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272)화 (272/340)

(272)

“발렌시아누스 대공.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에릭이 난장판이 된 숙영지와 다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우리 병사들을 다 죽이려 했던 겁니까?”

파란 눈동자가 경악에 차 파르르 떨렸다.

“이, 이럴 거면-.”

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의원.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도록.”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니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저희 병사 2천 명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에릭이 덜덜 떨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버섯구름을 피워 올린 마법사가 나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대의를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그를 위해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2천이라. 후방으로 호송하려면 남은 병력이 거의 모두 필요하겠군. 본국 의회에 보고할 명분으로는 충분하지 않겠나? 브노아 장군이 침식자를 불러왔고, 해당 침식자와 교전하던 중 너무나 심각한 손실을 당해, 전투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이거 어떤가?”

에릭이 잠시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라면 단숨에 군부와 주전파의 사기를 꺾어버릴 만한 명분이 되었다.

전쟁, 전쟁 노래를 부르더니, 실제로는 준비되지도 않은 상태였다는 게 증명된 거니까.

정치적 자산을 얻었다는 흡족함도 잠시, 에릭의 수려한 얼굴은 빠르게 비애감으로 물들었다.

“……브노아 장군.”

그가 날 이끌고 랑소와 공화국 장교들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까지 걸어갔다.

“전하. 브노아 장군이 정말로 침식자였던 건 아니겠지요?”

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침식자와 거래를 한 건 사실이었지. 침식자들이 몰려나올 때 사용하던 마도구도 놈이 가지고 있었고.”

“아…….”

“하지만 성물을 다루던 모습이나, 침식 당시의 모습, 내가 전에 보았던 모습만 생각하면…… 원래는 깔끔했을 거네. 물론 육체적인 면에 한정해서.”

에릭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

나는 나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물론 내가 유리한 부분만.

“게다가 침식자들은 우리 제국의 적이기도 하지.”

‘함께’ 대주교와 싸우던 중 랑소와 공화국 병사들을 화살받이처럼 썼고.

대신 나도 죽을 뻔했으니 불만 없지?

물론 그들은 죽고 나는 죽을 뻔했지만, 이럴 때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우겨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계산을 하며 말한 나와 달리, 에릭은 진심으로 감명받은 표정이었다.

“국적과 신분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이 함께 싸웠군요. 의회에서 협력과 공존, 평등을 함께 말할 근거가 되겠습니다.”

“…….”

그래.

또 나만 개자식이지.

물론 랑소와 공화국 의원이면 저 정도 입에 발린 소리야 숨 쉬듯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난 에릭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악명 높은 날 찾아와 당당히 머리 숙여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난 나지막이 한숨 쉬며 내가 파악한 상황을 공유했다.

“난 원래 브노아를 척살하고 회군파 장교가 지휘권을 잡는 걸 도와주기 위해 왔었다.”

에릭이 눈을 깜빡였다.

“예?”

“제국에서는 자주 쓰는 공작이다. 가주를 죽이고 그 동생이나 둘째 아들처럼 본래라면 가주가 못 될 자가 가주가 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거지.”

정확히는 제국이 아니라 내가 자주 쓰는 공작이었다.

“약간만 등을 밀어줘도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다. 1인자가 죽으면 조직 안에서 1인자를 개인적으로 따르던 파벌은 흔들리고, 2인자의 파벌은 강성해지는 법이니까.”

“그럼…… 왜 이 사달이 난 겁니까? 원래는 브노아와 주전파 몇 명만 제거할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에릭이 초토화된 숙영지를 둘러보며 물었다.

사방이 불타올랐고, 병사들은 일렬로 누워 신음했으며, 성수 저장고는 어떤 사악한 화염 마법사의 공격에 터져 버렸고, 장교들은 탈진해서 기도와 축복을 쓰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사실만을 말했다.

“브노아를 찾아서 죽이려 하던 순간, 놈의 천막 안에서 침식자가 나왔다. 브노아는 놈을 대주교라고 부르더군. 그다음부터는 대충 짐작하는 대로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죽이고, 검은 깃털이 브노아를 침식시키고, 제국과 공화국 이전에 생존을 위해서 함께 싸우게 됐지.”

에릭이 이를 악물었다.

“그저.”

“그저?”

“모든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역시 본래는 공화국의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살다 보니 그렇더군.”

에릭이 그 말이 몹시 당혹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면서.

“제가 알기론…… 대공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넘지 않았습니까?”

나는 내심 탄식하고, 고함쳤다.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하는 법이니까?

“가서 회군파 장교들이나 빨리 포섭하도록!”

* * *

난 에릭이 다니엘이라는 장교와 만나고,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걸 확인한 다음, 몇 개 남지도 않은 성수를 훔쳐 내 사람들 주변으로 돌아갔다.

“아파요.”

“참아.”

“네.”

침식자에게 입은 상처에 성수를 바르면 환부가 정화된 다음에 치유되고, 여기서 정화는 ‘태우다’와 같은 말이었다.

치이이익!

루디는 얼굴을 찡그리며 치료를 마쳤고, 텐티아 경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성수 병을 바라보았다.

“발렌 전하. 지금 저희가 이걸 받아와도 되는 상황-.”

“어허! 대공이 줬으면 눈 딱 감고 감사합니다! 하고 받게나.”

“아니, 지금-”.

“경이 쓰러트린 랑소와 중장 보병대원이 수십 명일세. 지금이야 서로 뻘쭘하게 서 있지만, 다시 만나면 적이야.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빨리 바르게. 출혈이 없다면 머리에라도 붙게. 침식자하고 싸운 다음이라서 꼭 정화해야 해.”

나는 텐티아 경의 투구를 벗겼고, 붉은색 쇼트커트 머리카락 위로 직접 성수를 부어 주었다.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한겨울임에도 갑옷 안에서 증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전하. 그-”

텐티아 경이 무언가를 신경 쓰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과 목에 묻은 물기까지 모두 닦아 주었다.

“보게. 검댕이 묻어나지 않나? 방금 정화된 옛것의 기운일세. 이런 걸 뒤집어쓰고 있다가 조금씩 침식되는 거야. 싸움이 끝나면 반드시 곧바로 조처를 해줘야 하네.”

그때 세레라지에가 한 마디를 더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내 동생 놈 말이 맞잖니.”

난 목덜미를 잡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뭘 또 인정하기는 싫데! 그냥 뒤에 말만 말하면 어디가 덧나?”

“내 마음이 덧나잖니.”

“마법사에게 마음도 있었어?”

“어머나. 그걸 말이라고 하니?”

세레라지에가 조소하더니, 새침하게 남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을 돌렸다.

“이야기는 잘 끝났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적어도 당장 우리를 공격할 거 같지는 않아.”

그녀는 뭔가 붕대로 칭칭 감은 덩어리 세 개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럼 빨리 챙겨서 돌아가자꾸나.”

하나는 내 팔보다 약간 긴 길이에 사악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고, 하나는 가방과 비슷한 크기였으며, 하나는 부러진 창대 같았다.

대체 이걸 어떻게 다 붕대로 감은 건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이게 뭔데?”

세레라지에가 눈썹을 보기 좋게 치켜세웠다.

“말했잖니? 대주교가 팔 하나를 떨어트렸다고. 당연히 가서 연구해 봐야 하지 않겠니?”

나는 그 팔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거 감당 안 될 정도로 위험한데.”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아니. 이 팔이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침식될 수 있었다.

“나도 알잖니. 아. 그 창대는 양산 성물이고, 그 덩어리는 마도구란다.”

“마도구?”

세레라지에가 내게 바싹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착 낮췄다.

그을린 탄내와 상큼한 레몬 향기가 동시에 났다.

“대주교와 사제, 기사들이 넘어왔던 전이의 마도구란다. 그게 들어 있던 마도구 가방 채로 챙겼잖니. 물론 많이 부서졌지만, 조각만이라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잖니.”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물었다.

“아니. 그 폭발에서 이게 남아났다고?”

그 무시무시한 대주교가 곧바로 만신창이가 되어 도망칠 정도의 폭발이었는데, 마도구 따위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세레라지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도 연구 대상이란다.”

“그래. 알았어. 재빠르게도 챙겼네. 그럼 빨리 튀자. 일단 헬레나 누나부터 만나러 가야겠네. 저 산 중턱에서 이게 뭔 상황인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테니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나 공간을 다루는 마법은 너무나도 어렵고, 그나마도 이용보다는 원리 파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저걸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 * *

나는 랑소와 공화국 장교들의 추대를 받은 다니엘이 회군 명령을 전달하는 걸 보았고, 눈앞에서 전투 기회가 날아갔다는 사실에 절망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악을 쓰는 헬레나를 끌고 니벨룽겐 옆 숙영지로 돌아왔다.

그곳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얼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마경이랑 침공을 둘 다 해결해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황실의 은혜를 밤낮으로 찬미하겠습니다~.”

이 긴장감 없는 목소리의 주인은 프로이하이트 가문의 어린 가주, 시그나인이었다.

연갈색 머리를 풍성하게 묶었고, 창천의 매처럼 서늘한 하늘색 눈과 영악한 웃음은 화려한 부채를 방패 삼아 가렸으며, 창천 기사 열댓 명과 봉신 기사 서른여 명을 호위 삼아 대동하고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제 영지 안에서 일어난 일인데, 마무리는 제가 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거든요. 부랴부랴 모병하고 봉신들에게 편지 보내서 군대 만들어 왔죠.”

나는 내심 실소했다.

“큭.”

아니, 대놓고 실소했다.

저 말을 대귀족 식으로 해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사실상 프로이하이트 영지가 침공받은 상황인데 황실이 다 해결한 걸로 되어 버리면 위신이 떨어지니, 마무리라도 해서 숟가락 얹겠다.

둘째, 그럼 서부와 남서부 사이, 주권 애매한 영토를 침공한 놈들을 물리친 게 내가 되니까, 그걸 명분 삼아서 이쪽 눈먼 땅에도 요새 짓고 봉신들 보내서 영토 확장 좀 해보겠다.

셋째, 내가 군대 만들어 왔으니 이제 꺼져라.

나는 이 직설적인 메시지를 곧바로 파악했고, 시그나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웃었다.

“지금까지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여기 제 마음의 표시랍니다.”

시그나인의 병사들이 커다란 궤짝과 자루를 끝도 없이 들고 왔다.

차르르르.

묵직한 금화와 반짝이는 은화가 부딪치는 소리가 자루를 열어보기 전에도 들렸다.

루디가 해맑은 표정으로 자루를 껴안았고, 나는 시그나인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너 부자였지?”

내 웃음을 본 시그나인이 기겁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칵! 프로이하이트는 원래도 후작가였다고요. 전대 가주님이 이상한 짓만 안 했어도 더 부자였을 거예요.”

방금 내 표정이 좀 사악했나 보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렸다.

“그래. 그래. 헬레나 누나. 누나가 두어 자루 더 챙겨. 애들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지.”

헬레나는 터지기 직전의 화산 같은 기세를 뿜고 있었다.

“난! 부귀영화가 아니라! 전투를 원했단 말이다!”

이걸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시그나인이 청솔모처럼 조르르 달려갔다.

“전하, 전하. 지금 제가 얻은 인스트루멘툼 쪽에 마적 떼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혹시 토벌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보급과 금화는 넉넉히 대 드리겠습니다.”

헬레나의 얼굴색이 터지기 직전의 화산(火山)에서 꽃이 만개한 화산(花山)으로 변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루디와 텐티아 경을 불러 자루와 상자를 챙겼다.

“자자. 대영주께서 금화를 주셨으니 감사히 받자고. 싸우고 싶은 사람은 싸우게 두고, 우리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새해는 제이릴리스 곁에서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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