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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0)화 (270/340)

(270)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회귀 전부터 나와 침식자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찢어 죽이려 하던 사이였다.

돌아가는 게 어떤가?

이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고 들으리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대답이 늦었다.

대주교는 그런 내 반응이 거절이라 생각했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합일을 이룬 분을 섬긴다. 네놈은 방해지만, 지금 당장 제거할 생각은 없다. 기회를 줄 때 돌아가라. 어린 솔레타라스야.”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숙영지 전체에 울렸다.

나는 저 오만한 말이 나름의 설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바, 발렌시아누스 전하.”

랑소와 공화국 장교 몇몇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악한 요술쟁이’ 운운하더니, 호칭이 ‘전하’로 바뀌는 꼴이 썩 귀여웠다.

나는 발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는 이미 숙영지 전체를 뒤덮었다.

“아아아악!”

죽은 병사는 안개를 뒤집어쓴 직후, 그 눈동자를 검게 물들이며 일어섰다.

나는 차근차근 계산을 해나갔다.

규모를 보아하니 이 숙영지에는 1만 정도의 병력이 있었을 테고, 정찰대, 분견대, 기타 등등을 포함하면 8천 정도가 상주하고 있었을 거다.

지금 전장 상황을 보아하니, 그들이 죄다 침식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했다.

내가 아무리 용찬 황족이라 한들 이렇게 넓은 곳에 퍼진 침식자 8천 명을 태워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잠시 뒤돌아 세레라지에와 루디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텐티아 경에게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루디는 약간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세레라지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디는 감각이 예민하고, 세레라지에는 강력한 마법사인 만큼, 대주교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이미 알아차렸을 거다.

나 때문에 이런 선택을 강요받게 된 게 미안할 뿐이다.

“그 제안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겠어.”

대주교의 얼굴 구멍 속 어둠이 만족스럽다는 듯 꿈틀거렸다.

나는 흑루를 늘어트리며 약간 고개를 숙여 보였고, 용언의 기운을 끌어 올리며 외쳤다.

“감사의 선물이다! 이 신에 버림받은 괴물 새끼야! 흔들리며 피어나는 불꽃!”

화르르륵!

놈의 발밑에서 새빨간 화염이 탐욕스럽게 솟아올랐다.

“이, 비겁한, 솔레타라스의 잡종이!”

검은 안개가 불타 연기로 변하고, 대주교가 예복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나는 허공에 불의 창을 연달아 띄워 올리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닥쳐라! 천한 것아! 이 세상의 것도 아닌 잡종이 감히 내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듯 굴어?”

쐐애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액!

거대한 불꽃이 터지고, 대주교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이 추하게 썩어 문드러진 괴물아, 귓구멍을 망치와 못으로 후벼파고 잘 들어라. 난 용혈 황족 발렌시아누스요, 세상 만물의 주인 되시는 신성 황제 제이릴리스 폐하께 침식자를 토벌할 권리를 하사받은 치안감이다. 네놈처럼 세상을 좀먹는 도둑 까마귀 새 떼에게 불벼락을 내리지!”

* * *

대주교가 불길 속에서 휘청이다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 어둠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조졌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중지를 세워 답했고, 곧이어 대주교가 움직였다.

그의 소매 안에서 장검처럼 거대한 검은 깃털 하나가 튀어나왔다.

놈이 그 깃털을 섬광처럼 베어 올렸다.

사아아악-!

파공성과 충격파가 일고, 놈을 감싸던 불길이 쩍 갈라졌다.

공간 그 자체가 잘려 나간 듯한 참격이었다.

충격파만으로 내 몸이 밀려날 정도였다.

“내 손을 뿌리쳤다면, 내 손에 죽어라.”

대주교가 검은 안개와 불길을 해치며 걸어 나왔다.

놈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올 때마다 바닥에 깔린 검은 안개 위로 파문이 일었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 네 손을 뿌리쳤지만, 널 꼭 내 손으로 죽일 생각은 없다.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을 뿐.”

우르르릉!

어느새 저 하늘에 거대한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이 추운 겨울날 어울리지 않는 습기 찬 바람도 함께였다.

구름 사이에서 노란 불꽃이 튀고, 세레라지에의 파란 눈에서도 노란 불꽃이 튀었다.

“준비되었잖니.”

번쩍!

지이이잉!

구름에서 번개가 내리꽂혔다.

일반적인 번개처럼 나뭇가지처럼 갈라지며 내려오는 대신, 신이 그들을 따르는 무리를 인도해주었다는 기둥처럼 일자였다.

콰과과광!

번개 기둥에 직격당한 대주교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놈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물씬 흘러넘쳤다.

“……감히!”

“그래. 감히. 네놈 같은 괴물이 감히 이 황형 발렌시아누스 앞에 나타나?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악한 것이?”

놈의 깃털에 검은 기운이 마나 블레이드처럼 어렸고, 나는 흑루에 용언의 불길과 마나를 불어 넣어 주황색 마나 블레이드를 준비했다.

물론 저 괴물과 정면으로 격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주교 하나를 잡다가 성기사와 전투 사제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는 보고를 들은 바 있었다.

그리고 광명신교에서 대주교에 대응하는 홍의주교와 일반 주교의 신성력 차이를 침식 교단에 그대로 대입해 본다고 할 때, 저놈은 정공법으로는 죽어도 못 잡는다.

“무릎 꿇리라.”

내 등 뒤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큰 뿔과 비늘이 돋친 소년의 모습을 한 불의 정령들이 우수수 날아올랐다.

한 100명 정도.

어지간한 놈에게도 예상외의 숫자였는지, 어둠 속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태워버려.”

“꺄하하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령들이 미친 듯 웃으며 돌진했다.

“한참 지나간 시대의 힘이구나.”

대주교가 자세를 고치며 깃털을 휘둘렀다.

검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쏘아져 나갔고, 닿기만 해도 불의 정령들이 소멸되었다.

“정령은 합일의 힘에 약하다. 모르는 건 아니겠지? 어린 솔레타라스야?”

놈이 날 쏘아보며 말했다.

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막대한 정신 파동이 밀려왔다.

하얀 제복 자락에 주름이 지고, 반사적으로 용의 비늘과 아즈의 파편이 솟으며 내 몸과 정신을 보호했다.

“늙은 반역자야. 내가 그 높게 솟은 머리를 반드시 반으로 잘라 주마.”

타악!

나는 주황색으로 달아오른 검을 쥐고 달려 나갔다.

촤아아악!

대주교가 사방으로 깃털을 쏘아내며 정령들을 소멸시키는 동시에, 장검 같은 깃털에 검은색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다.

“솔레타라스의 대공, 발렌시아누스라 한다.”

나는 텐티아 경처럼 정정당당하게 이름을 외치며 달려 나갔다.

“와라!”

놈이 후드 속에서 어둠이 일렁이며 호승심을 드러냈다.

나와 놈 사이의 거리가 3m쯤 남았을 무렵, 한 줄기의 빛이 놈의 무릎 뒤쪽에 틀어박혔다.

퍽!

“윽!”

검은 연기가 치솟고, 놈이 크게 휘청였다.

“발렌 님! 지금이에요!”

루디가 한 랑소와 공화국 장교 옆에 서 있었다.

공화국 장교는 한 손으로는 날개 기둥을, 한 손으로는 루디의 마총을 쥐고 있었다.

퍼어엉! 퍼어엉! 퍼어엉!

신성력 담긴 마탄이 대주교의 각 관절에 사정없이 꽂혔다.

“상아탑의 역작에 뭐 하는 짓이니!”

세레라지에의 비명이 한 차례 울리고, 대주교의 비명이 그녀의 비명을 덮으려 했다.

“이-!”

“그 사악한 주둥아리를 다물라!”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아오른 흑루를 놈의 얼굴 구멍에 내질렀다.

정령, 돌진, 대사, 전부 다 루디와 이 순간을 위한 속임수였다.

치이이익!

순수한 어둠이 소용돌이치던 후드 안쪽에 불타는 검이 작렬하고, 매캐한 검은 연기와 충격파가 미친 듯 일었다.

파지지직!

파르르르!

대주교가 장신의 몸을 부르르 떨었고, 나는 그 순간 승리를 생각했으며, 그다음 순간 이렇게 쉬울 리가 없다는 걸 떠올렸다.

우우우웅-!

대주교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물씬 피어올랐다.

검은 기운이 원을 그리며 역장처럼 퍼져나갔다.

“세상!”

“전하!”

그때 텐티아 경이 달려와 내 허리를 낚아채며 낙법을 펼쳤다.

그녀가 날 끌어안는 동시에 검은 역장이 팽창했다.

드드드드!

땅거죽이 갈아엎어지고, 천막 기둥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검은 안개가 놈의 장신에서 물씬 피어오르는 가운데, 대주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명백한 살의가 어린 시선이었다.

“비겁-”.

“비겁하다 말하지 마. 너희는 그럴 자격 없어. 말이 안 통하는 놈들, 협상도 타협도 불가능한 놈들. 너희는 뭔 짓을 해도 유죄야. 너희에게는 뭔 짓을 해도 무죄고.”

나는 그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치며 비릿하게 웃었다.

* * *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이 사방에서 되살아난 침식자와 뒤엉켜 싸웠고, 텐티아 경, 루디, 세레라지에가 내 옆과 뒤에서 날 보조했다.

대주교는 곧바로 달려들 기세더니, 의외로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잠시 의문을 품었고, 그 의문은 곧이어 풀렸다.

“하.”

사아아아-.

여기저기 천막 사이에서 척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은 침식자들이 튀어나왔다.

네 명은 대주교와 같이 검은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대주교보다 키가 약간 작은 대신 덩치는 거의 두 배였다.

후드도 대주교와 달리 일반적인 삼각형이었다.

그 넷을 따르는 여덟 명은 누가 봐도 기사 역할을 할 듯한 침식자들이었다.

마치 갑충과 전갈, 인간을 적당히 섞어 만든 듯했다.

검은 키틴질 갑옷과 뿔이 번들거리나, 인간처럼 두 발로 걸으며, 한 쌍의 거대한 집게발과 한 쌍의 긴 팔을 가졌고, 전갈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놈들 역시 적잖이 거대해서 기계 갑옷 입은 텐티아 경을 내려다볼 정도였다.

텐티아 경이 서늘하게 일갈했다.

“네놈들에게는 손속에 자비를 둘 필요가 없겠지.”

그녀가 대검에 붉은색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고, 놈들이 집게발을 딱딱 부딪치며 우리를 위협했다.

대주교가 그 추종자들 사이에 서서 날 바라보았다.

텐티아 경이 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전하. 악과 타협하지 않으시는 모습, 진실로 기사다우셨습니다. 제가 길을 열 테니, 두 분 전하께서 거악의 목을 치십시오.”

언제나처럼 한없이 늠름한 목소리였다.

“키에에에-!”

침식자 벌레 기사가 꼬리에서 침을 쏘며 달려들었다.

녹색 액체가 뚝뚝 묻어 나오는 게 강력한 맹독 같았다.

그녀는 그 독침을 판금 장갑으로 가볍게 튕겨 내며 외쳤다.

“내 갑옷에는 해독의 힘이 깃들어 있고, 내 몸에도 해독의 힘이 깃들어 있고, 내 영혼에 해독의 힘이 깃들어 있도다!”

그녀가 천둥처럼 검을 베어 내렸다.

벌레 기사가 거대한 집게발을 들어 올려 막았지만, 텐티아 경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며 기술을 이어 나갔다.

쾅!

붉은 섬광과 검은 기운이 충돌하고, 맹렬한 파공성이 이는가 싶더니, 벌레 기사의 집게발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주군이 내 등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기사의 심장에 꺼지지 않은 불길이로다!”

그대로 내리친 대검이 벌레 기사의 한쪽 발까지 잘라냈다.

벌레 기사가 쓰러지고, 텐티아 경은 스파이크 솟은 무릎을 차올려 벌레 기사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쾅!

공성 병기 같은 굉음이 일고, 벌레 기사의 몸이 붕 떠올라 뒤로 기울었다.

“내 주군은 옳고 네 주군은 그르니, 주께서 내 손을 들어 주심은 명백한 사실이도다!”

그녀가 섬광처럼 대검을 베어 올렸다.

츠카아악-!

벌레 기사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키득키득키득!”

“키리리릭!”

두 번째 벌레 기사와 세 번째, 네 번째 벌레 기사가 나섰지만, 텐티아 경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마나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악과 싸우는 주군께, 길을 보여 드릴 영광을!”

츠카카칵!

그녀가 검을 한쪽 허리에 가져다 대는가 싶더니, 붉은 반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마나 블레스트가 뿜어져 나가고, 벌레 기사 셋이 반으로 잘려 바닥을 굴렀다.

보다 못한 침식자 사제가 움직였다.

예복 소매 안에서 뼈와 살점이 뒤섞인 팔이 끝도 없이 늘어나며 튀어나왔다.

그 끝은 천 자루 창을 한데 엮어 만든 듯 예리했지만, 텐티아 경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허공에서 잡아챘다.

“!”

사제가 당황하며 다시 팔을 회수하려 했지만, 텐티아 경은 역으로 사제를 끌어당겼다.

“이리 오너라! 영혼의 죄인, 세계의 배신자야!”

우우우웅!

사제가 후드 안쪽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내려 했지만, 텐티아 경이 그 후드 안에 대검을 내지르는 게 빨랐다.

퍽!

대검이 후드를 꿰뚫고, 육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가운데, 소문의 적기사가 그녀의 검에서 마나 블레이드를 파도처럼 일으켰다.

“이 텐티아가 기다리고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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