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1)화 (271/340)

(271)

세레라지에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은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고.

‘대공 전하.’

‘오늘은 마법이 아니라 예절 교육을 받으실 겁니다.’

‘모든 황족을 붉은 달무리 궁에 모으라.’

타고난 피와 능력에 따르는 책임은, 그녀가 오로지 순수한 탐구만을 즐기게 하지 못하게 했고.

‘마경 출현율과 고위급 침식자 등장 그래프입니다.’

‘3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고위험 등급 마경이 대폭 증가했습니다.’

‘침식되는 마법사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대책을-.’

타고난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본 세상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위태로웠다.

결국 누군가가 무슨 짓을 해서든 그 위태로운 세상을 지탱해야 할 상황이 왔다.

세레라지에는 모두가 눈치나 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람이잖니.’

그러나 그녀의 이복동생 쌍둥이는 사람이 아니라서, 기꺼이 무슨 짓이든 했다.

‘반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그녀에게 방해가 될 만한 애들을 살려둘 수는 없으니까.’

그중에는 그녀를 연구실에서 끌어내 용병 마법사처럼 부리며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는 잔악무도한 짓도 있었다.

‘누나.’

‘싫잖니! 뭔지 모르겠지만 싫잖니!’

‘잘 부탁해.’

그리고 그 결과로, 세레라지에는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잖니.’

‘나 없이도 알아서 굴러간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렇지 않아서 문제잖니.’

그녀의 눈앞에서 텐티아가 침식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하!”

침식자 사제가 고밀도의 정신 파동과 검은 깃털을 뿜고, 벌레 기사가 집게발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둘을 베면 셋이 나왔고, 셋을 베면 넷이 나왔다.

세레라지에는 아무리 텐티아라도 저 고위급 침식자들을 모두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캉!

“크윽!”

실제로 여기저기 갑옷 판금이 부서진 곳이 늘어나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 역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발렌시아누스는 텐티아를 아꼈다.

옛날에는 체스 말을 대하는 듯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람에 관심 없는 세레라지에조차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아꼈다.

그가 당장 달려들지 않는 건, 지금은 그가 가진 침식의 지식을 활용해 타개책을 찾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래.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잖니.’

이제 가자면 가고, 찾으라면 찾고, 번개로 지지라면 지지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녀가 그녀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마법이잖니.’

최소한 마법적인 측면에서는 발렌시아누스보다 먼저 나서서 연구하고 분석해서 답을 찾아야 했다.

‘스승님에게서, 제이릴리스에게서, 네게서. 그저 주어진 걸 파헤치는 게 제일 재미있었단다. 이제 그 시간은 끝이잖니.’

20대에 6서클의 영역에 발을 들인 천재가 한 걸음 나아갔다.

‘이제 침식의 모든 걸 알아낼 거잖니.’

* * *

세레라지에는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침식자 사제들과 벌레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텐티아 경!”

텐티아가 밀리기 시작하고, 결국 발렌시아누스와 루디가 일선에 합류했다.

세레레지에는 그 수량을 파악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많잖니.’

아카데미 시험 기간에 나도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침식의 힘으로 소드 엑스퍼트만큼 강해지려면, 소드 엑스퍼트가 될 만큼 노력해야 하고, 그러니 침식되는 건 무조건 손해며, 불평불만 그만두고 수련이나 하라고.

‘아무리 대주교가 강력하다 해도, 저 정도 급의 침식자들을 이 자리에서 만들 수는 없을 거잖니. 그럼 어디서 왔다는 뜻인데, 그건 랑소와 정찰병들과 헬레나의 정찰병들이 모를 수가 없잖니.’

당장 그녀와 텐티아, 발렌시아누스도 루디가 미리 정찰병들을 재우며 길을 열어 놓지 않았다면 100번은 들켰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한들 현실이 된 이상, 틀린 쪽은 무조건 이론이다.

‘이론을 현실에 맞추려 하면, 랑소와처럼 만민 평등을 위해 마법사를 사냥하는 나라가 되는 거잖니.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자꾸나.’

세레라지에는 순식간에 침착함을 되찾았고, 이동과 관련한 지식을 머릿속에서 뒤졌다.

‘섬광 비행, 불꽃 비행, 바람 마법, 파괴술, 전이, 공유, 공유?’

공유라는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고, 가장 최근에 공유와 관련된 옛것과 얽혔던 사건이 떠올랐다.

“동생아!”

지금도 발렌시아누스가 아즈의 파편을 통해 텐티아의 기계 갑옷을 강화하고 있었다.

“뭐 좀 알 거 같아?”

“이 근처에 아즈의 파편이 있잖니! 지배력! 다 터트려버리려무나!”

발렌시아누스가 일순 노란 눈을 부릅떴다.

어울리지 않는 경악의 감정이 망나니 대공의 얼굴에 어리고, 그가 한 걸음 크게 물러섰다.

츠츠츠츠!

그의 손을 감싼 검은 장갑이 피부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 하얀 손이 금 간 도자기처럼 갈라졌으며, 그 사이에서 주황색 결정이 군데군데 솟아올랐다.

“잡아라!”

대주교의 후드 속 어둠이 일렁이고, 벌레 기사와 침식자 사제들이 발렌시아누스를 거세게 압박했다.

반투명한 검은색 촉수가 허공을 가로지르고, 보라색 저주 주문과 정신 파동이 메아리쳤으며, 벌레 기사들이 독침과 집게발을 휘둘렀다.

“전하!”

“시간을, 끌겠습니다!”

그러나 발렌시아누스에게는 강력한 동료들이 있었다.

‘적기사’ 텐티아가 피바다 일렁이는 대검을 쳐들고, ‘결투광’, ‘시녀 사수’ 루디가 리볼버 마총 아가테와 샌드웜 이빨 단검을 빼들었다.

“뚫렸다!”

“젠장!”

“대공!”

세레라지에는 랑소와 장교들의 비명을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일반 침식자들을 막고 있던 랑소와 병사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물지 마!”

“젠장!”

‘1인당 짊어져야 할 부담이 너무 커지고 있잖니.’

아군이 한 명 쓰러지면, 그 아군 몫까지 내가 맡아야 한다.

그런데 침식자와 싸울 때는 그 쓰러진 아군이 즉석에서 적으로 돌변하니, 부담이 두 배로 이상으로 늘어난다.

세레라지에는 다급하게 시동어를 외쳤다.

“자기 역장!”

우우우웅!

막대한 마나가 모여들고, 푸른 알갱이가 겹겹이 일어나며 침식자들을 밀어냈다.

“워어어억!”

“까아아악!”

침식자들이 세레라지에에게 칼날 같은 깃털을 쏘아내고 정신 파동을 내질렀다.

천재 마법사가 극심한 두통에 이를 악물었다.

“아프잖니.”

색이 다른 두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오고, 코피가 터져 줄줄 흘렀다.

그녀는 제 동생이 그걸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부터 확인한 다음, ‘관통의 섬광’을 쏘아내고 ‘사철 칼날’을 줄줄이 일으켰다.

“그럼 이제 마법사를 아프게 한 대가를 치르려무나!”

파지지직!

콰콰콰콰!

가을밀밭의 새 떼처럼 몰려들던 침식자들이, 뱀 앞의 쥐처럼 멈춰 섰다.

* * *

세레라지에는 연구마법사였지만, 본의 아니게 워록으로 활동할 때도 많았다.

딱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엘프, 오거, 용 등 강인하고 잔혹한 종족들의 피가 섞인 솔레타라스 황족이었다.

위치를 선점하고 타격할 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전투 감각 역시 뛰어났다.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잖니!”

지잉!

푸른 열선이 번뜩이면 침식자 하나가 바닥을 굴렀고.

“마법사들의 인식을 시궁창에 처박은 대가를 달게 받으려무나!”

위이이잉-!

검은 쇳가루가 소용돌이치면 질긴 깃털도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키에에엑!”

덩치 큰 침식자 사제가 끝끝내 루디와 텐티아를 돌파하고 달려 나왔다.

“발렌 님! 죄송해요!”

“세레라지에 전하!”

쿵, 쿵, 쿵, 쿵!

사제의 육중한 다리가 지면에 닿을 때마다 땅이 울렸다.

발렌시아누스는 물러선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린 듯 서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핼쑥하던 뺨에 깊은 그림자가 어렸고, 노란 동공은 반쯤 풀려 있었다.

세레라지에는 카리오스에게 선물 받은 ‘이카리스’ 진주로 만든 귀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어 날아올랐다.

지면에 고깔모자와 로브, 지팡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무나도 마법사다운 그림자였다.

침식자 사제가 후드 뒤집어쓴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후드 속 불그죽죽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볼 만 했다.

‘하늘을 날며 땅을 굽어본다. 이 얼마나 마법사다운 일이니?’

세레라지에는 새침하게 웃으며 번개를 불렀다.

파지지직!

“힘과 지식을 위해 옛것과 거래한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쫓는 데 지친 마법사라면, 한 번쯤 꿈꿔 보는 낭만이라고 하잖니.”

“키에에엑!”

“하지만 난 그게 왜 낭만이 되었는지 모르겠단다. 배움에는 왕도가 없잖니.”

파란 눈에 노란 전류가 튀고, 노란 눈에 파란 전류가 튀는 가운데, 진리의 탐구자는 애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서, 그 앞에 뭐가 있는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더 즐겁지 않니?”

지잉!

지이이잉!

그녀의 지팡이에서 푸른 전격 튀는 하얀 열선이 뿜어져 나가고, 사제의 큰 몸을 꿰뚫었다.

검은 예복 아래 감춰진 불그죽죽한 거구가 태양 아래 드러나고, 세레라지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배움의 고통은 싫었고, 그 열매만 원했구나.”

침식자 사제는 마치 뼈와 살이 뒤섞인 불가사리처럼 생긴 괴물이었다.

“그 열매를 제대로 먹는 법이 곧 배움이잖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보다 ‘왜’를 고민할 줄 아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것에서 공포보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무를 올라 마법의 열매를 딸 수 있는 거잖니.”

쿠르르릉!

번쩍!

먹구름에서 다섯 개의 푸른 빛기둥이 내려왔다.

“키에-.”

“나 같은 사람 말이잖니.”

세레라지에가 자신만만하게 웃는 동시에, 침식자 사제 다섯이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 * *

“감사합니다. 전하!”

“…….”

“동생아? 멀었니?”

텐티아 경과 루디가 한숨을 돌리고, 대주교가 다시금 장검 같은 깃털을 빼 들고, 세레라지에가 내심 침음성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찾았다!”

근처 천막 안에서 아즈의 파편이 공명하는 게 느껴졌다.

사방이 침식의 기운으로 가득한 데다가, 뭔가 모를 마도구에 가려져 있어서 위치를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싸우는 도중 계속 이동해서 눈치채는 게 늦었는데,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나니 브노아 놈의 천막이었다.

“어, 어?”

다시 확인해 보니 침식자 사제들과 기사들 모두 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나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아마도 전이 마도구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그 파편을 공명시켰다.

우우우웅!

보이는 않는 붉은 실로 나와 파편이 연결되고, 그 파편이 미친 듯 진동했다.

“너! 어린 솔레타라스야!”

뭔가 알아차렸는지, 침식자 대주교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절대 지나가지 못한다! 이 끔찍한 괴물아!”

“발렌 님에게서 떨어지세요!”

“네가 현실을 이상하게 만드는 놈들의 두목이잖니!”

텐티아 경이 대검을 휘두르고, 루디가 마총을 쏘고, 세레라지에가 번개를 떨궜다.

대주교의 주변으로 검은 깃털이 소용돌이치고, 검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갔다.

쩍!

텅!

파스스슷!

대검이 튕겨 나가고, 마총도 튕겨 나가고, 번개도 가로막혔다.

나는 마도구의 부품일 아즈의 파편을 부수려 한껏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내가 가진 마나와 불길이 그쪽으로 흘러 들어가며 한없이 증폭되었다.

그 순간 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터지면, 여기 다 날아간다.

아즈의 파편은 필리오스와 협상한 밤 제이릴리스가 보여준 무한의 서클과 같았다.

화르르륵!

아무리 작은 파편이라도, 내 역량과 제어력에 따라 끝없이 힘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눈앞에 파편이 보이는 듯 어른거렸다.

푸른 파편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텐티아 경! 루디 챙기고 빠지게!”

텐티아 경이 루디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날렸다.

“누나도 빠져!”

세레라지에가 하늘을 포르르 날아 물러섰다.

나는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대주교를 보며 아릿하게 웃었다.

탑처럼 솟은 후드 아래 어둠이 분노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실 나도 내구성에는 자신 있는데.”

제복 또 찢어지겠네.

츠츠츠츠.

나는 온몸에 비늘을 두르며 대주교를 기다렸다.

“이제야 둘이군.”

놈이 장검 같은 검은 깃털을 쳐들었다.

사아아악!

검은색 마나 블레이드가 단숨에 내 몸을 갈라버릴 듯 빛났다.

난 서늘하게 웃으며 아즈의 파편을 폭발시켰다.

“아니지. 나도 합일을 이뤘거든.”

콰아아앙!

수십 걸음 떨어진 천막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쿠구구구-!

맹렬한 충격파가 일고, 버섯 모양의 구름이 솟았다.

새빨간 불길이 탐욕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며 몰려왔다.

보이지도 않는 대주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듯했다.

“하하하하!”

나는 미친 듯 웃으며 양팔을 쫙 벌렸다.

자, 우리 둘 중에 누가 불에 더 강할까?

시험해보자.

……어?

마지막의 마지막, 누군가가 나를 잡아끄는 듯한 손길이 느껴졌다.

* * *

“제발 좀 몸 사리려무나! 대체 팔은 왜 벌린 거니? 그 상황에서도 멋을 부리고 싶었니? 급하게 섬광 이동 쓰느라 숨 딸리잖니!”

새레라지에의 남색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기껏 날 네 길에 끌어들였잖니! 세상도 재미있을 거라고 날 유혹했잖니! 그래 놓고 네가 먼저 죽으려 하면 어떡하니?”

바닥에 깔린 검은 안개는 사라졌지만, 아직 버섯구름은 가시지 않았다.

폭발로부터 몇 분도 흐르지 않은 듯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죽을 생각 없었어. ……대주교는?”

“팔 하나랑 마도구 조각을 두고 도망쳤잖니. 반쯤 녹아내린 꼴 보니 속이 다 시원하더구나.”

“아.”

죽이지는 못했구나.

깊은 후회와 함께 호승심이 차올랐다.

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얼굴을 지져버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동시에, 대주교를 죽인 만큼이나 큰 소득도 얻었다.

세레라지에.

희대의 천재 마법사가 세상에 의욕을 드러냈다.

“그리고 폭발에 휘말린 랑소와 병사 2천 명 정도가 다쳤잖니. 아. 저기 에릭이 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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