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장군, 반갑군.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영광이군!”
나는 환하게 웃으며 브노아에게 인사했다.
“내 마음을 담아 선물을 조금 가져왔는데, 마음에 드는가?”
번쩍!
막 등 뒤에서 번개가 떨어졌다.
“구걸한 힘으로 진리의 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니!”
세레라지에가 앙칼진 호통을 내질렀고.
츠카아악-!
“내 평생 검과 충성을 위하여!”
텐티아 경이 대검을 휘둘렀으며.
푸푸푹! 푸푹!
“발렌 님의 발목을 잡으려는 못된 손은 힘줄을 잘라버릴 거예요!”
루디가 이 천막 저 천막 사이로 몸을 날리며 내 쪽으로 달려오는 병사들을 덮쳤다.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선물이 아닌가 싶었다.
브노아가 황망한 표정으로 나와 내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적잖게 감격한 모양이군? 감사 인사는 없는가? 사양할 생각 없는데. 그래. 회군 정도면 적당하겠어.”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래…… 엔시스도 이렇게 당했겠어.”
브노아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일어나면 좋은 일과 일어날 듯한 일을 구분하지 못했고, 나만큼은 몰락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 세상을 나 좋은 쪽으로만 해석했던 거야.”
“잘 알고 있네. 여기서 더 실수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브노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처음부터 네놈과는 얼굴을 맞댔으면 안 되었어.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목에 걸린 원 십자가를 쥐려 했다.
상당히 강력한 성물일 게 분명했다.
물론 브노아가 그걸 사용하도록 놔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네놈이라니?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라 불러라!”
우우우웅!
검은 마도구 장갑,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힘을 행사했고, 브노아의 손이 십자가 앞에서 딱 멈췄다.
나는 왼손을 가볍게 휘둘러 그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익!”
브노아의 큰 몸이 붕 떠올라 쭉 끌려왔고, 나는 오른손을 쳐들어 그의 뺨을 쳤다.
짝!
그의 얼굴이 수염과 같은 색으로 달아올랐고, 나는 그대로 그를 떠밀어 풀밭에 엉덩방아를 찧게 했다.
쿵.
훈장을 주렁주렁 단 중년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용기라지. 지금 네게 필요한 용기는 어떻게든 병사들을 살려서 돌아갈 용기다.”
“…….”
“이렇게 된 이상 비밀 하나 알려 주지. 난 가능하면 운석 없이, 폐하의 친정 없이 제국이 세계를 제패하도록 할 생각이다. 우리 인간끼리 반목하면 적들의 세만 불려주는 꼴이거든.”
“!”
브노아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러니까, 하고 운을 떼며, 난 말을 이었다.
“수천씩 산개해서 내륙으로 침투하고, 각 거점 도시를 점령하는 식으로 공격해왔다면,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몰라. 도시화를 통한 인구 밀집은 너희 쪽이 조금 더 진행되었고, 징집도 너희 쪽이 더 빠르거든. 대군을 굴리는 능력도 좋고.”
당장 황실도 10만 대군을 굴리지는 못한다.
물론 제국 대영주들은 10만 대군 대신 3천 명을 상대할 수 있는 기사 30명을 키우는 쪽으로 발전해온 거지만, 어쨌건 랑소와 공화국 군대는 양적인 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장점이 있는데 정면승부를 걸어와? 우리 넷도 못 이기면서 무슨 정면승부야? 이 숙영지는 당장 내 말 한마디면 다 불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브노아가 이를 악물고 몸을 떨었다.
핏발 선 눈에 나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울분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걸 이해해주는 대신, 하얀 구둣발로 놈의 갈비뼈 사이를 걷어찼다.
퍽!
“알고 있었겠지. 알면 행해야지! 알아. 많은 사람이 뭘 해야 하는지 알고도 하지 않지.”
검술을 단련해서 소드 유저만 되어도 출세할 수 있고, 열심히 공부하면 황실 행정관이 되어 출세할 수 있고, 열심히 이를 닦아야 교회 치유 사제나 혈마법사에게 지갑을 다 털릴 일이 없고, 침식을 택하면 모든 걸 잃는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는 달라야지. 지킬 게 있는 사람들이니까.”
* * *
나는 브노아를 자근자근 짓밟기 시작했다.
“아악! 악!”
흠씬 두들겨 맞은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는 놈들이 있었다.
죽일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지휘관 업무는 수행할 수 없는 꼴로 만들어 놔야, 회군하자는 장교가 지휘권을 넘겨받을 수 있을 테고.
놈이 몸을 둥그렇게 말며 소리쳤다.
질끈 감은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랑소와 장교들은 휘하 병력을 가지고 각개전투로 이행하라! 병력을 온존해야 한다!”
“이미 늦었다. 이 멍청한 놈아! 식량도 없는 군대가 각개전투는 무슨-.”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발길질을 멈췄다.
무언가 대단한 걸 포기한 듯한 목소리였다.
단순히 늦은 명령에 따른 후회가 아니었다.
문득 어디선가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
놈이 나왔던 천막 안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게 언 듯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고, 그걸 눈치채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물러섰다고?
아즈를 흡수하기 전에도 1km짜리 이물을 태워버렸던 내가?
챙!
나는 곧바로 흑루를 뽑았다.
“나와라. 추악한 것아.”
스으으윽!
천막 입구가 갈라지며 열렸고,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그 순간, 이 숙영지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저, 저게 뭡니까?”
“오, 광명이시여.”
“세상에.”
미친 듯 고함치며 싸우던 텐티아 경과 중장 보병대가 동시에 천천히 검을 늘어뜨리는 모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바람처럼 달리던 루디 역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입술을 깨물고 몸을 떨었다.
나는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놈을 바라보았다.
“…….”
놈은 적어도 2m는 넘어 보였고, 약간 마른 체형이었으나, 키가 있다 보니 체구도 상당했다.
치렁치렁한 검은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재질은 알 수 없었지만 아주 두툼하고 위엄차 보였다.
수상한 놈답게 후드를 덮어썼고, 그 후드는 머리 위쪽이 평평하고 탑처럼 높게 솟아 있었다.
손도 신발도 얼굴도 보이지 않았는데, 특히 얼굴 구멍은 내 눈에도 아무것도 없는 어둠으로만 보였다.
“브노아.”
놈이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가 울려서,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브노아가 놈을 바라보며 벌벌 떨었다.
몸이 완전히 굳어 도망치지도 못하는 듯했다.
“끝까지 날 실망하게 하는군.”
놈이 브노아를 바라보았다.
눈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놈이 브노아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브노아가 구걸하듯, 아니. 구걸했다.
“……대주교시여-.”
그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온몸에서 검은 깃털이 끓어오르듯 돋아나기 시작했다.
팍, 파바바박!
생살을 뚫고 깃털이 솟아오르는 모습은 악몽에나 나올 듯했다.
그의 살이 점점 사라지고, 이빨이 길게 자라나 앞으로 튀어나오며 입술과 녹아들어 하얀 뼈 부리가 되었다.
랑소와 공화국의 장군이자 10만 병력을 이끌던 사내가, 부리 단 깃털 뭉치가 되기까지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저 검은 깃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첸베르사.”
평생을 수련한 수도 사제들을 침식시키고, 수도원 안까지 들어와 성물을 챙겨 달아난 침식자 역시, 검은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헬레나의 첫 출진이자, 텐티아 경이 아버지와 화해했던 계기가 된, 중부 그린스킨 토벌 때도 저 깃털을 단 침식자 놈들이 튀어나왔다.
저놈이야말로 제국을 위협하는 거대한 침식 교단의 핵심이 분명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천천히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이런 고위급 침식자 앞에서는 절대로 겁먹은 티를 내면 안 되었다.
행동을 이용해 마음을 속박하고, 그렇게 두려움 어린 마음을 말 한두 마디로 파고들어 오기 때문이었다.
“대주교라고 했었나?”
놈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찰나, 놈의 등을 향해 쇠뇌 화살 한 발이 날아왔다.
쐐애애액!
쇠뇌 화살은 대낮에도 보일 만큼 환한 신성력으로 빛나고 있었다.
푹!
화살이 놈의 거구에 틀어박히고, 지글지글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약간 피어올랐다.
“침식자와 요술쟁이들을 죽인다.”
* * *
일대의 마나가 얼어붙는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끈적한 풀 속에 빠진 듯 숨쉬기도 답답했다.
사방에서 흑백 로브를 입고 철가면을 쓴 마녀사냥꾼이 걸어 나왔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그대는 간악한 요술쟁이지만, 침식자가 먼저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탁, 타악!
적어도 50명은 될 마녀사냥꾼이 대주교라 불렸던 침식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손아귀마다 따듯하면서도 시린 신성력을 뿜는 무기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대주교는 같잖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마나의 추방자들인가?”
사아아아-.
놈의 예복 밑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얕게 깔린 안개가 순식간에 강처럼 흘렸다.
마치 범람한 검은 물결이 초원을 삼키는 듯했다.
“참으로 우둔하구나.”
대주교가 랑소와 군대의 숙영지 전체를 굽어보며 말했다.
“누가 너희를 창조했는지도 모르면서.”
나와 세레라지에, 텐티아 경, 루디까지 모두 손속을 아꼈지만, 교전 중에 사상자가 나오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죽은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과 심하게 다친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이 시작이었다.
사방에서 당혹감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오! 광명이시여!”
“잘라내 버려!”
“기도를!”
파바바박!
그들의 상처 부위에서부터 검은 깃털이 돋아 나왔다.
신성력 어린 칼로 그 부위를 빠르게 잘라 버린 자들은 무사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자는 온몸에서 깃털을 뿜으며 침식자로 돌변했다.
“성수 가져와!”
“빛이 바라노니!”
“공화국의 적이 저기 있다.”
물론 랑소와의 장교들은 순순히 당해 주지 않았다.
성수를 부어 깃털을 태우고 침식 속도를 누그러트렸으며, 날개 기둥 성물을 쥐고 기도를 올려 일대의 병사들을 강화했고, 명백한 적과 싸우기 위한 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모든 건 아군이 아군으로 기능할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푹!
“켈켈켈켈!”
한 장교가 제 가슴팍을 비집고 나온 손을 보고 경악했다.
“부, 부관?”
부관의 눈동자는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다.
“흐하하하!”
“키득키득키득!”
사방에서 야만적인 웃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발밑을 고고히 흐르는 검은 안개의 물결은 점점 짙어져만 가고, 이에 맞설 광명의 빛은 한없이 왜소했다.
퍽!
“컥, 커억!”
막 마녀사냥꾼 하나가 목에 칼날 같은 깃털이 박힌 채 바닥을 굴렀다.
“켈켈켈켈!”
한때 브노아 장군이라 불렸던 무언가가 사방으로 깃털을 날려 대고 있었다.
깃털 하나가 하늘을 날 때마다 마녀사냥꾼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마녀사냥꾼은 일대와 마나를 얼리고, 상대가 가진 마나를 빼앗으며, 자신은 신성력으로 몸을 강화한다.
따라서 마나를 부리는 마법사에게 절대적인 우위를, 마나로 몸을 강화하는 기사들에게 상대적인 우위를 접했다.
침식자는 고위급일수록 마나보다 각자가 섬기는 옛것의 힘을 다뤘다.
대주교급 침식자가 만들어 낸 침식자들이라면, 마녀사냥꾼 앞에서도 무시무시한 힘을 낼 수 있었다.
팅!
나는 내 목을 향해 날아든 깃털을 용의 비늘로 튕겨 내며, 내심 땅이 꺼지도록 탄식했다.
침식자가 얽혀 있으리라는 건 예견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거물이 툭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루디가 한 천막 지붕 위에 올라서서 ‘어쩌죠?’ 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도 모르겠다.
그때 대주교가 나를 바라보았다.
“하얀 머리, 노란 눈. 솔레타라스의 잡종들이군.”
의외로 신선하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구나.”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솔레타라온에서는 큰 신세를 졌었지.”
역시 그 가짜 황족도 이놈들이 만든 게 분명했다.
“그래. 선물 잘 받았다. 내가 그 겨울 동안 아주…… 욕 좀 봤다.”
용의 심장이, 아즈의 파편이 공명하며 야만적인 분노를 증폭시켰다.
나는 앞일이고 나발이고 일단 불꽃을 피워 올리려 했다.
한 방이라도 먹여 주지 않으면 잠이 안 올 듯했다.
그때 대주교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그 신세를 갚겠다.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