 발렌시아누스의 잘생긴 이마를 치고, 병사들이 임시방편으로 올린 하급 기도로는 불길 속에 뛰어들 수 없다는 걸 파악할 무렵.
장교들이 날개 달린 철봉을 쥐고 달려 나왔다.
“주여! 그대의 아들딸들을 위협하는 적을 벨 힘을 주소서!”
그들이 기도하며 날개 달린 철봉을 바닥에 꽂자, 찬란한 신성력이 넓은 파문을 그리며 퍼져 일대의 병사들에게 스며들었다.
“가자!”
“3인 1조!”
“너희는 원거리 기도 부대를 호위해!”
큰 방패와 검을 든 정예병 백수십 명이 달려 나왔고, 천 옷을 입은 정예병들이 고리 십자가가 달린 지팡이를 치켜들고 신성한 열선을 쏘아냈다.
‘성기사와 전투 사제, 기사와 마법사에 그대로 대응하는 포지션이다. 물론 질은 약간 떨어지겠지만, 유지비가 낮고, 육성은 훨씬 쉽겠지.’
발렌시아누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흑루를 늘어트렸다.
“상대해주마.”
말과 달리 되려 검을 내리는 모양새에,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내가 말고.”
번쩍!
다음 순간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내렸고.
쾅!
기계 갑옷을 입은 적기사가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를 파도처럼 일으키며 달려 나왔다.
* * *
“텐티아 경. 길을 뚫어 주게. 세레라지에 누나. 일반병들을 제압해줘. 그리고 루디. ……왜 여기 있는지는 안 물을게.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장교들 위주로, 죽지만 않을 정도로, 알지?”
나는 셋에게 뒤를 부탁하고, 브노아가 있을 큰 천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막아라!”
“장군님을 지켜야 한다!”
“앞으로 창!”
척!
랑소와의 일반 병사들이 큰 사각 방패와 창을 겨누며 방진을 이뤘다.
마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찌르는 창이야 눈꺼풀로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창은 신성력으로 인해 하얗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돌진하는 대신 세레라지에 앞을 슬쩍 몸으로 막아서며, 그녀가 주문을 완성하기를 기다렸다.
“그런 배려 필요 없잖니.”
“해줄 때 받아. 저거 맞으면 많이 아프다고. 뼛속까지 뜨겁고 시리다니까.”
“어머나. 너는 뼛속까지 사악해서 그렇고, 나 같이 순수한 마법사에게는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단다. 사실 난 맞을 생각도 없잖니.”
“그래. 마신의 검은색도 순수한 색이기는 하지.”
“참 듣는 사람 기분 좋게 말하잖니!”
세레라지에가 눈을 흘겨 보이더니, 지팡이를 땅에 내리쳤다.
땅!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으로 그녀의 남색 머리카락이 우수수 치솟았다 떨어지고, 반투명한 푸른 알갱이가 파문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우우우웅!
퍼진 알갱이들은 그대로 랑소와 병사들의 무기에 달라붙었고, 알갱이 붙은 무기는 곧이어 붕 떠올라 백여m 뒤로 날아갔다.
“이게 무슨?”
“자, 잡아!”
“밀리지 마라!”
“이, 이쪽은 당기고 있습니다!”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은 병장기를 놓치거나, 병장기를 쥔 채로 바닥을 굴렀다.
‘자기 역장’의 자기력을 척력으로 이용한 주문이었다.
웅장한 성벽 같던 방패 진이 마법 한 번에 궤멸되었다.
“어, 어?”
“잠깐만, 아. 망할.”
“조졌다.”
무기를 놓친 병사들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조소를 날려 주고, 턱을 한 번씩 걷어차 기절시켰다.
“악!”
“윽!”
“캑!”
이건 패악질이 아니라, 나중에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하기만 했냐는 비난을 피하게 해주기 위한 상냥한 배려였다.
“이 비겁한 놈! 무기도 없는 병사들을 노리다니!”
물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자유가 있었다.
신성력 타오르는 검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 보병대가 나를 막아섰다.
기사와 성기사에 대응하는 랑소와의 고급 전력일 게 분명했다.
신성력은 축복이 중첩되기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했다.
따라서 나는 직접 드잡이질을 벌이는 대신, 나의 충성스러운 기사를 부를 자유를 행사하기로 했다.
“먼저 국경을 넘어온 놈들이 누구에게 비겁을 논해? 웃기지도 않구나! 텐티아 경. 오늘 이들에게 기사도를 알려 주게!”
쿵! 쿵! 쿵! 쿵!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기계 갑옷을 입은 텐티아 경이 달려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라 한다!”
치이이익!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등에서 증기가 피어올랐고, 판금 장갑 아래 강철 섬유가 근육처럼 수축했다.
“너희 반역자들을 모두 주 곁으로 보내 주마!”
“주여!”
같은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텐티아 경과 랑소와 중장보병 대장이 충돌했다.
신성력 두른 검은 성검처럼 환하게 타올랐고, 텐티아 경의 대검은 마왕을 지키는 사천왕의 검처럼 붉게 일렁였다.
랑소와 중장보병 대장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베어 올라갔고, 텐티아 경의 검이 맹렬한 직선을 그리며 베어 내려갔다.
쾅!
점과 점에서 적색광과 백색광이 충돌하고, 랑소와 중장보병 대장이 걷어찬 공처럼 뒤로 날아갔다.
중장 보병대 병사들이 일제히 경악하고, 텐티아 경이 검을 쳐들며 그들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늘 너희 반역자들에게 기사의 명예와 충성에 대해 알려 줄 테니, 감사히 배우도록 해라!”
“닥쳐라! 이종족 피가 섞인 노예야!”
“대를 이은 헌신이야말로 최고의 영광일지어다!”
츠카아아악-!
철과 철이 부딪치고 사람이 하늘을 날았다.
나는 그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뭣들 하고 있느냐! 왜 고작 3명을 못 잡고 있어!”
저 앞, 큰 천막 옆에 꽤 높아 보이는 장교가 있었다.
그는 아주아주 바빠 보였는데, 기도하기, 말하기, 듣기, 듣고 말하기까지 네 가지 일을 동시에 했다.
그는 왼손으로 날개로 장식된 기둥을 잡고 기도를 올렸다.
기둥의 날개는 신성력으로 달아올라 하얗게 빛나며, 숙영지 전체에 신성력을 퍼트렸다.
“마녀사냥꾼은?”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부대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일단 적절한 위치로 보내 거리를 유지한 채로 저들의 마나 사용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상황이란 말이냐?”
“축복부대장님! 중장 보병대가 추가적인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런 망할! 어떻게든 해보겠다!”
입과 귀가 모두 따로 노는 모습을 보니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최고 지휘관이 최고의 전력을 겸하기에 생기는 문제는, 랑소와라고 다를 게 없는 듯했다.
“저, 전방에 발렌시아누스 대공 출현!”
“몇m 앞이냐?”
나는 두리번거리는 장교를 향해 외쳤다.
“바로 앞이다!”
장교가 눈을 부릅떴고, 뭐라 말하려 했다.
“이…….”
나는 그의 뒤에서 루디의 그림자가 솟아오르는 걸 보고 비릿하게 웃었다.
아쉽게 되었네.
뭐라고 할지 궁금했는데.
푸푸푹!
루디가 한 손으로 장교의 입을 틀어막는 동시에, 샌드웜 이빨 단검으로 장교의 왼손 팔꿈치와 옆구리 몇 군데를 깊게 찔렀다.
생명에 큰 지장 없고, 치유 기도로 쉽게 회복되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급소였다.
“헉!”
“어어?”
눈앞에서 상관이 쓰러진 걸 본 병사들과 전령들이 기겁했다.
루디는 그들을 향해 카스파의 총구를 겨누었다.
“빵야!”
퍼어어엉!
제압용으로 개량한 산탄 마탄이 뿜어져 나가고, 병사와 전령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튕겨 나갔다.
……워낙 탄이 작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다.
……아마도.
나는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브노아를 찾아 눈을 돌렸다.
적갈색 구레나룻이 화려한 천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실소하며 몸을 날렸다.
“이 상황에 지휘관이 숙소에나 틀어박혀 있으려는 거냐!”
놈의 어깨를 잡아채 몸을 돌린 다음, 뺨을 힘껏 후려쳤다.
짝!
“어?”
다른 사람이었다.
“아이 씨!”
짝!
짜증 나서 한 대 더 후려쳤다.
그때 천막 문이 열리고, 진짜 브노아가 나왔다.
놈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